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학습이 되레 창의력 망친다
선행학습이 되레 창의력 망친다
  • 참여와혁신
  • 승인 2010.09.06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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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학습’에 대한 오해와 착각
복습 없는 예습 있을 수 없어…과다한 선행학습이 오히려 자녀 망쳐

조진표 와이즈멘토 대표이사
교육컨설팅 관련 강연과 방송진행, 일간지 교육칼럼 기고

‘예습(豫習)’은 학습할 사항을 미리 읽고 공부하여 다음 학습을 대비 혹은 습득한다는 의미다. 학교 등에서 학생들에게 의무사항으로 내주는 숙제와 달리 예습은 학생이 자주적으로 하는 학습활동이다. 그런데 예습은 어떤 작용을 거쳐 자주적인 학습활동이 되는 것일까? 이는 우리의 기억 장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습은 우리 기억에 영향을 미치는 것 중 하나인 ‘선택적 주의집중’을 가능하게 만든다.

예습이 집중력과 이해력 높인다

선택적 주의집중이란 무엇일까? 우리 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례를 통해 생각해보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한꺼번에 많은 이야기가 들리는 상황 속에 있다고 해보자. 우리 귀에는 갑자기 매우 많은 양의 이야기가 들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음악 소리, 음식 먹는 소리, 발자국 소리, 또 구별할 수 없는 많은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온갖 소음과 잡음이 많은 이런 장소에서도 우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상대방의 말소리를 이해하고 그에 대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무수한 소음 속에서 누군가가 이야기 속에서 내 이름을 언급한다면, 아주 먼 거리에서도 그 말에 집중을 하면서 어렴풋하게라도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칵테일파티 효과(cocktail party effect)’라 한다. 칵테일파티 효과는 실생활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미리 선행학습을 한 학생이라면 수업시간에 본인이 미리 공부한 학습 내용을 선생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내용이 칵테일파티 효과처럼 귀에 잘 들어올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학생의 학습 효과는 더 높아질 것이 당연하다. 이런 예습(선행학습)을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긍정적 효과는 적지 않다.

우선, 예습은 이해도 향상에 기여한다. 앞서 말했던 칵테일파티 효과처럼 선행학습은 특히 학습을 이해하는 데 큰 기여를 한다. 우리 옛 속담에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는데, 원래 그런 뜻은 아니지만 선행학습의 긍정적 효과를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맞아 떨어진다. 하나를 미리 공부해두면 수업시간의 내용 열 가지를 좀 더 쉽게, 좀 더 집중해서 학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 함께 똑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 사이에서도 미리 예습을 통해 선행학습을 했거나 또는 독서를 통해 배경 지식을 습득한 사람이 수업에 대한 이해력이 훨씬 더 높아진다. 예습을 한 학생은 기억 장치의 기능 덕분에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더 빠른 속도로 수업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력이 향상되면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자기주도적으로 의문을 품게 되기도 하고, 한번 들었던 내용이라 수업시간의 집중력도 높일 수 있다.

예습, 즉 선행학습을 하면 본 수업 내용은 일종의 반복 학습처럼 된다. 이런 효과 덕분에 공부한 내용의 망각이 더뎌지면서, 반복 학습으로 인한 복습 효과도 얻을 수 있다. 공부 시간이 단축되는 장점도 부수적으로 거두게 된다. 예습의 여러 장점이다.

ⓒ 와이즈멘토

예습으로 준비하고, 복습으로 기틀 잡아야

그러나 이렇듯 예습이 아무리 긍정적인 효과가 많다 해도,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이 긍정적인 효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몇 해 전부터 특수목적고, 자사고, 국제고 등의 입학 열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이런 열기 속에서 학원들은 우수 학생들이 경쟁하는 고입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다며 선행학습을 부추긴다. 이로 인해 학생들 사이에 무분별할 정도의 선행학습이 나타나게 됐고, 이런 학교를 목표로 공부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도리어 역효과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등학생인 아이가 과학고 진학을 목표로 고등학교 수학을 선행학습한다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공부하던 아이가 몇 년 후 반드시 과학고에 합격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결과는 예습 이후 뒤따라와야 하는 학습 조건이 수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습이 분명 학습 내용을 습득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번 들었던, 또는 한번 풀었던 문제를 내 것으로 만들려면 예습만으로, 그리고 학교 수업시간의 수업내용만으로는 부족한 것 역시 사실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 뇌에서 지식을 습득하는 경로는 입력에서 곧장 완벽한 기억 속 저장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다. 복습 같은 이후 과정을 통해야 공부 내용이 비로소 기억 속에 단단하게 자리를 잡는 것이다.

기억 과정의 이런 원리와 특성을 무시하고 미리 진도 달리기에 급급한 선행학습을 따라가다 보면 그 학생은 처음엔 누구보다 뛰어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선행학습은 결과적으로는 여러 병폐를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선행학습을 미리 지나치게 많이 해버렸다면 그 학생은 정작 수업시간의 공부에는 흥미를 잃기 쉽다. 이럴 때 학생은 스스로 자만에 빠져 오히려 내신 시험 성적에 대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수업 시간의 공부 내용을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르게 된다.

선행학습 맹신보다 자율성과 동기부여 높여야

또한 우리 현실에서 선행학습이란 ‘우리집 아이만 남에게 뒤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학부모의 불안감 때문에 강요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렇게 진행되는 선행학습으로 학원이나 과외에서 공부를 한 학생들은 그럼에도 성적이 안 오르는 일이 많다. 그것은 공부란 양적인 싸움에서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부는 체계적인 계획 아래에 목표를 세워 실천할 때 성적이 오르게 되는 구조를 띠고 있다.

선행학습은 망각을 더디게 하고 기억을 장기화하는 효과도 있지만, 이렇게 무리하도록 많은 양의 선행학습은 오히려 학생에게 독이 된다. 미리 공부해서 내가 다 아는 부분이니 수업 중엔 안 들어도 된다는 생각으로 학생은 수업 중간 중간 또는 수업 시간 내내 딴 생각을 하는 경우가 아주 흔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부모의 불안감 때문에 다시 선행학습을 위해 밖으로 내몰리는 아이들은, 논리력·응용력·창의력을 요하는 현행 교육제도에서 자꾸 낙오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행학습이 지식 습득에 기초가 되는 필요 지식을 갖추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학생들에게 방해로 작용해서, 나날이 창의성을 더욱 강조하는 입시 체제에서 그 학생은 낙오되기 쉽다. 자율성이나 공부를 위한 동기부여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런 방식이라면 성인이 되어서도 또다시 취업을 위해 별도의 학원 수업을 들어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