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환, 서울대 가다
이광환, 서울대 가다
  • 박석모 기자
  • 승인 2010.08.02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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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발투수 예고제와 투수보직제, 처음 도입한 프로 출신
‘야구기술자’만 키우지 말고 즐기는 야구를 하자
[사람돋보기] 이광환 서울대 야구부 감독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야구팬이라면, 특히 LG트윈스의 팬이라면 LG트윈스 감독 중 기억에 남는 인물은 누구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꼽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94년 LG트윈스의 우승을 이끌었던 이광환 감독이다. 말로 딱히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LG트윈스의 팀 컬러와 이광환 감독은 참 잘 어울린다. 물론 LG트윈스 팬들에게는 죄송하게도 최근 LG트윈스는 팀 컬러가 뭔지 모를 정도지만 말이다.

그 이광환 감독이 히어로즈 감독을 거쳐 최근 서울대 야구부 감독을 맡았다. 뜨악~. 다른 데도 아니고 왜 하필 서울대 야구부일까? 지금까지 단 1승밖에 못 올린 전설적인 팀, 10경기를 하면 8경기는 콜드게임 패를 하는 팀이 서울대 야구부다. 대한야구협회조차 서울대 야구부와의 경기에서 기록한 타율은 공식 기록에서 제외한다는 규정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 서울대 야구부를 이광환 감독이 맡았으니, 이제 서울대 야구부도 성적을 좀 올릴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 기대를 안고 서울대 야구장을 찾았다. 

성적 기대하지 말라는 감독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에게? 이게 뭐야?'
서울대 야구장을 보자마자 이런 말부터 튀어나온다. 널따란 외야에 관중석까지 갖춘 야구장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흙먼지 풀풀 날리는 ‘맨땅’에 빙 둘러쳐진 그물과 홈플레이트 뒤쪽의 철망만 아니었다면 여기를 야구장으로 ‘착각’하는 일은 없었을 터. 여기가 야구장이라니 말 다했다.

이광환 감독이 일하고 있다는 ‘베이스볼 아카데미’ 사무실을 찾았다. 5평 남짓한 사무실에 걸린 보드에는 빽빽하게 연수 일정이 적혀 있다. 사무실에서 기다리던 이 감독이 반갑게 기자 일행을 맞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물었다. “저기 밖에 보이는 게 야구장 맞나요?” 대답 대신 ‘허허’ 웃음이 돌아온다. 맞긴 맞나보다.

자리를 잡고 앉아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한다. 아무래도 제일 궁금했던 건 이광환 감독이 왜 하필 서울대 야구부 감독을 맡았느냐는 거다. 더구나 보수도 받지 않고. 그야말로 대학교수가 유치원생들을 가르치는 격이라고나 할까?

“KBO하고 대한야구협회, 서울대가 공동으로 야구지도자들을 교육시키는 학교를 만들고 있어요. ‘베이스볼 아카데미’ 사무실이 서울대에 마련돼 이쪽으로 출근하게 됐지. 그런데 오다 보니까 서울대 야구부가 있어요. 야구부는 있는데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는 거야. 그래 내가 여기로 출근하는 김에 봉사하는 셈 치고 도와주기로 한 거예요.”

대답이 어째 좀 싱겁다. 그래서 기자도 내친 김에 한 마디 더 묻는다.
“서울대 야구부도 이제 명감독님을 모셨으니, 성적을 좀 낼 수 있을까요?”

“성적? 여기서는 성적이 나올 수가 없어요. 다른 대학 야구팀이 중·고등학교 선수 출신들인데 비해 서울대 야구부는 순수한 아마추어 출신들로만 구성돼 있으니까. 서울대 야구부 선수들은 대학 와서 처음 야구를 접한 애들이에요. 기초도 안 잡힌 선수들로 무슨 성적?”

제대로 헛다리짚었다. 이 감독은 서울대 야구부가 중학교 야구팀과 경기해도 질 거라고 잘라 말한다. 감독다운 전력분석에 따르면 서울대 야구부의 실력은 중학교 야구부 중 중하위권 실력이라나?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자율야구? 오해에요!

