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진단] 법 바꾼다고 노사관계가 선진화 되나?
[긴급진단] 법 바꾼다고 노사관계가 선진화 되나?
  • 하승립 기자
  • 승인 2005.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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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70%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 내용 모른다’…무관심
“중요한 것은 법의 선진화가 아니라 노사관계 자체의 선진화”

올해 노정관계는 그야말로 팽팽한 긴장감의 연속이다. 참여정부 출범 초기 친노(親勞) 논란이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라 할만하다. 사실 정부 출범 초기만 하더라도 노정관계가 이만큼이나 싸늘해질 것이라고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특히 비정규직 법안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과 한국노총 김태환 충주지부장 사망사건으로 불거진 폭발 일보 직전의 갈등은 한여름 동안에도 노정관계에 싸늘한 냉기류가 흐르게 했다. 노동계는 김대환 노동부장관의 퇴진을 줄기차게 요구했고, 정부는 정부대로 제 갈 길을 갔다.

대치상황이 길어지자 이해찬 국무총리가 적극적인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 지난 9월 27일, 노동부장관과 양 노총 위원장의 회동을 주선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도 별다른 경색국면 타개책은 마련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방안(이른바 노사관계 로드맵)을 11월 중 일괄 입법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노정관계에 또하나의 폭발성 높은 난관이 놓인 셈이다.

“로드맵이 대체 뭐래요?”

그렇다면 정부가 입법을 서두르는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에 대해 당사자들이랄 수 있는 현장 노동자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참여와혁신>에서는 로드맵에 대한 노동자들의 의식을 알아보기 위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이번 조사는 일반 노동자들의 로드맵에 대한 인식 수준을 알아보기 위한 것으로 대우조선해양(조선업, 전체 종업원 약 2만명, 조합원 약 7천명), INI스틸(철강업, 전체 종업원 약 5천명, 조합원 약 3400명) 등 대규모 사업장 두 곳과 (주)카프로(비료 제조업, 전체 종업원 약 420명, 조합원 약 310명), 한국 상-고방 베트로텍스(유리섬유 제조업, 전체 종업원 약 300명, 조합원 약 230명) 등 중소규모 사업장 두 곳을 대상으로 했다. 구내 식당, 조합원 교육장 등에서 무작위로 실시된 이번 조사에는 모두 486명이 응답했다.

결론적으로 일반 노동자들은 로드맵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관심이 없었다. 정부에서는 노사관계를 선진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라며 적극 추진하려는데 정작 노동자들은 무슨 내용인지 알지도 못할뿐더러 신경도 안 쓴다는 얘기다.
로드맵에 대해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안다는 응답은 29.7%(잘 알고 있다 9.1%, 어느 정도 알고 있다 20.6%)에 그친 반면 잘 모른다는 응답은 69.9%(들어보긴 했는데 잘 모른다 47.3%, 전혀 모른다 55%)에 달했다.

정부가 로드맵을 11월 중에 입법화하겠다고 밝힌 데 대해서는 부정적이거나 잘 모르겠다고 응답했다. 시기상으로 부적절하다는 대답이 47.7%,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36.6%였다. 반면 시급히 서둘러야 할 사안이므로 적절한 시점이라는 대답은 4.5%에 그쳤고, 관심없다는 대답도 9.5%였다. 시기상 부적절하다는 응답자들은 그 이유로 노사관계의 악화를 불러올 뿐이므로 로드맵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41.4%),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계속 논의한 후 처리방향을 결정해야 한다(25.9%), 노사정 당사자 간의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처리해야 한다(25%) 등으로 답했다.

현행 제도 선호 경향 두드러져

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장에서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데 정부에서만 ‘용쓰는’ 꼴이다. 적어도 정부의 주장대로 로드맵 내용이 노사관계를 선진화하는 내용이었다 하더라도 당사자들을 설득하는 것은커녕 내용을 홍보하는 노력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한 노조 간부는 “솔직히 조합원들은 로드맵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거의 모른다. 노동조합 활동가들도 전임자 임금 지급 문제, 복수 노조 등 당장 영향을 미치는 것 외에는 모르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몇몇 쟁점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을 묻는 질문에서도 로드맵의 실효성을 의심할만한 결과가 나왔다. 대부분 현행 제도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으로 조사된 것.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문제에 대해서는 현행처럼 전임자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대답이 무려 90.9%에 달했고, 원칙적으로 임금 지급을 금지하되 노조 규모에 따라 달리 적용해야 한다는 대답이 8.2%였고, 2007년 발효될 법률안의 내용처럼 임금지급을 금지해야 한다는 응답은 0.4%에 머물렀다.

