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칠’ 안 한 ‘민낯’ 내보인 SK에너지노조
‘분칠’ 안 한 ‘민낯’ 내보인 SK에너지노조
  • 하승립 기자
  • 승인 2010.08.0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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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책임질 수 없는 투쟁은 정답 아니다”
지속가능 성장과 고용안정 두 마리 토끼 다 잡을 수 있을까
[Special Report] ② 해법을 찾아서- SK에너지노조의 한발 앞선 행보

ⓒ SK에너지노동조합
SK에너지가 내년 1월 1일부터 석유사업과 화학사업을 분할한다. 9월로 예정된 임시주주총회에서의 승인 절차를 거치면 석유와 화학 부문이 분사되는 것이다. SK에너지는 2007년 지주회사 분할, 2009년 윤활유 사업 부문 분사(SK루브리컨츠)에 이어 이번에 세 번째 분할에 성공하게 된다.

석유와 화학 부문 분사에 대해서는 노사가 이미 합의를 이뤄냈기 때문에 다른 걸림돌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문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홍미로운 양상이 보인다.

5월 14일, 분사 계획 언론 보도 - 5월 17일, 노동조합의 본사 항의 방문 - 5월 19일, 노동조합 상집에서 투쟁지침 결정 - 5월 22일, 노동조합 투쟁지침 1호 발령 - 5월 24일, 사측 분사 공시 - 5월 25일, 노사간 분사 관련 합의 - 6월 8일, 위원장 사퇴.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 M&A나 분사를 둘러싼 노사간 줄다리기의 일반적 수순들과 비교할 때 빨라도 너무 빠르다. 거의 전광석화라 할만하다. 여기서 우리가 추정해볼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첫 째는 회사 경영 상황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어 노동조합이 백기투항하는 경우고, 다음으로는 노동조합이 친기업적 성향을 지니고 있어 회사의 방침에 적극 동조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다.

하지만 위기라고 하기에는 SK에너지가 너무 잘 나가고 있고, 또 SK에너지노동조합은 한국노총 단위노조 중 강성으로 유명하다. 더구나 지난해 윤활유 부문 분사를 놓고 노동조합은 40일 가까운 투쟁을 했다. 그렇다면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인다. 조합원의 신분상 변화가 생기는 분사 문제를 쉽게 합의하는 노동조합은 없기 때문이다.

승산 있는 싸움인가?

울산의 석유화학공단에 위치한 SK에너지를 찾았을 때, 노동조합은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올해 임단협을 마무리 짓고 조합원 찬반투표를 앞두고 있어 집행부들은 분주했다. SK에너지노동조합은 이정묵 위원장이 사퇴한 이후 윤상걸 부위원장이 위원장직을 승계했다.

윤상걸 위원장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의 첫 번째 고민은 ‘과연 승산이 있는 싸움이냐’는 것이었다.

“우리가 작년에 윤활유 공장 분사 때 37일간 투쟁을 했어요. 그 때 한계를 본 거죠. 법률적 문제도 확인했습니다. 무턱대고 투쟁하자고 했을 때 결국은 조합원이, 구성원들이 어렵게 가게 된다는 거죠.”

노동조합 입장에서는 법률적으로도 전혀 승산이 없는 싸움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조합원의 고용에 대한 확실한 보장과 같은 실질적인 성과를 얻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SK에너지 박길환 상무는 “사실 이번 분사는 물적 분할로 노사의 합의 대상이 아니라 주총의 승인 사항”이라며 “각사가 빠른 의사결정, 재무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노동조합이 이기기 힘들다고 판단한 다른 이유는 조합원들의 움직임이었다. 분사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노사는 각각 위임장과 동의서를 조합원들에게 요청했다. 분사 저지와 관련된 위임장을 노동조합에 제출해 달라는 쪽과 분사에 동의한다는 동의서를 회사에 내달라는 쪽이 맞섰다. 결과적으로 회사의 승리였다. 하루만에 절반이 동의서를 제출했고, 이틀째가 되자 단 4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동의서에 서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투쟁을 밀어붙이기에는 동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

노동조합의 고민의 핵심은 조합원들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에 있었다. 윤상걸 위원장은 투쟁의 과정과 결과를 시뮬레이션 했다. “만약에 싸우겠다고 했으면 처음에는 절반 이상의 조합원들을 끌고 갈 수 있을 겁니다. 싸움이 길어지더라도 200~300명은 끝까지 남겠지요. 그러면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200~300명이 남았을 때 이들을 어쩔 거냐는 거죠. 노동조합으로서는 싸우자고는 해놓고 책임을 못 지게 되는 겁니다.”

윤 위원장은 결과가 뻔히 보이는 싸움이었다고 덧붙였다. “만약 다른 답이 있다면 끝까지 싸웠을 겁니다. 그런데 대법원 판례를 보더라도 물적 분할에서 이긴 경우가 없어요.”

