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에는 어떤 직업이 있었을까?
1950년대에는 어떤 직업이 있었을까?
  • 최영순 중앙고용정보원 연구원
  • 승인 2005.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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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웰컴투 동막골>
남루한 현실이지만 영화에서는 ‘엘리트’ 많이 다뤄

어린 아들이 백발의 노인이 되어 나타나 어머니 앞에서 통곡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이념이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연로한 이산가족들은 북쪽, 혹은 남쪽의 가족들을 채 만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있고 그들의 가슴 속에는 십수 년의 세월과 그리움, 안타까움이 뒤섞여 있지만 세월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야속하게 자꾸 흘러만 가고 있습니다.
분단국가, 유교사상과 결부된 뿌리 깊은 가족애 등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그래서 더 공감할 수 있는 전쟁 관련 영화장르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천만관객이 눈물을 흘렸던 <태극기 휘날리며>가 그랬고, <공동경비구역 JSA>가 그랬습니다.

흔히 반전(反戰)영화라고 하면 전쟁을 반대하는 강한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기 마련입니다만, 우리나라의 반전영화는 전쟁 그 이상의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고 결국 ‘우리는 서로 다르지 않다’라는 휴머니티 메시지도 함축적으로 포함합니다.

‘이념’ 아닌 ‘사람’이 세상의 주인

소문난 떠들썩한 영화와 함께 개봉하였지만 그 영화를 뛰어 넘어 7백만 이상의 관객몰이를 한 영화 <웰컴투 동막골> 역시 반전 그 이상의 뭉클함을 보여주며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해 줍니다.
스타마케팅도, 이름난 감독도 없지만 잘 짜여진 탄탄한 시나리오와 눈물과 웃음을 적절히 버무리는 감독의 신선한 연출력으로 분단이라는 우리의 무거운 짐이 화해라는 함께 풀어야 할 과제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웰컴투 동막골>의 시대적 배경 역시 한국전쟁이며 그리고 ‘아이들처럼 막 살라’는 실제 강원도 지명인 동막골이 공간적 배경입니다. 국군, 인민군, 미군. 절대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들이 총도 수류탄도 모르는 강원도 산골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또 하나의 연합군을 만들고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그래서 결국 전쟁도, 이념도 아닌 ‘사람’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전쟁의 포효가 한창이었지만 영화에서 동막골은 순진무구함 그 자체입니다. 그 시절 농촌이 그러했듯이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농사가 전부였을 것이고 훈훈한 인심이 재산이었습니다.

대부분 농민, 전쟁 미망인들은 행상에 식모로

그렇다면 1950년대 우리나라에는 어떤 직업들이 있었을까요.
한국전쟁은 우리 국민 누구에게나 상처를 남긴 가슴 아픈 현대사로 전쟁 후 폐허가 된 사회에는 물질적인 재건과 함께 전통과 근대의 혼돈이라는 문제가 남게 되고 특히 넘쳐나는 실업자를 양산하기도 하였습니다.

해방 전후 우리나라 국민의 80~90%는 농민이었고 그 외 행상, 막노동 등이 흔히 볼 수 있는 직업이었습니다. 물론 공무원이나 은행원같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지게꾼, 구두닦이, 그리고 휴지를 주워 생활했던 넝마주이를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때이기도 합니다.

전쟁 후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시골에서 상경한 젊은이들이 서울로 많이 몰려들었고 이들은 지금의 서비스업이라고 할 수 있는 술집, 음식점, 다방 등에서 주로 일했습니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흔하지 않았던 다방이 한국전쟁 이후 급속히 증가하여 1959년 말 서울에만 900여 개의 다방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 직원공개채용이 1957년에 와서야 처음 실시되었다고 하니 그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직원을 채용하는 관행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기에는 남성들도 직업을 가지기 어려운 때였으므로 여성들이 제대로 정규교육을 받고 취업한다는 것은 무척 힘들었겠지요. 또한 전후 50만 명 가까이 발생한 전쟁 미망인은 갑작스럽게 가장의 역할까지도 해야 했지만 전업주부였던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행상, 식모 등의 직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50년대 통틀어 유학생 4632명

영화는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당시 영화에 등장하는 직업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그 시절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국최초의 여성감독인 박남옥의 영화 <미망인, 1955>처럼 당시 전쟁 미망인들이 겪었을 아픔을 묘사하는 작품이 있는 반면, <여사장, 1959>의 여사장, <어느 여대생의 고백, 1959>에서의 여성 변호사, <그 여자는 행복했다, 1959>의 잡지사 여기자처럼 전문직으로 일하는 여성들이 1950년대의 영화 속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코미디 영화 <오해 마세요, 1957>에 당시 고급 백화점이나 호텔 등지에서만 일했을 엘리베이터걸이 등장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그 당시 엘리트남성의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은행원, 신문기자, 대학교수, 공학박사 등이 영화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하지만 화가, 작곡가, 소설가, 시나리오작가 등 이른바 문화예술인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으로 다수를 차지하는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이 당시 제작된 영화에는 해외로 유학을 떠나거나 다녀온 유학생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해외로 어학연수를 떠나거나 유학을 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1950년대에는 어떠하였을까요? 교육인적자원부의 자료(<문교40년사>, 문교부, 1988)에 의하면 1951년에서 1959년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파견한 유학생은 모두 4632명입니다.

특히 인문과학보다는 자연과학을 공부하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학생의 수가 많음을 알 수 있는데요. 전후복구의 문제를 안고 있던 그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상 많은 외화를 국가에서 부담해야 하는 유학생 파견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피폐해진 사회를 다시 재건하기 위한 과학기술 발전의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입니다.

반세기가 흘렀고, 많이 부유해졌지만 세월로도, 돈으로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이 아직도 많기에, 그리고 오랫동안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선명한 역사이기에 <웰컴투 동막골>같은 영화 역시 한동안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