하이텍알씨디코리아, 산재 승인 문제로 4년째 ‘투쟁’ 중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산재 승인 문제로 4년째 ‘투쟁’ 중
  • 성지은 기자
  • 승인 2005.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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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계속된 감시가 가져온 우울증
건강하게 일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

쨍한 날씨에 가을답지 않게 후텁지근했던 오후.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본부 앞에 설친된 비닐 천막 안은 여름마냥 후끈했다.
천막 밖에 돗자리를 깔고 동그렇게 모여 앉은 금속노조 하이텍알씨디코리아지회 김혜진 지회장과 연대중인 시민단체, 학생들 간에 웃음이 터져나온다.

"이런 날에는 막걸리 한 잔 먹어줘야 하는데. 오늘 집회 끝나고 막걸리 한잔 할까? 지회장님 냄새라도 맡게 해줘야지." (김 지회장은 단식 중이다)
"나쁜 놈들, 여기서 먹는 라면이 얼마나 맛있는데 그것도 못 끓여 먹게 하고, 먹을 땐 강아지도 안 거드리는 건데, 아주 그냥 인권침해로 맞고소 할 거야."
"이런건 녹음하지 말아요. 우리가 또 녹음하는 거 엄청 싫어하거든."

어제 저녁거리와 오늘 아침 반찬을 이야기하듯, '아줌마들의 일상'처럼 수다를 떤다. 소리를 높여 TV 유행어를 따라하기도 하고, 서로 싱거운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추석 연휴를 앞둔 9월 16일, 길가의 풍경이었다.


평범한 추석을 맞고 싶은 사람들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나도 사람이에요. 집에만 가고 싶은 줄 아세요? 놀러도 가고, 하루쯤 늘어지게 낮잠도 자고 싶다구요”.
“지회장님이 요새 물도 잘 못 드세요. 본인은 괜찮다고 하는데”.

4년째 회사를 상대로, 또 산재 승인을 위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투쟁을 벌이고 있는 ‘장기투쟁 사업장’ 하이텍알씨디노동조합의 조합원은 열세 명.
단식 31일째에 접어들어 건강상태가 많이 악화된 김혜진 지회장을 대신해 정은주 부지회장과 마주 앉았다.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해 벌써부터 썰렁한 도심의 분위기가 벌써부터 먹먹하게 다가올 텐데, 이제는 ‘참는 것’이 이골이 났다.
“저도 사람이고 여자인데요. 집에 가서 부모님 뵙고 남들처럼 추석에 음식 해 먹고 평범하게 직장 다니면서 사는 것이 왜 싫겠습니까. 그냥 다 그만두고 다른 직장에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천막을 걷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들어요”.

곰곰 생각하던 정은주 부지회장은 곧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 많은 동지들을 두고, 어유……, 절대 못가요. 어떻게 가요. 100명이 넘는 분들이 릴레이 단식으로 함께해 주신 거, 여기 함께 있으면서 의지하고 서로 위로한 것들까지, 내가 할 일이 명백하기 때문에 힘을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벌써 2년째 쓸쓸한 추석을 맞고 있기에, 이렇게 농성장에서 조합원들을 보는 조합 간부들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그래도 추석인데 참치세트라도 준비해서 조합원들이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할까라는 생각도 하고, 함께 음식이라도 해서 나누려고 생각해 보기도 했는데, 그래봤자 조합원들 마음이 편해지겠습니까. 투쟁만 생각하기로 했어요”.

항상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지금까지 단 하루도 다리를 뻗고 잘 수 없었던 날들. 농성장에서 보낸 명절들. ‘참치세트’의 의미가 가진 무게를 알기에 그들은 많이 지쳐 보였다.
“분명히 내가 흠씬 두들겨 맞았는데, 다음날 때린 놈이 맞았다고 고소를 했다 생각해봐요. 말도 안돼서 싸우는 겁니다. 너무 억울하잖아요. 이건 적당히 타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4월, 하이텍알씨디코리아는 노동조합 해고자를 포함해 조합원 8명에 각 2억 원씩 손해배상 본안소송을 냈다. 본안소송에서 회사가 승소해 유예기간 없이 배상판정이 나면 곧바로 지급을 해야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머리를 싸매고 전전긍긍해야 하는데 이들은 오히려 느긋하다고.