박길환 상무는 구조조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했다. “구조조정은 일반적으로 사업 구조조정, 인적 구조조정, 재무 관점의 구조조정으로 나뉩니다. 우리는 재무 관점의 구조조정을 한 것이고 이런 내용을 꾸준히 설명했습니다.”

만약 투쟁으로 갔으면 어땠을까. 박 상무는 상처만 남았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경쟁력을 확보 못하면 결국 구성원들에게 돌아옵니다. 파업과 같은 갈등으로 가면 결국 갈등만 남아요. 갈등은 쉽습니다. ‘나가서 싸우자’도 쉽습니다. 하지만 나가면 다시 못 돌아오게 됩니다. U턴이 불가능합니다. 결국 남는 것은 상처뿐입니다.”

노조 이성훈 사무국장은 “정말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구조조정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회사는 확실한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추진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결국 우리의 고민은 소수의 반대급부를 투쟁의 동력으로 삼을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희생양을 만들 것이냐였다”고 토로했다.

투쟁을 요구하는 조합원들도 분명 존재하고 그들이 투쟁동력이 될 수는 있지만, 이기기 힘든 싸움을 할 경우 일부 조합원들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럴 수는 없었다는 설명이다.

일단 싸워봐야 했던 것 아닌가?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노동조합이 왜 투쟁의 ‘액션’조차 취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상당수 노동조합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될 경우에도 투쟁에 돌입하는 ‘전술적 선택’을 한다. 비록 ‘페인트 모션’이라고 할지라도 손 놓고 있은 것이 아니라 할만큼 했다는 ‘투쟁의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이다. 더구나 SK에너지노동조합은 선거가 코앞이다.

“그런 생각을 왜 안 했겠어요.” 이성훈 사무국장은 “당시에 노총에 의뢰해서 (투쟁을 위한) 무대 준비도 다 했다”고 밝혔다. 이 문제는 노조 집행부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어찌되었건 투쟁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성훈 사무국장은 “주변에서 ‘왜 싸우려고 시도도 안 했느냐’ ‘왜 빨리 합의 했냐’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면 ‘화 내고 싶으면 집행부에 화 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고민을 했습니다. 지탄의 대상이 되더라도 문제를 푼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윤상걸 위원장은 좀더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색칠, 분칠’ 하고 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내가 욕을 먹더라도 분칠하는 건 싫었습니다. 그렇게 갔으면 오히려 잃는 것이 더 많았을 겁니다.”

이성훈 사무국장이 말을 받았다. “이런 결정이 더 힘들었습니다. 투쟁을 하면 빠져나갈 길이 있습니다. 오히려 (투쟁하는) 그 길이 더 쉬운 길입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이성훈 국장이 한참만에 속내를 털어놨다. “솔직히 선거에 대한 유혹이 컸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비록 선거에서 선택을 못 받더라도 이 토대가 의미가 있을 겁니다. 다음에 어떤 집행부가 들어서더라도 SK에너지만의 노동조합 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과정입니다.”

조합원에 대한 책임도, 선택에 대한 책임도 진다

SK에너지 노사는 5월 25일 분사와 관련한 합의서에 서명한다. 조합원들의 급여체계, 복리후생, 단체협약 등의 제반 근로조건을 그대로 승계한다는 내용과 고용안정을 위해 노력하고 노조와 협의 없이 구조조정을 실시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올 임단협에서 별도협의서가 아닌 단협 본문에 고용확약서 내용을 담았다.

물론 후폭풍이 만만찮았다. 현장조직들의 비판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정묵 위원장이 사퇴했다. 이 위원장은 “이번 분할 대응이 조합원을 위한 결정이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또 다른 반대 정서를 만들어낸 책임은 저에게 있다”며 “저의 희생으로 이번 분할과 관련해서 상처받은 조합원들에게 용서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사과하고 사퇴했다.

과정과 결과가 어찌되었건 집행부가 분사에 합의하면서 내부 혼란이 생긴 점에 대해서는 책임지겠다는 것이었다.

깊은 고민 끝에 노동조합이 분사에 합의하기는 했지만 회사측에 서운한 마음도 있다. 회사로부터 분사 계획을 미리 통보받은 것이 아니라 언론을 통해 알게 됐다는 점이다. 윤상걸 위원장은 “그것 때문에 많이 싸웠다”면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박길환 상무는 “노동조합을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타이밍의 문제”라며 “분사라기보다는 독립회사 승격인 셈인데 승격 자체가 외부의 환경요인에 의해 무산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공개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해명했다.

SK에너지 노사는 인화성과 폭발력이 강한 분사라는 문제를 충돌 없이 해결했다. 한편에서는 노동조합의 책임을 방기했다고 비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고용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 평가한다.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시간이 좀더 흘러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분사에 대응하는 노동조합의 판단과 선택에 있어 새로운 토론의 주제는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진짜로 이기는 법을 찾아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