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이 목표가 아니라 ‘승리’가 목표다
‘투쟁’이 목표가 아니라 ‘승리’가 목표다
  • 하승립 기자
  • 승인 2010.08.02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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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기술에 앞서 이기는 방법 찾는 노력 필요
기업 경쟁력과 조합원 경쟁력 공론의 장에 올려야
[Special Report]위기에 대처하는 노동조합의 자세…① 위기의 진짜 원인은 어디에
ⓒ 참여와혁신 포토DB
우리는 종종 노사간의 극단적 대립으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는 사례들을 마주치곤 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대부분 M&A, 분사, 매각 등으로 인한 인적 구조조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당수는 ‘합리적 해결책’이 있었음에도 어느 한쪽이, 혹은 서로가 외면했음을 알 수 있다. 서로가 배수진을 친 것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대결에 나섰지만, 그 시점까지 강은 멀리 있다. 밀려가다가 진짜로 더 이상 물러 설 곳 없는 강을 만나면 백기투항하거나 대책 없이 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참여와혁신>이 이 ‘불편한 진실’을 파헤쳤다. 이 기사를 읽는 독자들 중 노동계 쪽이 훨씬 더 많이 불편할 것이다. 사용자들의 문제가 더 큰데 노동조합만 때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미리 양해를 구한다. 이번 기사가 <위기에 대처하는 노동조합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20세기 초반의 마인드에 갇혀 있는 사용자들의 문제점을 상세히 다루는 것은 다음 기회를 기약한다.

자, 그렇다면 위기를 더 큰 위기로 만드는 진짜 원인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비전 제시 못하는 경영진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른 ‘소통’은 기업 단위 노사관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위기를 맞는 대부분의 기업은 소통과 신뢰의 부재라는 공통된 문제를 안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일방통행 방식을 고수하는 경영진의 문제가 크다.

지난해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쌍용자동차 문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하이차로의 매각 과정에서 노동계는 여러 차례 우려를 전달했다. 기술력만 빼가는 ‘먹튀’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었다. 실제로 결과 또한 그러했다.

하지만 정부도 재계도 이런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회사 발전을 위한 장기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경영진에 대한 비판에도 귀를 막았다. 쌍용자동차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단기적인 성과에 매달려 비전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경영진의 책임이 크다.

물론 노동조합의 무책임도 한몫을 했다. 기업 매각 문제로 시끄러운 한 노동조합의 위원장은 “쌍용차가 상하이차와 협상할 때 고용 100% 보장, 위로금 같은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고, 노동조합은 별 저항이 없었다”면서 “하지만 실제로 4년이 지나고 절반이 직장을 잃었고, 격렬한 저항으로 사회적 에너지를 쏟아부은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대우건설을 인수했다가 결국 탈을 일으킨 금호아시아나도 같은 경우다. 노동조합이 목이 쉬도록 지속가능한 성장을 보장할 수 있는 기업가치의 제고를 외쳤지만, 정작 경영진은 풋백옵션에서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한 주주가치의 실현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결국 파국으로 치달았다.

대우건설노조 김욱동 위원장은 “금호아시아나 입장에서는 3년 내에 주가를 올려놓지 않으면 토해내야 하니까 주가 올리기에만 급급했다. 이런 지경이니 당연히 기업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했다.

협상 의지 없는 회사

백화점 업계의 내로라하는 기업인 L사는 G백화점을 인수했다. 그런데 인수 과정에서 G사 구성원들의 고용을 그대로 승계하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 자회사를 만들어 그쪽 소속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필요한 인력만 모회사 L사 소속으로 전환시켰다.

다국적 제지업체 B사는 H사를 인수한 후 임금체계, 성과급 등 기존의 H사 노사간의 합의 사항을 모두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회사측이 작성한 조합원 성향 분석 문건이 유출되기도 했다. 노조 사무실 폐쇄, 단협해지 등도 뒤따랐다.

노무법인 참터 김철희 노무사는 “M&A 과정에서 노동조합을 제거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서릿발 같은 날선 대척점을 만들게 된다”고 지적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인수합병을 하면 적어도 고용은 보장하는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노동조합 죽이기 장기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주로 중소 노동조합이나 힘 없는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들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고 경영진들도 만만해 보이는 노동조합을 상대로 이런 식의 ‘노조 죽이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거꾸로 보면 이는 결국 경영진들이 노동조합의 강경함을 부추기는 것이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M&A, 분사에 대한 공포

M&A, 분사 얘기가 나오면 대부분의 노동조합들은 한결같이 ‘결사 반대’의 목소리가 반사적으로 나온다. 이런 반응의 상당 부분은 경영진들이 만든 것이다. 그간 M&A나 분사는 인적 구조조정을 동반하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왔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산업은행노조 김명수 위원장은 “사용자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서 (M&A나 분사를) 한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노동자는 그것 때문에 ‘생존권’을 위협받는다”고 비판했다. 대우건설노조 김욱동 위원장도 “기업경쟁력을 높여야 하지만 사람을 내몰면서 경쟁력을 높이는 방식은 반대한다”면서 “사람을 존중하면서 기업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독일계 기업 T사노조 지회장의 목소리는 새겨들을 부분이다. 이 지회장은 “사측에서 구조조정과 관련한 협의를 하자고 해서 깜짝 놀랐다”고 말한다. 경영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은데 구조조정 협의를 하자는 얘기를 듣고는 노조 탄압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사측의 설명을 들어보니 현재의 산업 전망으로 볼 때 3년 후 쯤 유휴 인력이 생길 가능성이 있는데 그 문제에 대한 대책을 어떻게 세울지 협의하자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대안 없는 노동조합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심한 진통 속에 큰 희생을 치른 한국 사회에서는 ‘투쟁하지 않는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때로는 이것이 ‘투쟁 없는 승리’를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결과가 뻔히 보이는 경우에도 강경한 원칙만을 고수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정한 연구위원은 “처음에 사측이 1000명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제시하면 노조의 반응은 ‘절대 반대’다. 그 다음에는 700명으로 줄었다가 결국에 가서는 300명으로 합의가 된다. 그런데 이 300명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기업 회생의 뾰족한 답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도 노조가 ‘결사항전’을 선언하고 활동가들의 해고, 구속과 같은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싸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데, 그 결과로 얻는 것이 없다는 비판이다. 결국 남는 것은 ‘상처뿐인 영광’이다.