“다들 2백이나, 2천쯤 되면 차라리 걱정하겠다고 그래요. 우리한테는 현실감이 없는 숫자잖아요.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봐라 그래요”.
근로복지공단의 판정이 나기 전, 정은주 부지회장은 담담하게 이후를 예상했다.
“얼마 전에 담당형사가 와서 ‘여기서 일단 결말이 나면, 노동부를 상대로 싸워야 할건데 여기 계속 있을 거냐’고 슬쩍 떠보더라고요. 저 안에서는 이미 결론이 나 있는 것 같아요. 별로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고, 이제 우리도 준비해야지요”.

이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그들의 움츠러든 어깨를 다시 펴지 못한다고. 뒤에서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철렁한, 옷깃만 스쳐도, 말을 걸어와도 소스라치게 놀라던 지난날들의 감정이 보상받지 못하는 이상 물러날 수 없다고 한다.
“힘없이 밀리다가 분노에 치여 악이라도 쓸라치면 결국 노동조합의 업무 방해 증거물로 돌아오죠. 카메라가 어느 곳에서나 나를 지켜보고, 화장실에 몇 분 있었는지 남이 시간을 재요. 이상하지 않아요? 상식 밖의 일이라고, 우리가 당하고 있다고 목이 터져라 매일매일 말하고 말했는데. 그게 우리의 병과 아무 상관이 없다니요”.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노동조합 안에서도 서로 다투는 날이 많았다. 다투면서도 도청과 CCTV 때문에 목소리를 높이지도 못했다. 그저 입만 벙긋벙긋할 뿐이었다.
노동조합 간부를 비롯한 하이텍알씨디노동조합 조합원 전원이 ‘우울증을 수반한 만성 적응장애’ 판정을 받고 나서야 그동안 왜 그렇게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먹지도 못 하고 신경질적으로 불안해했는지 알 것 같았다.
화장실에 작은 구멍만 있어도 그 구멍을 살피고, 집이나 식당과 같은 일상적인 곳에서도 주위를 둘러보는 버릇이 생겼다.

천막농성장에서 행복하다는 사람들

“제일 받고 싶은 추석 선물이요? 당연히 산재승인이죠”.
“우리 지회장님 건강이 더 이상 악화되면 안 되는데. 하루라도 빨리 단식을 끝내실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어요”.
2001년 임단협 당시에, 42일 간의 단식으로 결국 병원에 실려 갔던 김혜진 지회장은, 계속된 장기 투쟁과 몸싸움, 그리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몸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다시 단식에 들어간 상태다.

하지만, ‘옆에 계신 분들 때문에 웃느라고 힘들지 다른 것은 괜찮다’며 그저 웃는 김혜진 지회장은 이미 다부진 각오가 되어 있어서일까. 오히려 차분한 모습이다.
잠시 후 한 참가자가 산책을 다녀온다며 나가더니 알이 굵은 사과를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내가 못 먹으니까 냄새는 제일 먼저 맡는 거야’ 하며 코에 사과를 대고 향기를 맡은 김혜진 지회장은 빨간 사과를 닦아 부지회장에게 내밀었다. 함께 앉아 마음을 나누며 탐스러운 가을 사과를 나눠 먹는 그들은 잠시, 행복해 보였다.

“‘행복하세요’라고 묻는다면 네, 우리는 지금 행복해요. 사과 한 알, 음료수 한 캔이라도 먼저 챙겨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천막농성장이 꽉 차고 잘 데가 없어 옆에 있는 민주노총 사무실 바닥에서 자고 아침에 오는 사람들도 있고요. 우리들이 이렇게 서로 의지하고 있는데요. 계속 싸워나갈 거예요. 그렇게 해야죠.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가야 합니다. 죽을란다, 하니까 ‘그래 죽어라’하는 거 아닙니까”.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타협할 수 없다는 말로 다시 한번 다짐을 하고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연대집회를 했던 그날, 근로복지공단에서는 전원 ‘산재 불승인’ 판정이 떨어졌다. 추석 연휴를 하루 앞둔 그날 말이다.

조합원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다. 함께 너털웃음을 한번 웃으면 그만인 것이라고.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라고.
철옹성처럼 굳게 닫힌 근로복지공단 철문 앞에 이제 다시 섰다. 그저 ‘많이 안 좋다’며 말끝을 흐리는, 김혜진 지회장의 단식투쟁은 물론 9월 30일부터 시작된 500인 릴레이 단식까지.

몸을 내던져 지키려고 하는, 눈을 감고 묵묵히 버티는 장기투쟁사업장의 모습이 ‘악’과 ‘깡’으로 비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이것이 맞는 것 아니냐’고 되묻는 그들에게 이 사회는 어떤 말을 해야 할 것인지. 그들은 오늘도 묵묵히 몸을 던져 묻는다.

“우리가 틀렸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