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교섭 예비창구로 전락한 노사협의회
단체교섭 예비창구로 전락한 노사협의회
  • 하승립 기자
  • 승인 2005.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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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협의회, 무엇이 문제인가
‘걸러지지 않는 의제→지리한 협상→지켜지지 않는 합의’ 악순환

올해 임금 및 단체교섭의 ‘뇌관’으로 주목받던 일부 대공장 노사의 교섭이 별다른 마찰 없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춘투의 관행을 넘어 이제는 ‘하투’가 일상화되기는 했지만, 전통적으로 가을, 겨울은 노사관계에 있어 ‘농한기’였다. 따라서 ‘한가한’ 시절이 이어져야 정상이다.

그러나 ‘교섭’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노사협의회가 본연의 ‘협의’ 기능에서 ‘협상’으로 바뀌어 가면서 ‘연중 협상’ 형태가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임금 교섭을 마친 S사 K과장은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다. 단일한 의제로 진행되는 임금 교섭보다 주로 후생복지 관련 요구가 쏟아지는 노사협의회가 더 난관”이라고 토로했다.

노사협의회는 또다른 단협?

노사협의회의 안건은 대부분 수당, 산업안전, 복지, 작업장 환경 등 고충처리 사안이다. 안건 구성 자체가 단체협약과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따라서 단체협약의 연장선상에서 노사협의회가 운영되고 있다.

이같은 노사협의회의 ‘성격 변화’는 한국노동연구원이 제조업 691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사업채패널조사 결과에서도 잘 드러난다. 노사협의회의 활용정도를 묻는 질문에 ‘근로자 복지개선을 위한 협의기구로 활용’한다는 응답 비중이 가장 높았다. 이에 비해 ‘조직개편 논의 기구로 활용’하거나 ‘생산성 향상에 관한 논의기구로 활용’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났다.

목적은 ‘참여’ 운영은 ‘주고받기’

노사협의회는 ‘근로자 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에 의해 의무적으로 두도록 되어 있는 노사협의기구다. 제도가 명시되어 있는 법률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노사협의회는 ‘참여’를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참여의 개념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일반적으로 대립적 성격이 강하고 쟁의행위가 가능한 단체교섭과는 달리 ‘협상’이 아닌 상호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기업전체의 발전을 위해 ‘협의’하는 기구라는 정의는 사문화되어가고 있다.

걸러지지 않고 무작정 올라오는 안건들

현행 노사협의회의 문제점은 안건을 선정하는 과정에서부터 출발한다. 대기업의 경우 부서를 거쳐 공장별 노사협의회, 중앙 노사협의회의 순으로 올라오면서 안건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난다. 안건이 제대로 걸러지지 않은 채 올라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H노동조합 관계자는 “각 계파 등에서 안건을 올릴 경우 일부만 수용하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노동조합의 조정력 등 리더십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음에 따라 정제되지 않은 내용들이 노사협의회 안건으로 상정되는 것이다.

회사쪽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부서장과 중간 관리자들의 경우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책임지기 싫어서’ 떠넘기는 경우가 많다. 한 대공장 현장감독자 L씨는 “우리 부서에서도 충분히 처리가 가능한 안건을 위로 올리는 경우가 있다”며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경우 문책 당할까봐 그냥 올려버리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적당히 합의하고, 이행은 나몰라라

이렇게 걸러지지 않은 채로 올라온 안건을 논의하는 과정도 순탄하지만은 않다. ‘협의’ 기구에서 ‘협상’을 진행하기 때문에 갈등의 불씨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또 일부 안건들의 경우 계파 조직에서 집행부를 ‘물 먹이기 위해’ 끼워놓은 일까지 있다. 이러다보니 노사 모두 해법을 찾지 못하고 시간만 길어지고, 결국은 감정대립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런 와중에 별다른 충돌 없이 ‘무난하게’ 노사협의회를 끝내려는 경영진과 ‘가시적 성과’를 가져와야 하는 노동조합 사이에 일종의 ‘노사 담합구조’가 형성된다. 대충 끝내는 식으로 가는 것이다. 의사소통에 대한 아무런 고민도 없이 ‘합의를 위한 합의’만이 남는다.

이런 미봉책은 합의된 내용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많은 경우 노사협의회 안건 중에 ‘합의사항 미이행 건’이 다시 포함되는 악순환을 낳는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태에서 결과에 대해 현장을 설득하기도 힘들다.
결국 노사 간 이해일치 영역을 찾아서 공동 발전을 모색한다던 노사협의회의 취지는 사라지고 연중 협상만 남아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 지금 작업장의 현실이다.


노사협의회, 어떻게 변해왔나
63년 도입, 97년에 근참법 규정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노사협의회가 도입된 것은 1963년의 일이다. 이 때 노동조합법 제6조에 노사협의회 설치 규정을 마련했다. 당시 노사협의회가 도입된 것은 기업별 노조 체제가 산업별 노조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기업 단위의 대표기구를 두기 위한 것이었다. 즉 노동조합 대체기구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이후 1973년에는 협의사항을 생산, 교육, 훈련, 작업환경, 불만처리, 협의회의 운영 등으로 규정하는 법개정이 이루어졌고, 75년에는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은 노사협의회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다시 한번 개정한다.

1980년 노동조합 조직체계가 산별에서 다시 기업별로 바뀌게 된다. 이에 따라 별도의 노사협의회법이 만들어지고, 이에 근거해 유노조 사업장과 50인 이상 사업장은 의무적으로 노사협의회를 두도록 했다. 하지만 이 두 차례의 노동조합 조직체계 변경은 노동계의 이해와 요구, 혹은 노사간의 공감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정권 차원에서 노동계를 통제하기 편한 방식으로 바꾼 것일 뿐이었다.

87년에는 경영참여를 위한 협의사항 및 정보공유를 위한 사용자 보고사항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 ‘근로자 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에 따라 노사협의회는 근로자 경영참여의 제도적 통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