부추기기만 하는 상급단체

인적·물적으로 기업에 비해 열세인 노동조합의 현실을 볼 때 상급단체의 지원은 버틸 수 있는 힘이자 승리의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때로는 상급단체가 문제해결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구조조정을 둘러싼 노사간 정면충돌을 경험한 한 노조 임원은 “우리의 경우 노조 설립 과정에서부터 상급단체의 지원을 받았고 투쟁 과정에서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전제하고 “문제는 투쟁이 길어지면서 계속 강공 드라이브를 걸었던 상급단체 쪽에서 나중에 가서는 발을 빼고 집행부에서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더라”고 비판했다.

현재 매각을 둘러싼 현안이 있는 한 기업노조 위원장은 “상급단체가 투쟁을 부추기기만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그것이 (상급단체의) 역량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은 그 속에서 판을 짜는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상급단체의 행보를 비판하는 쪽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투쟁 전술에 비해 협상 전술이 모자란다는 점이다. 그간 우리 노동조합 운동이 정부나 자본과 투쟁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보니 시작할 때와 나아갈 때에 대한 조언과 지원은 가능한데 멈출 때와 물러설 때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상급단체로서의 역할, 즉 정책대안을 제시하거나 노정간의 협상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앞선 문제와 마찬가지로 조직과 투쟁에는 익숙하지만 정책역량은 부족한 현실을 반영한다는 지적이다.

노동조합의 선명성 경쟁과 내분

긴 투쟁의 후유증 중 당장 나타나는 현실적인 문제는 노동조합의 무력화 혹은 와해이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이런 문제의 원인이 외부 요인인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내부적 요인이 더 크다.

노조 지도부에 대한 구속, 수배를 통해 노조를 무력화시키거나 와해시키는 시대는 아니지만 조합원의 불만과 불신, 혹은 노노 간의 갈등으로 노조 활동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경우들이 많다.

긴 투쟁 끝에 별다른 성과가 없이 끝나게 될 경우 조합원들은 심한 피로감과 함께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한 회의감이 들게 된다. 이럴 경우 쌍용자동차처럼 기존의 노조 대신 친사 성향의 새로운 노조가 들어서거나 혹은 노조 탈퇴 러시가 일어나기도 한다.

또 투쟁을 열정적으로 했으면 한 대로, 부족했다 싶으면 또 그에 따라 비판하는 그룹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는 집행부 불신임으로 이어진다. 심할 경우 법적 분쟁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선명성 경쟁이 진정성을 담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이 많다. 김철희 노무사는 “지금 우리나라의 대기업노조는 ‘월급동맹’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조합원에게 더 많은 이익을’에만 매달려 있으면서 대외적으로는 선명성을 가지고 싸우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경쟁력에 관심 없는 노동자

지금은 퇴임한 한 완성차 노조 임원이 들려준 얘기는 충격적이다. “위기에 놓인 기업 노조 임원과 술자리에서 얘기를 나누다 들었는데, 그 회사를 대표하는 차량의 생산량이 주문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해 공급이 딸린다고 하더라”는 것. 그런데 그 이유가 혼류생산을 해야 하는데 신차종을 만들기 위해서는 손이 더 가니까 현장에서 기피하기 때문이었다는 설명이다. 기업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절박함이 없더라고 비판했다.

지금도 상당수의 노조 활동가들은 기업의 경쟁력을 노조에서 거론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또 조합원들은 생산성을 노동강도 강화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기업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강력한 투쟁이라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정한 연구위원은 “우리나라에서 절대갑(甲)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삼성, 현대차 정도의 극소수에 불과하다”면서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업의 경쟁력뿐만 아니라 조합원의 경쟁력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안으로 다능공화를 제시했다. 현실을 인정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 이와 함께 전직지원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것도 신경 쓸 때라고 조언했다. 조합원의 정서 때문이라는 핑계로 미루기에는 지금도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취재 과정에서 만난 많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기업이 생존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야 고용보장도 가능하다는 점에 동의했다. 또 투쟁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이를 공식적으로 얘기하지는 못했다.

앞서 소개한 ‘손자병법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 한국의 노동운동’이라는 발언을 한 활동가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오랜 경륜을 가진 활동가다. 하지만 그는 한사코 자신의 이름으로 그 발언이 소개되는 것을 거부했다. “이런 얘기가 내 이름으로 나가면 변했다느니 하는 공격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익명으로 처리된 많은 발언들 또한 같은 케이스다.

하지만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명제가 전제되어야 고용안정과 삶의 질 향상이 가능하다면 이제는 이 문제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현장에서 온 열정을 다해 투쟁했지만 결국은 더 큰 아픔만 남기게 된 이름 없는 노동자들을 생각한다면 이제는 성과를 만들어내는 효과적인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사용자들의 잘못된 마인드와 관행이 기업의 미래를 망치고 있다면 이를 효율적으로 제어해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투쟁으로 돌파하자’는 구호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정책대안을 제시할 것인지, 그것을 가지고 여론의 동의를 만들어내고 종국에는 승리를 이끌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찾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