흔히 이 감독의 이름 석 자 뒤에는 ‘자율야구’, ‘신바람야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우리나라 프로야구에서 최초로 자율야구를 꽃피운 감독이 이광환 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란다. 그건 오해란다. 어라? 이건 또 뭔 소리?

“사실 내가 도입한 것은 자율야구가 아니에요. 프로야구를 시스템화시켰다고 하면 맞을까? 내가 감독하던 시절에 코치들과 선수들은 불만이 가득했어요. 출근시간을 2시간, 3시간씩 당겨놨으니까. 신바람야구라. 뭐 이기면 신바람 나는 거지. 안 그래요?”

이 감독은 우리나라 프로야구에서 가장 먼저 ‘외국물’을 먹은 지도자에 속한다. 프로야구 출범과 동시에 OB베어스(현 두산베어스) 타격코치로 프로야구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이광환 감독은 프로야구 출범 5년차가 되던 86년 일본 세이부 라이온스를 거쳐 미국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코치연수를 떠난다. 이게 화근(?)이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안 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알고도 안 할 수는 없었죠.”

뭔 말이냐고? 일본과 미국에서 코치 연수를 하는 동안, 이 감독은 ‘운명적으로’ 프로야구 시스템을 접해버린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당시 한국의 프로야구는 아마추어야구에 불과했다.

“프로는 베스트 게임을 하는 게 중요해요. 베스트 게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훈련도 하고 몸도 관리하는 게 프롭니다. 그걸 보러 관중들이 야구장을 찾는 거죠. 그런데 베스트 게임을 보여주지 못하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없는 겁니다.”

외국 연수기간 동안 ‘진짜 프로야구’를 몸소 체험한 이 감독은 88년 귀국해 OB베어스의 지휘봉을 잡았다. 당시는 선발과 중간계투, 마무리의 개념이 없었다. 하물며 다음 경기 선발투수를 미리 예고하는 것은 상대팀에게 자신의 카드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 여기던 시절이었다.

‘선발 로테이션’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한국 프로야구에서 쓴 웃음을 짓게 하는 일이 있었으니 1984년 롯데자이언츠가 우승하던 당시, 롯데의 에이스 최동원 선수는 한국시리즈 7경기에 모두 등판해 혼자서 4승을 챙겼다. 한국시리즈에서만 40이닝을 던진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당시 롯데 감독이던 강병철 감독이 마지막 경기 시작 전 남겼다는 말은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만하다. “동원아, 우야노 여기까지 왔는데.” 최동원의 대답도 걸작이다. “알았심더. 한 번 해보입시더.”

프로야구 출범 초기의 빈약한 선수층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외국의 선진야구를 경험한 이 감독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시스템을 도입했다. 선수단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발투수예고제’와 ‘투수보직제’를 강행한 것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이 감독의 첫 번째 개혁은 그러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한 시즌 반 동안 69승 93패 4무라는 다소 저조한 성적을 남기고 OB베어스에서 해임된 이 감독은 91년 LG트윈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LG트윈스에서도 이 감독의 파격은 계속됐다. 이 감독이 LG트윈스 감독으로서 내린 첫 번째 지시는 “선수는 3시간 전, 코치는 4시간 전에 야구장에 나오라”는 것이었다. 이 감독 자신은 그보다 더 일찍 출근했다. 당시 선수들이나 코칭스태프들로서는 고역이었으리라.

“프로선수는 적어도 4시간 전에 나와서 준비해야 해요. 2시간 전에 나오는 것은 아마추어죠. 코치는 선수보다 먼저 나와서 선수들이 베스트 컨디션이 될 수 있게 도우미가 돼야 하고요. 4시간 동안 비디오를 보면서 상대도 분석하고 웨이트트레이닝도 하고. 선수들이 야구장에 도착하면 그날 스타팅 라인업이 게시돼 있어요. 그걸 보고 스타팅인지 후보인지에 따라 자기가 훈련할 내용을 자유롭게 결정한 거죠.”

아하~! 이광환 감독의 자율야구는 이런 거구나. 사실 그동안 이광환 식 자율야구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은 자율야구가 선수들의 독기를 빼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다. 자율야구란 책임지는 야구다.

