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비천한' 아이들
마음이 '비천한' 아이들
  • 배민정 기자
  • 승인 2010.08.10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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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 졸업식 동영상 보며 옛 사랑 떠올리네
학생 인권조례가 '오 장풍' 선생님 인격 지켜줄 거야

 

▲ 배민정 mjbae@laborplus.co.kr

1.
알몸 졸업식을 기억하는가. 올해 초 길거리에서 홀딱 벗은 아이들 때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동영상이 화제가 되자 한 편에선 ‘삐뚤어진 청소년 문화’에 대한 개탄이, 한 편에선 ‘본보기가 되지 못한 어른들’의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급기야는 대통령마저도 “나부터 회초리를 맞아야 한다”며 고개 숙였다. 애들이 신 나면 길에서 옷 좀 벗을 수 있지 그게 뭐, 라고 무심했는데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동영상 클릭. 열 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 여중생을 빙 둘러싸고 옷을 벗기는 장면이 떴다. 블라우스가 벗겨진 여중생은 가슴을 손으로 가린 채 둥글게 몸을 굽히고 있었다. 남학생들은 헐벗은 여학생을 가리키며 “오오~”하는 야유를 보냈다.

이 영상을 봤을 때 느낀 기분은 한 마디로, 불쾌했다. 이것이 다수가 한 여학생을 괴롭히는 모습인지, 아니면 그들만의 놀이문화인지, 혹은 둘 다인지는 모르는 일이다.

내가 불쾌했던 이유는 아이들이 너무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린 여중생이나, 그 여중생을 둘러싸고 조롱 섞인 감탄사를 날리는 남자아이들이나, 모두 어떤 ‘떳떳하지 못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햇빛 속에서 깔깔거리고 옷을 벗는 철부지들의 모습을 그렸던 내가 철없는 거니.

이것이 사회의 통념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누가 지적하기도 전에, 이미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인식과 합의하에 음습하게 웃는 아이들을 보며 실로 오랜만에 옛날을 기억했다.

2.
열여섯 살. 나는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고, 도통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저녁이 되면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끼리 술을 마셨다. 부모님이 자리를 비운 친구 집 또는 초등학교 운동장 구석이 단골 장소였다.

술자리는 차근차근 진행됐다. 누군가는 어디서 토하고 누군가는 낄낄거리고 누군가는 앞사람의 멱살을 잡았다. 술병과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져갈 때 남은 자들은 말이 없었다. 서서히 밝아오는 날을 보며 간밤의 생존자들은 담배를 하나씩 물었다. 한 남자아이가 하아, 한숨을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겠냐.”

옆으로 돌아보며 멋쩍게 웃던 표정, 말없이 동의를 구하던 눈을 기억한다. 나는 지금도 그 말 속에 사무치던 피로를 잊지 못한다. 당시 그 아이는 열일곱 살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모범적인 학생들이 장래를 위해 공부에 매진하는 만큼, ‘엇나갔다’고 판단된 아이들도 나름의 미래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남자아이들은 수상쩍은 조직에 가담하고 소년원을 들락거리며 일찌감치 밑바닥 세계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여자아이들은 가출, 티켓다방, 술집, 소리소문 없는 증발의 수순을 밟아갔다. 몹시도 신속한 이 과정이 우리에게는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처럼 당연하게 보였다. 공부도 못 하고 어른 말도 안 듣고 술이나 마시고 오토바이나 타고 환각제나 삼키는 우리는 평생 이렇게 살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공유하며 불꺼진 운동장에서 입을 맞췄다.

2010년 길거리에서 옷을 벗은 아이들과 십 년 전 남자친구의 목소리가 겹치는 이유는 왜일까.

3.
고(故) 전인권 교수는 <남자의 탄생>에서 자신의 유년기를 분석하며 음담패설과 욕설을 주목한다. 이 책의 12장 ‘마음이 비천한 아이들’은 전 교수의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 부임해 온 정동식(가명) 선생님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분은 키도 크고 미남인 데다 활동적인 분이었다. 학교수업뿐만 아니라 지덕체(智德體) 모든 면에서 새로운 사상과 철학을 유포시킨 선생님이었다. …정동식 선생님은 근대화 운동의 기수였다.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 교사는 지역 사회의 지도자였는데 정동식 선생님은 더욱 그랬다. 대한민국에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면, 동송읍과 우리 학교에는 정동식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의 안일한 생각과 행동을 하나에서 열까지 다 바꾸려고 했다.

