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교 교주는 오늘도 우울하다
명랑교 교주는 오늘도 우울하다
  • 배민정 기자
  • 승인 2010.09.06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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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부터 촛불집회까지, 성역 없는 시비걸기
“내 작품 밑바닥 정서는 슬픔과 아픔”
[E사람] 미술작가 조습

ⓒ 박종훈 기자 jhpark@laborplus.co.kr

2001년 “난 명랑을 보았다!”고 외치며 주교복장을 하고 거리를 돌아다닌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을 ‘대한명랑교’ 교주라고 주장하며 ‘반공, 순결, 밑음, 사랑’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 복음을 전했다. 괴상한 복장으로 거리에서 전도를 벌이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경악했다. 이런 모습을 찍은 사진들은 2001년 6월, 인사동에 고스란히 전시됐다. 그의 첫 개인전이었다. ‘대한명랑교’의 교주이자 유일한 신도, 조습 작가를 만났다.

조습, 농담처럼 등장하다

조습은 우리 사회 마초적 권력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한 작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미술작가다. 스스로 ‘멸공’이라고 쓰인 모자를 쓴 채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군복을 입고 찍은 1999년 작품 <나는 콩사탕이 싫어요>부터 2009년 <촛불>에 이르기까지, 그는 시대현상을 의도적으로 조악하게 재현한 사진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조습 작가의 작품 성격은 1999년 경원대 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으로 썼던 <권력과 우상에 명랑한 시비걸기>에 단적으로 드러난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이 논문의 목차를 살펴보자.

1-1. “저는! 정말 콩사탕이 싫다니깐요!”
1-2. “아버지! 저는 이제 당신 곁을 떠나겠습니다”
1-3. 환장할 “우리의 일그러진 똘마니 오빠들!!”
2-1. “자! 자! 사진 좀 찍읍시다!!”
2-2. ‘명랑’ 그 멋진 신세계를 향하여/ 웬만해선!! “조습을 막을 수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시트콤 제목이 아니다.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줄기차게 권력과 우상에 비판을 가해온 조습 작가의 발걸음을 생각하면, 이 황당한 목차는 사뭇 진지한 선전포고였던 셈이다.

ⓒ 박종훈 기자 jhpark@laborplus.co.kr
권력과 우상, 죽음의 삼각형

조습 작가에게 줄기차게 ‘권력과 우상에 명랑한 시비’를 걸어온 이유를 묻자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숱하게 그런 것들을 체감하며 부딪혀왔기 때문”이라 답한다.

남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그는 육체적 힘에 따라 서열이 나눠지는 남고생들의 집단에서, 교련 선생님의 감시 하에 목총을 들고 “찔러, 때려, 비껴 우로 찔러”의 동작을 일사분란하게 따라하며 자라왔다. 여위고 예민한 소년이었던 조습 작가가 이 시기에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정은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회화과로 진학한 그는 1학년 때 학생회 활동을 했는데, 그곳 내부에서도 똑같이 ‘마초’와 ‘서열’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가 대학에 입학했던 1995년은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소식이 연이어 터져 나오며 사회적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였다. 다른 한쪽에서는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행당동 철거민 박균배 씨가 분신을 통해 모진 현실에 저항했고, 포장마차 철거에 반대하며 농성 중이던 노점상 이덕인 씨는 인천 아암도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 일들이 일어났다.

이 모든 사건이 ‘군부독재정권’도 아닌 ‘문민정권’에서 벌어진 일이다. 힘없는 자들의 연이은 죽음에도 권력의 성은 끄덕도 없었다. 또한 참담한 사건에 분개하는 척하며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자들 또한 언제나 존재했다. 조습 작가는 이런 사회를 보며 “권력과 죽음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사회의 권력과 우상, 그에 뒤따르는 죽음의 행렬을 목격한 경험은 그가 현재까지 줄기차게 이어오고 있는 ‘시비걸기’ 작업의 동력이 된다. 단, 중요한 점은 어디까지나 ‘명랑한 시비걸기’라는 것.

<난 명랑을 보았네> 2001 ⓒ 조습

난 명랑을 보았네!

2001년 조습 작가는 첫 개인전 <명랑교 첫 부흥회: “난 명랑을 보았네!”>에서 스스로 교주로 분장하고 “밑어라!”는 알 수 없는 말을 외치며 ‘대한명랑교’를 창시했다고 주장했다. 전시장 벽엔 조습 작가가 괴상한 교주복을 입고 한국의 대형교회 성전을 방문한 사진들이 걸려 있고, 작가 자신의 모습을 흉상으로 제작한 조각 작품은 <나! 이외의 우상을 만들지 마라!>는 제목을 달고 위풍당당하게 전시대에 얹혀 있었다.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의 80년대 민중미술과 조습 작가가 구분되는 지점은 바로 이런 조롱과 웃음의 미학이다. 조습 작가는 “지금에 와서 시대에 ‘저항’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며 “나는 누군가를 선동하는 대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들을 드러내며 즐기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은, 조습 작가가 말하는 ‘즐김’은 현실에 대한 체념 또는 외면이 아니다. 오히려 권력과 폭력의 그물망 속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해방시키는 방법이다. 이쯤에서 명랑교 교주의 설명을 들어보자.

본인의 유머는 이처럼 폭력적 성격을 가진 유머로서 무엇보다 권력과 우상의 신화적 폭력에 맞서기 위해서 선택된 것이다. 권력과 우상이 말하는 신화의 이상을 비웃고 조롱하면서, 그들이 만들어낸 공포로부터 ‘나’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이다. (2001년 전시서문)

건강에 대한 집착으로 눈 먼 사람들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후 시간이 흐른 만큼 조습 작가의 작품에도 변화가 있었다. 한국사회를 조롱과 풍자로 접근하는 방식은 같지만, 즉각적인 웃음을 유발했던 종전의 작품과는 달리 최근의 작품들에선 보다 으스스하고 섬뜩한 면이 부각되고 있다. 하긴 웃음과 공포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라고 했던가.

