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드라마 볼 권리 되찾자
‘좋은’ 드라마 볼 권리 되찾자
  • 이현우 TV 평론가
  • 승인 2005.10.10 00:00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루루공주> 같은 ‘엉터리 드라마’를 다시 보지 않는 방법

드디어 ‘재난’은 막을 내렸다.
2005년 최악의 ‘재난 드라마’라 할만한 <루루공주>가 TV화면에서 사라진 것이다. SBS로서는 지난해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파리의 연인>의 뒤를 이을 ‘대박’을 기대했겠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다.
첫회 18% 시청률로 출발해 2회에서 가뿐히 20%를 넘었던 이 드라마는 한때 7% 수준까지 추락했다. 정준호, 김정은이라는 스타 파워를 앞세우고 대대적인 홍보전을 펼친 것을 감안하자면 ‘참패’인 셈이다.

대한민국은 드라마 왕국

하고 많은 TV 프로그램들 중 드라마 한 편을 가지고 무슨 의미를 부여하느냐고 묻는다면 오산이다. 한국인만큼 드라마에 열광하는 민족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올해 8월의 월간 시청률 집계를 보더라도 <굳세어라 금순아>를 필두로 모두 8편의 드라마가 포진해 있다. 드라마가 아닌 것으로는 4위에 랭크된 한국 대 사우디아라비아의 월드컵 예선전, 9위 <VJ특공대> 뿐이다.

지난해 시청률조사기관인 닐슨미디어리서치가 92년부터의 시청률을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시청률이 50%를 넘어선 드라마가 <첫사랑>(65.8%)부터 <야망의 전설>(50.8%)에 이르기까지 24편에 달했다.
올해 8월에 마무리된 <내 이름은 김삼순>도 마지막회 시청률이 50.5%를 기록했다. 시청률 50%라는 것은 전 국민 중 절반이 같은 시간에 같은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사람들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이 클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무의식 중에 드라마 속의 내용이 일상을 지배하게 되는 현상마저 발생하는 것이다.

망해야 할 드라마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루루공주>는 ‘반드시’ 망해야 하는 드라마였다. 재벌가를 배경으로 사랑타령을 늘어놓는 드라마가 한두 편이 아닌 ‘현실적이지 못한 현실’ 속에서도 이 드라마는 그 정도를 넘어섰다.
드라마나 영화의 속성이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혹은 불가능한 판타지를 묘사할 수 있고, 또 그것이 하나의 미덕일 수도 있다. 빡빡한 현실을 벗어나게 해주는 판타지는 그 자체로 활력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뻔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럴 듯’ 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꽉 짜여진 스토리를 통해 극적 긴장감이라도 높여야 한다.
그런데 <루루공주>는 진부한 소재, 엉성한 스토리, 조잡한 설정 등 온갖 ‘최악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한마디로 ‘날로 먹으려’ 든 것이다. 결국 시청자들을 ‘바보’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는 드라마다.

아무리 엉터리로 ‘불량품’을 만들어 내도 언론에서 주목할 만한 대형 스타 두어 명 기용하고, 대대적으로 광고하고, 적당히 협찬 받아서 만들면 사람들이 볼 것이라는 터무니 없는 믿음을 깨뜨린 것이다.

주연 배우도 공감 못하는 드라마

이 드라마는 결국 방송 도중에 주연 배우가 드라마 내용에 공감이 가지 않는다는 자기 고백(내지는 내부 고발)에 이르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빚었다. 김정은이 밝힌 내용은 이 드라마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 목요일 저녁 10시 방송분을 당일 오후까지 촬영하고, 그 방송이 끝난 후에 토요일이 되서야 제 손에 받을 수 있었던 다음주 수요일 분량의 대본을 보며, 캐릭터를 잃지 않으려고 흐름을 잃지 않으려고 기를 썼습니다 … 갈수록 반복되는 이해되지 않는 드라마의 흐름을 여러분들께 도저히 진심을 담아 이해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진심을 억지로 만들어가며 쥐어짜가며 연기하는 것이 이렇게 괴로운 것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배우가 되고 싶었습니다. … 회마다 바뀌어 버리는 캐릭터를 더이상 연기할 자신도 없습니다. 왜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이 충분하지 않은 채로 더이상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

검토는커녕 대사를 외우기도 촉박한 시간에 나오는 대본, 공감 가지 않는 구성, 일관성 없는 캐릭터로는 설득력 있는 드라마가 나올 수 없다. 여기에 더해 무분별한 간접광고도 도마에 올랐다.

시청자가 변해야 드라마가 변한다

작품성과 대중성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네 멋대로 해라> <다모>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은 높은 시청률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마니아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고, 또 드라마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방송사나 광고주로부터 환영받는 것은 작품성이 아니라 대중성이다. 그렇다면 대중적 사랑을 받은 드라마는 어떤 조건들을 갖췄을까. 시청률 상위 드라마의 목록들에서 알 수 있듯이 시대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거나 영웅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바로 앞서 방송됐던 <내 이름은 김삼순>의 경우도 <루루공주>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배경을 지니고 있었지만, 변화하는 30대 여성상을 잘 드러내면서 성공작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적어도 <루루공주>처럼 세상물정 전혀 모르는 순박한(사실은 바보스러운) ‘공주’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 배역을 맡은 배우조차도 이해가 되지 않는 캐릭터는 없었다. 바로 이것이 차이다.

앞으로도 제2, 제3의 <루루공주>는 계속 나올 것이다. 비록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여전히 스타시스템은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시청자가 변하는 것이다. 좋은 ‘작품’이 대중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할 때 ‘좋은’ 드라마를 더욱 더 많이 볼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다. 그럴 때 시청자가 ‘졸’로 대접받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