물론 전임자 임금 지급 문제가 조합비 인상과 연계될 수 있기 때문에 나타난 반응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변화의 필요성 자체를 크게 느끼지 못하는 셈이다.

전임자 3명의 중소 규모인 카프로노동조합 황대봉 위원장은 “전임자 임금 지급이 금지되면 노조 활동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예전에 비해 노조에서 해야 할 업무의 양은 늘어났는데 재정자립이 불가능하면 전임 자체가 힘들어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황 위원장은 “현재 조합비가 기본급의 1%인데, 전임자 임금을 조합비에서 충당하기 위해서는 통상급의 3%까지 올라가게 될 것”이라며 “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밝혔다.

복수노조 허용 방안에 대해서도 현행처럼 단일노조로 가야 한다는 응답이 69.1%에 달했고 복수노조를 허용하되 조합원수가 가장 많은 노조로 교섭창구를 단일화해야 한다(14.8%), 복수노조를 허용하되 조합원수 비율에 따라 교섭대표를 분배해야 한다(13.2%)는 응답은 소수에 그쳤다.

단체협약 유효기간에 대해서는 현행유지가 절반을 넘기는 했지만 다양한 의견이 개진됐다. 현행처럼 2년으로 한다는 대답이 52.7%, 매년 갱신으로 한다가 19.3%, 3년 이상으로 한다가 13.6%, 노사 자율에 맡긴다가 11.9%의 순이었다.

또 직장폐쇄 요건에 대해서는 경영상의 어려움이 아닌 쟁의행위에 맞선 직장폐쇄는 금지(80.2%)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합법 파업에 대한 직장폐쇄는 금지하고 불법 파업에 대해서는 허용이 16%였다. 쟁의행위의 합법, 불법 여부에 관계없이 직장폐쇄를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은 0.4%에 그쳤다.

대체근로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쟁의기간 중 대체근로는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84.4%에 달했고, 쟁의행위 시 공익사업장에 한해 대체근로 허용(11.1%), 쟁의행위 시 대체근로 투입 전면 허용(1.6%)은 소수의견에 그쳤다.

“연내 처리 고집 말아야”

이번 조사 결과는 노동자들이 로드맵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또한 노동조합 활동가들도 구체적인 내용을 모른다는 반응이 많았다. 따라서 무리한 추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견들이었다.

김용수 INI스틸노동조합 포항지부장은 “시한을 정해놓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악순환만 낳을 뿐”이라며 “대화를 계속 해나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화학노련 김기청 교육홍보실장도 “비정규직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가 노사관계의 선진화를 내세우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비판하고 “연내 처리를 고집하지 말고 핵심 쟁점들에 대해서는 논의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 여당 내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열린우리당 이목희 의원은 국정감사 중에 “시급하거나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닌 것까지 전체로 한꺼번에 처리할 필요가 있나 싶다”고 운을 뗐고, 김금수 노사정위원장도 “모든 항목을 일괄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쉬운 항목부터 처리하는 방법도 있다”고 밝혔다.

법 자체보다는 집행의 공정성이 문제

많은 노사관계 전문가들도 문제가 법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34개 항목이나 되는 내용을 일괄 처리하는 것은 노사관계 선진화를 단순히 노동법의 정비를 통해 이루겠다는 잘못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비판이다.
최영기 한국노동연구원장은 “법과 원칙이 확립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법 그 자체에 대한 시비보다 법 집행의 공정성에 대한 불신에서 기인한다”고 전제하고 “중요한 것은 법의 선진화가 아니라 노사관계의 선진화이므로 로드맵의 법개정 사항을 우선순위에 따라 분리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법제도의 정비는 정부의 몫이고, 필요하다면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또다른 갈등의 요인으로 남아 노사 모두로부터 환영받지 못한다면 ‘노사관계의 선진화’라는 본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가 기존의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면서 중재자의 역할을 다 하고, 노사 당사자가 자율적으로 해결할 부분과 충분한 논의를 거쳐 합의점을 찾아나가야 할 부분을 명확하게 분리해야 한다는 지적을 새겨들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