조습 작가의 변화는 특히 2008년 <누가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가> 연작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서양의 종교화를 패러디한 연작은 이때까지 그가 조롱해왔던 ‘권력자’들이 아니라, 권력과 영생에 집착하는 인간의 본성 자체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예를 들면 한 작품의 정황은 이렇다. 얼굴을 하얗게 칠한 의사가 탁자 위에 누워 있는 남자의 팔을 쪽가위로 뜯고 있다. 남자는 피를 줄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있다. 가운을 입은 의사와 누더기를 걸친 스님, 군인들이 남자를 둘러싸고 있으며, 창문의 쇠창살 너머 한 여인이 누군가의 팔에 안겨 이 모든 장면을 내다보고 있다.

이 사진의 의미를 낱낱이 짐작하긴 어렵지만, 보는 사람을 웃기기보다는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등장인물들의 조악한 분장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이는 폭소 보다는 거북함에서 오는 반응에 더 가깝다.

조습 작가가 <누가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가>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본격적으로 생명복제 문제가 불거진 시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황우석 박사의 논문조작 사건과도 무관하지 않을 터.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작가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요즘 TV를 보면 10개 중 2개는 건강 프로그램이더라고요. 매체에서 건강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해선지,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대한 관심 절반이 건강에 쏠려 있는 것 같아요. 일례로 밤에 아파트단지에 들어서면, 전부 사람들이 걷고 있어요, 운동한다고. 그걸 보면 좀 섬뜩한 느낌이 들어요. 유령 같기도 하고, 좀비 같기도 하고….”

조습 작가는 황우석 사건 당시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영생에 대한 탐욕스러운 집착을 드러내는 인간의 모습을 보며 사회 전체가 ‘좀비화’ 됐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런 문제의식은 2008년 촛불집회에까지 이어진다.

“촛불집회 때 소위 한국에서 좌파라는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우파와 굉장히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 한국에서 미국산 소고기를 수입하지 않는다고 해도, 제3세계국가에 수입돼서 우리보다 훨씬 못 사는 사람들이 그 고기를 먹지 않겠어요? 일단 소에게 소를 먹여 키운다는 것부터 잘못된 건데, 근본적인 해결책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이 그냥 우리는 못 먹겠다, 굴욕 외교다 하는 논지만 있었다는 거죠. 그리고 2009년 겨울에 용산 참사가 일어났을 때는 상대적으로 사회가 무관심 했잖아요? 저는 이런 현상이 인간의 본성을 잘 말해준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의 몸’에 대한 과도한 애정 때문에 그 밖의 것들은 보지 못하는 거죠.”

<촛불> 2009 ⓒ 조습

대의에 짓밟히는 작은 꽃

그래서일까. 조습 작가의 2009년 작품 <촛불>의 분위기는 밝지 않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학생, 군인, 주부들은 촛불을 들고 옹기종기 인간탑을 쌓고 있다. 두 면으로 구성된 사진에서 한 번은 작가가 촛불을 들고 인간탑 꼭대기에 있고, 또 한 번은 바닥으로 내려와 군중을 찍으려 카메라 앞에 서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인간탑 꼭대기에서 결의에 찬 표정과는 반대로, 바닥에 내려왔을 때 시무룩한 얼굴로 카메라를 만지는 작가의 모습이다. 이를 촛불집회에 대한 복합적인 심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면 과대해석일까.

“촛불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다 진실 때문에 모였다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서울광장 화단에 핀 꽃을 깔고 뭉개고 앉아서 촛불을 드는 거예요. 저는 그 광경을 보면 저 꽃은 내일 죽겠지, 얼마나 아플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대의는 중요한 거죠. 꽃이 희생되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있고요. 하지만 꽃이 죽어가면서 느끼게 되는 아픔도 이해할 수 있는 섬세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꽃의 죽음을 느낄 수 있는 섬세함이 필요하다는 말은 노동계에게도 적용된다. 조습 작가는 “제가 잘은 모르지만…”이라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지만, 곧이어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기성정치, 제도권 정치에 있는 사람들과 흡사한 부분이 있다”며 일침을 가했다.

“예전에 비해서는 노조가 힘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비정규직 문제만 해도 노조에서 더 신경을 써야한다고 생각해요. 분명 노동운동도 더 중요한 일, 더 큰 일에 따라 전개될 수밖에 없지만 무턱대고 대의만 좇아가다보면 그 안에서 밟히는 꽃들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

아픔을 아는 웃음

조습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웃음’보다는 아픔과 슬픔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신분적 차이로 고통 받는 천민이 봉산탈춤을 추며 양반을 조롱한 것처럼, 자신의 작품 아래 깔려 있는 정서도 아픔과 슬픔이라는 것이다.

봉산탈춤을 보며 사람들이 웃는 이유는 탈을 쓴 사람의 슬픔을 몰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처지를 짐작하고 공감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다.

이처럼 조습 작가의 작품을 보며 우리가 웃게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독재정권 치하에 물고문을 당한 사람들,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어 대형교회에 주머니를 털어 넣는 가난한 이들, 망루에 올라가 삶의 터전을 지키려했던 용산 철거민들의 입장을 공감하기 때문에 웃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웃음의 뒤끝이 비록 씁쓸할지라도 말이다.

조습 작가는 요즘 4대강사업, MB정권, 그런 정권을 선출한 시민들을 비판하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좌우, 진보·보수 가리지 않고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권력과 우상에 시비를 거는 그의 외로운 싸움에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