그동안 이 감독이 걸어왔던 순탄치 않은 길에서도 그런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이 감독은 94년 LG트윈스를 우승으로 이끈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리고 번번이 소속 구단으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아들었다. 96년 LG트윈스에서, 2003년 한화이글스에서, 2008년 히어로즈에서. 그때마다 이광환 감독은 군말 없이 짐을 꾸렸다. 프로야구 감독은 성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야구판 전체를 보다

프로야구판을 떠나 있는 동안 이 감독이 그냥 세월을 흘려보낸 건 아니었다. 아니 그 이전부터 이 감독은 ‘야구’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LG트윈스 감독으로 활약하던 95년, 제주도 서귀포에 야구박물관을 지었다. 우리나라에 유일한 야구박물관은 그렇게 탄생했다.

“미국에 가보니까 소규모 박물관들이 참 많아요. 마을마다 명예의 전당이 있는 거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박물관이니 명예의 전당이니 하면 큰 것만 생각하는데, 꼭 크고 화려하지 않아도 사진 몇 장, 소품 몇 개 전시해 놓고, 마을을 위해 헌신하고 빛낸 사람들을 기리는 거죠.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른 나란데 스포츠 박물관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잖아요.”

이 감독이 외국 연수 후 전문가에게 이런 아이디어를 이야기했더니 우리나라에도 소규모 박물관이 수천 개는 있어야 한다고 대답하더란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이 감독은 야구박물관을 짓기로 하고 정부나 KBO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러자 이 감독은 자신의 사재를 털었다. 이걸 오기라고 해야 하나, 뚝심이라고 해야 하나.
박물관뿐 아니라 야구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기세다.

“지금은 프로야구가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저변이 취약하다면 그 인기는 언제 바람처럼 사라져버릴지 모릅니다. 야구가 국민스포츠로 자리 잡으려면 누구나 즐길 수 있을 만큼 저변이 확대돼야 해요.”

자신을 버린, 아니 자신이 책임지고 떠나온 야구판이지만, 이 감독에게는 야구밖에 없었나보다. 이 감독은 여전히 야구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어느 한 팀에 소속되지 않아서인지 그는 더 큰 판, 한국야구 전체를 보고 있었다.

이 감독은 야구의 저변이 확대되려면 어릴 때부터 누구나 야구와 친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눈길을 돌린 것이 티볼(Tee Ball, 야구를 변형시킨 스포츠로, 투수가 공을 던져주는 대신 막대처럼 세워진 Tee 위에 공을 얹어놓고 타격하는 구기종목. 이 감독은 티볼을 ‘야구의 씨앗’이라고 표현했다)과 유소년야구, 여자야구다. 이 감독은 지금도 여자야구연맹 부회장, 티볼협회 고문을 맡고 있다.

어쩌면 이 감독은 프로야구 감독을 할 때보다 감독을 그만둔 뒤 더 바빴는지도 모른다. KBO 육성위원장을 맡은 이 감독이 유소년 야구팀 육성을 위해 동분서주한 결과 지금은 리틀야구팀, 초등학교야구팀이 부쩍 늘었다. 20개밖에 안 되던 리틀야구팀이 지금은 전국적으로 200여 개가 넘는단다. 이에 비해 중·고등학교 야구팀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중학교 야구팀 60여 개에 고등학교 야구팀은 53개에 불과하다. 중·고등학교 야구팀 이야기가 나오자 이 감독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소수만 키우다보니 팀이 자꾸 줄어든다는 게 이 감독의 생각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중·고등학교 야구선수들은 죽어라고 운동만 합니다. 오로지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것만이 목표에요. 공부는 아예 안 합니다. 자기 학교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선수들도 허다합니다. 하지만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건 100에 서넛도 안 돼요. 나머지는 뭐가 됩니까? 서너 명 때문에 나머지가 다 희생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야구를 할 수 있는 학교가 줄어드는 것도 문제지만, 현재 중·고등학교 야구팀은 ‘야구기계’를 찍어내고 있다며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낸다. 학생다운 인성을 기르는 데는 관심 없고 오로지 이기고 지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거다. 이는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을 만드는 이들의 철학이 없을 뿐더러, 그들부터 이기고 지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란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내년부터 고교야구 시합은 주말에만 열리게 된다. 이렇게 하면 학생들이 운동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게 되려나?