시골 초등학교에 부임한, 젊고 의욕 넘치는 정동식 선생님은 농촌 아이들의 나태한 일상을 개량하고자 ‘생활계획표’를 짜준다. 거기엔 새벽 6시에 일어나 체조할 것, 매일 한 가지씩 부모님을 도울 것 등 하루에 해야 할 일이 25가지 항목으로 표기돼 있고, 아이들은 각각의 확인란에 O, X를 표시해 월말마다 선생님께 제출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750가지를 모두 실천한 아이는 없었고, 그것을 솔직하게 표시한 아이도 없었다고 전 교수는 말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죄의식이 잉태한다.

나는 3분의 2도 지킬 수 없는 그 생활계획표 때문에 정말 괴로웠다. 더구나 거짓말로 O표를 하다 보니, ‘선생님을 속이고 있다’는 비참한 감정이 나를 괴롭혔다. 그 죄의식은 기독교의 원죄의식과 양태를 달리하는 것이지만, 강도에 있어서는 그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기독교의 원죄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으로 존재론적 의미를 띠지만, 나의 죄의식은 아버지의 아들, 선생님의 제자, 국가의 국민, 생활계획표를 실천해야 하는 어린이로서 제 할 일을 못하고 있다는 ‘역할의 불충실’에 관한 죄의식이었다.

…당시 나와 내 친구들은 스스로에 대한 존경심이 없었다. 차라리 비속함을 드러내는 것이 더 솔직한 일이었다. 우리들은 정말로 상소리를 즐겨 사용했다. O새끼, 니기미, O팔 등과 같이 성과 관련된 욕도 자주 했다. 어떤 경우에는 누가 더 비속한 말을 잘 쓰는가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욕을 많이 할 때도 있었다. 우리가 그처럼 비속한 말을 쓰는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욕을 한다는 것, 더욱 심한 욕을 한다는 것은 똑같은 거짓을 범했던 동지들이 서로의 죄를 확인하고 함께 한탄하는 의미가 있었다.

내가 알몸 졸업식과 십 년 전 술자리에서 똑같이 보는 것은 스스로를 존중할 수 없는 아이들의 자학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학교가 제시한 길에서 빗나간 아이들의 전유물은 아니라 생각한다. 학교 앞에서 죄인 아닌 이 뉘 있느냐. 등교 시 교문 앞 ‘학주’를 스쳐 가는 순간, 성적표에 기재된 전국 등수와 마주하는 순간, 한 번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은 자 돌 던지라.

4.
지난 7월 진보 성향 교육감들이 대거 취임한 후 학생 인권조례 제정에 교육계 안팎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내년부터 학생 인권조례를 시행할 것이라 밝히고, 김상곤 경기도교육감도 이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이라 공표한 뒤, 일부 언론은 교권 추락을 예측하는 기사를 연이어 내보냈다. 학생의 권리와 교사의 권리가 접시저울 양쪽에 얹혀 있는 관계인지 처음 알았다.

이렇게 언론에서 호들갑 떨 만큼 학생 인권조례가 효력이 있을까? 글쎄다. 공교육-사교육-아파트(강남)라는 삼각형으로 이루어진 이 땅에서 두발자유와 체벌금지, 집회의 자유 따위로 아이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건 좀 너무 순진한 믿음이다.

그럼에도 학생 인권조례가 필요한 이유는 아이들의 권리뿐 아니라, 최근 학생을 바닥에 내리꽂고 발로 찍는 모습으로 화제를 모았던 모 초등학교 ‘오 장풍’ 선생님의 인격을 지켜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폭력의 현장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격이 동시에 분쇄되는 것을 인류는 역사적으로 전쟁 등을 통해 목격했으며, 개인적으로 윗집의 부부싸움에서 확인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장풍을 날리는 자기 자신의 모습, 그도 사랑하진 않겠지.

5.
이제 할 말은 다 했다. 나머지는 글을 쓰는 동안 스쳐 지나간 생각이다.

군대만큼 음담패설을 심하게 하는 곳도 없다고 한다. 심지어 연인과의 잠자리마저도 서슴없이 떠드는 분위기라 한다. 여자친구랑 어디서 어떻게 했느냐고 집요하게 추궁하는 선임에 대한 이야기, 군대 갔다 온 친구들에게 참 많이 들었다.

요즘 인터넷엔 안 뜨는 게 없다. 북창동 술집에서 노는 사람들 사진을 본 적 있다. 소파 한 편에선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한 편에선 남자가 여자 가슴을 주무르고, 또 한 편에선 실시간으로 성행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사진을 보며 역겨움보다는 묘한 슬픔이 더 컸다.

마음이 비천한 아이들의 놀이는 계속 된다.

 

 

 배민정의 타인
 한 사람과의 만남, 그것은 한 개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경계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 E. 레비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