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스틸 통합노조 초대 위원장 조택상
INI스틸 통합노조 초대 위원장 조택상
  • 박경화 기자
  • 승인 2005.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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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카만 속옷 남몰래 찢던 기억이 내 운동의 원천”
진정한 운동은 기득권 버리고 새로운 길 여는 것

어쩌다가 택한 ‘쉽지 않은 길’이 꿈이 되고 삶이 되는 사람이 있다. 지난 9월 12일 치러진 INI스틸 통합노조 초대 위원장 선거에서 82.2%의 지지를 얻어 당선된 조택상 위원장도 그런 이 중 하나다. 인생의 굴곡마다 ‘참 운이 없다’ 싶을 정도로 험한 길만 걸었던 그가 처음으로 터뜨린 ‘대박’은 인천, 포항 양 공장 노조의 통합이라는 ‘옥동자’ 탄생이다.

당선 직후 인천공장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만난 조택상 위원장은 “통합 노조 탄생까지 진통도 있었지만 끝내는 통합 필요성과 연대의 원칙을 인정해준 조합원들의 마음을 잊지 않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1사 2노조, ‘노동자끼리’ 싸워야 했던 아픔

2000년 인천제철의 강원산업(현 포항공장) 인수 후 2001년에 인천공장과 포항공장은 현대자동차그룹으로 편입, 사명을 INI스틸주식회사로 통일했다. 그러나 인수합병 당시 통합되지 않았던 노조는 올 8월까지 5년째 1사 2노조 체제로 유지됐다.

특히 합병 3년차에 포항공장의 임금 및 인사 제도를 인천공장과 동일하게 맞춘다는 약속이 흐지부지되면서 포항공장 조합원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인천과의 미묘한 갈등으로 나타났다.
급기야 지난해 임단협 때, 인천공장 노조와 포항공장 노조가 바리케이트를 사이에 두고 맞서는 일이 벌어졌다. 포항노조는 인천공장 노사의 ‘기본급 동결’ 결정에 반대하며 조합원 총회 부결을 위해 인천공장 진입을 시도했고, 인천노조는 ‘총회 방해 저지’를 명목으로 포항공장 노조를 막아섰던 것.

조 위원장은 “매년 반복되는 노동자 간의 싸움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한다. 결국 그는 2004년 말 인천공장 노조 위원장 선거에 ‘양 공장 노조 통합 추진’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해 당선됐다. 그리고 올해 6월 임단협에서 포항노조와 인천노조는 첫 공동 임금협상으로 통합의 포문을 열었다.

통합 위해 2년 6개월의 임기를 포기하다

역사상 처음 열린 공동임투 출정식 날. 연단에 오른 조택상 위원장은 “공동 임금투쟁을 승리로 이끌고 포항공장 노조와의 통합을 위해 남은 2년 6개월의 임기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포항노조의 임기가 끝나는 9월에 맞춰 통합선거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

공약 사항이기는 했지만 인천노조 구성원들에게는 당황스럽고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이 때문에 ‘위원장 독단’이라는 일부 대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두 가지 생각이 있었어요. 하나는 임금투쟁을 진행하면서 조합원들의 신임을 묻겠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신임을 못 받더라도 통합의 물꼬는 틀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통합 원년이라는 명분을 살릴 수 있었을 거고 나쁜 결과가 나온다면 승산이 없는 싸움을 벌인 게 되는 상황이었죠.”

그로부터 3개월 후, 그의 선택은 통합 원년이라는 ‘명분’을 넘어 통합의 ‘실현’으로 나타났다.

‘줘도 못 먹는다’는 꼬리표

양 노조 통합의 1등 공신으로 꼽히는 조 위원장의 별명은 ‘줘도 못 먹어’다. 듣기에 꽤 유쾌하지 않은 별명의 유래는 92년 인천제철 위원장 선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반수 득표자 당선 원칙은 있었지만 최고 득표자 당선이 관례였던 때 처음 선거에 출마한 그는 과반수보다 6표를 덜 받았다. 하지만 선관위는 최고 득표를 인정해 당선증을 교부했다. 그런데 상대 후보가 과반수 득표 원칙을 근거로 재선을 요구했고 상대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여 진행한 재선에서 그는 낙선하고 만다. 이렇게 탄생한 ‘줘도 못 먹어’라는 별명은 이후 세 번의 위원장 선거에서 매번 2등으로 낙선한 그에게 ‘꼬리표’가 됐다.

그 꼬리표를 달고 5번의 도전, 17년 만에 당선된 위원장 자리였다. 통합이라는 대의를 위해 그 자리를 6개월 만에 내놓는다고 했을 때는 고민이 없었을 리 없다.
“고민했죠. 이번에는 포항노조 선거만 진행하고 포항 새 집행부 임기가 끝나는 2007년 9월에 통합선거를 하면 제 임기는 3개월만 포기하면 되는 셈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러니까 ‘줘도 못 먹는단 소릴 듣는다’며 말리기도 했지요. 하지만 우리 노동자들끼리 싸우는 것을 더 지켜볼 이유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푸른 공기’를 위해 시작한 노동운동

그가 노동운동에 몸을 담게 된 계기는 참 ‘사소한’ 것이다. 83년 중기부로 입사해 3년 뒤부터 전기로에서 근무하게 됐는데, 당시만 해도 집진시설이 없어 작업장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분진과 열기가 가득했다. 좀 더 깨끗한 공기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 때는 노동운동의 ‘노’자도 몰랐어요. 노조가 뭐하는 곳인지,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으니까요. 고민 끝에 혼자서 ‘푸른 공기를 원한다’는 유인물을 만들어 몰래 현장에 뿌렸습니다”.
그는 단지 인간적인 작업환경을 원했을 뿐이지만 서슬이 퍼렇던 80년대였다. 이 일이 회사에 적발되면서 조 위원장은 ‘특별감시 대상’이 됐다. 현장에서 말을 붙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철저히 격리됐고 대기발령과 차별대우에 철저히 혼자 맞서야 했다.

하지만 당시 노동조합은 그에게 ‘월권’을 했다며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그 때 처음으로 노동조합의 존재를 알게 됐다. 이 일을 겪으면서 ‘나도 대의원 한번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시작이었다.

조직도 사람도 없었던 그는 연거푸 대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점점 민주노조 운동을 알아갔고 주변에 사람도 하나 둘씩 생겨났다. 하지만 그 이후로 노조 집행부 활동과 네 번의 위원장 선거 도전은 늘 실패와 좌절을 안겨줬다. 네 번째로 위원장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 노동운동을 완전히 접으려고도 했단다.

“실질적 통합 실현까지 조합원 지혜 믿고 가겠다”

하지만 파릇한 스물다섯 새신랑, 아내가 깨끗하게 빨아준 흰 속옷이 퇴근할 때면 먼지에 새카맣게 절어 남몰래 화장실에서 속옷을 찢어 버리며 소망했던 ‘푸른 공기’의 꿈은 그에게 언제나 진행형이었다.
그 ‘푸른 공기’가 20년 전에는 ‘인간답게 일할 권리’였다면 지난해까지는 ‘통합노조 건설’이었고 이제부터는 당진공장까지 포함하는 실질적 통합의 실현이다. 조택상 위원장은 자신 앞에 놓인 또 하나의 험난한 길은 결국 조합원과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길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합원들은 결국 옳은 선택을 한다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닥치겠지만 결국 통합을 지지해준 조합원들의 지혜를 믿고 가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