야구장 기증할 기업 어디 없나요?

“미국이나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단순히 ‘야구 기술자’를 만드는 게 아닙니다. 야구를 통해 조직을 위해 희생하고, 인내하며, 협동하는 인성을 보급하는 겁니다. 야구에는 다른 스포츠에는 없는 희생번트, 희생플라이, 희생타 같은 개념이 있잖아요.”

학생야구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어느새 야구예찬으로 번진다. 이 감독 말마따나 아무나 야구선수 되나? 선수가 되는 건 재능을 타고난 소수뿐이다. 그렇다고 야구가 그 소수만의 전유물도 아니고, 소수를 위해서 대다수가 희생해야 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이기고 지는 걸 가르치는 게 아니라 야구를 즐기면서 자연스레 조직생활과 규칙을 익히게 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다가 재능이 보이면 선수가 될 수 있도록 키워주면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이게 거꾸로다. 즐기는 야구? 안중에도 없다. 잘하는 선수 뽑아내는 게 우선이다.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그래서일까? 이 감독은 서울대 야구부 감독을 맡은 후, 선수들에게 성적을 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1주일에 두 번씩 하는 훈련도 꼭 나와야 하는 건 아니다. 기자가 갔던 날도 훈련시간에 맞춰 나온 선수는 5명뿐이었다. 이 감독은 이들을 데리고 주자 견제와 유격수 수비의 요령을 지도하고 있었다. 5명뿐이지만 훈련하는 선수들은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서울대 야구부가 선수를 키우는 데는 아닙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스포츠 정책을 만들고 스포츠 행정을 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면 됩니다.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이 야구를 즐길 수 있으면 그만이죠. 얼마 전에 서울대 야구부에서 같이 훈련하던 학생 하나가 행정고시 합격했다고 인사하러 왔어요. 그런 게 보람이죠.”

그런 이 감독에게 요즘 가장 큰 고민은 운동장이다. 처음 들어서면서 봤던 대로 운동장은 초심자인 기자가 보기에도 야구를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아 보였다. 여기저기 움푹 패여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르고, 곳곳에는 돌멩이가 굴러다녔다. 50여 개 동아리가 함께 쓰는 야구장인데 관리는 전혀 안 되고 있다. 야구를 즐기기는커녕 부상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해야 할 판이다.

사정이 이러니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이 감독은 종종 창 너머 야구장으로 눈길을 돌리는가 싶더니, 인터뷰 끝나자마자 야구장을 향한다. 아직 훈련 시작까지는 1시간 넘게 남았는데 무슨 일일까? 쫓아가보니 수도에 호스를 연결해 야구장에 손수 물을 뿌리는 게 아닌가? 물을 뿌려둬야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부상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단다. 먼지도 안 날리고.

“여기에 인조 잔디 깔고 보호막 치고 배수시설 하는 데 어림잡아 10억 정도면 되지 않겠나 싶어요. 서울대가 여기에 쓸 돈은 없는 것 같고. 둘러보니까 대기업들이 후원을 많이 했더라고요. ○○경영관, ▲▲생활체육관, □□어학연구소. 10억만 후원하면 학생들한테 호응을 얻을 수 있다고 기업들 설득하고 있어요. 필요하면 네이밍(기업이 시설물을 지어 기부하고, 시설물에 기업명을 붙이는 것)도 가능하다고 봐요.”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이 감독과 함께한 3시간 동안, 처음 기대했던 대답(서울대 야구부 몇 년 안에 몇 승 올리겠다)은 끝내 들을 수 없었다. 아니 그런 대답을 기대한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기자의 아쉬움을 헤아렸는지, 이 감독이 등 뒤로 한 마디 툭 던진다.

“요즘 선수들 보면 6회까지만 가보자 그래요. 5회 콜드게임 패는 원 없이 당해봤잖아.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