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없는 사람들의 ‘취미생활’
재미없는 사람들의 ‘취미생활’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0.09.07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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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병’, 즐겁기 위해 지르는가, 지르는 게 즐거운가?

 

▲ 박종훈 jhpark@laborplus.co.kr

가끔 주변을 보면 참 재미없게 사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냥 주어진 일상을 쳇바퀴 돌 듯 반복하면서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좀 심각한 증상을 보입니다. 그렇다고 그 친구들이 어딘가 하자가 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성격도 무던하고 외모도 봐줄만 하고, 성실히 다니는 번듯한 직장도 있는데다 집안 환경도 유복해서, 딱 ‘중상류층’에 잘 어울릴만한 그런 사내들입니다.

뭐 그럼에도 전혀 불편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제 공연한 오지랖이겠지만 당사자들이 ‘사는 게 재미없다’라는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고 곧잘 불러내 상담 내지는 하소연을 늘어놓습니다. ‘머릿속 감정을 느끼는 회로가 가닥가닥 끊어진 것 같다’느니 ‘마음이 탈수돼 사막이 펼쳐진 것 같다’느니 불평의 표현도 참 가지가지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덮어놓고 우선 “연애 해”하고 조언합니다. 연애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적절히 리드해 줄 수 있는 멋진 상대가 나타날 경우 의외로 효과가 좋습니다. 하지만 많은 싱글 분들이 공감하시듯 ‘멋진 상대’는 참 드뭅니다. 내적 요인에 기인하기 보다는 외적 요인 때문에 연애는 사실 ‘허들’이 높습니다.

진지하게 듣던 분이 ‘준비~ 땅!’하고 도움닫기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눈앞에 뜀틀이 대여섯 단쯤 높아진 것처럼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경우, 차선으로 “그럼 취미를 가져봐” 하고 조언합니다.

여가문화가 참 다양해져서 많은 직장인들이 여러 가지 취미를 즐기고 있습니다. 휴대폰이나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활용하면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끼리 쉽게 모이고 흩어질 수 있습니다. 잠시만 짬을 내 검색해도 특정 취미를 함께 즐기는 직장인 동호회 모임을 수두룩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모임에 나가면 많은 정보를 얻고 배울 수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디지털 카메라를 처음 구입하고 직장인 사진동호회에 나갔는데, 매뉴얼 한번 읽어보지 않고 작동법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사진을 찍는 요령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낯선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 동호회의 큰 매력입니다. 같은 취미를 공유하고 있다는 친밀감 때문에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도 친해지기 쉽습니다. 생각보다 굉장히 빨리 친해집니다. 가끔 그런 부분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생길 정도로...

못 말리는 장비병

동호회의 규모나 지향과는 무관하게 일정한 캐릭터들은 꼭 생겨납니다. 일정이나 계획 등을 카리스마 넘치게 조율하면서 회원들을 주도하는 ‘리더형’ 캐릭터, 그런 리더 옆에서 경비나 시간계산 등을 살뜰하게 보살피는 ‘참모형’, 공동경비로 처리해야 할 부분을 선뜻 개인이 희사하거나 알찬(?) 선물들을 넉넉히 준비해서 모두를 기쁘게 하는 ‘물주형’, 온갖 농담과 진귀한 이야기들로 회원들을 웃기는 ‘광대형’까지.

그리고 어느 동호회든 빠지지 않고 한 사람쯤은 있는 게 바로 ‘장비병’ 환자들입니다. 좀 기분 나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정도를 넘어서 병적인 집착을 보이는 분들이 있기에 환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장비병에 걸리면 우선 모든 종류의 ‘스펙’ 외우기에 강해집니다. 앞서 얘기한 디지털 카메라만 해도 여러 브랜드에서 매년 수십 종이 출시되는데, 각 기종의 상세한 기계적 성능은 물론 가격이나 동급 기종의 브랜드별 특색, 저렴하게 구입하는 노하우까지 걸어다니는 온라인 쇼핑몰 수준으로 읊을 수 있는 것은 장비병 환자들의 기본적인 소양입니다. 허나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합니다. 이른바 ‘파워유저’, ‘프로슈머’들 중에서도 그 정도 외우고 있는 분들이 많으니까요.

장비병이 중기로 진행되면 서서히 주변인들과 마찰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여자친구를 만났는데 온종일 카메라 얘기만 해댄다면 즐겁겠습니까? 설령 취미가 같은 커플이라도 티격대기 시작할 것입니다. 기혼자들의 경우에는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슬슬 이런저런 장비들을 본격적으로 구비하기 시작할 즈음이기 때문에 배우자의 바가지 긁기가 나날이 강도를 더해갑니다. 남편이 혹은 아내가 알아채는 불상사를 피하고자 은밀히 동호회 활동에 참여하는 기혼자들도 곧잘 볼 수 있습니다.

장비병 말기에는 드디어 가산을 탕진하는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엄청난 고가의 장비를 갖추는 일은 일반적인 사치나 허영을 위한 소비와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그렇다고 합리적인 소비로 보기엔 뭔가 좀 부족합니다. 장비병 말기 환자들은 제품을 구입해서 보유 장비의 구색을 맞추는 일에 관심을 두지 실사용하는 것에는 별 관심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일단 ‘라인업’을 갖추는 일은 말기 환자들에게 굉장히 의미 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고가 장비를 사는 것인지 더 나은 장비를 사기 위해 삶을 사는 것인지 모호해질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엇나간 피그말리온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

얘기가 잠시 샜습니다만 ‘삶이 재미없다’던 친구들이 뭔가 취미 활동을 시작하면 앞서 말한 장비병에 걸리는 모습을 종종 봤습니다. 장비 갖추는 것에라도 흥미를 느낀다면 그래도 잘된 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재미’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을 함부로 견줄 수는 없겠지만 취미 활동을 하면서 얻게 되는 다양한 종류의 재미를 다 밀어두고 장비병 환자들은 특정 종류의 한 가지 재미에만 천착합니다. 그게 뭐 잘못이겠습니까? 다만 싱싱한 생선의 참 맛을 모르는 채 오로지 육고기만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약간 측은한 생각이 드는 것처럼, 그 정도 아쉬움을 느낄 따름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키프로스의 왕 피그말리온은 솜씨 좋은 조각가였다고 합니다. 현실의 여인들이 방탕하게 사는 모습에 염증을 느낀 그는 상앗빛 대리석으로 자신의 이상형에 가까운 여인의 모습을 조각했고 그 모습에 반해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나중엔 조각상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는 파포스라는 딸을 낳고 잘 살았답니다.

하버드대 사회심리학교수 로버트 로젠탈은 피그말리온 신화의 내용을 빌어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심리학 용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따뜻한 보살핌과 격려를 받은 학생들은 학업 성적이 올라간다는 사례에서 착안해 타인의 기대나 관심은 일상의 능률을 올리거나 결과를 좋게 만든다고 일반화한 것입니다.

신화 속 피그말리온 이야기는 별 의미 없거나 가당치 않은 일에 집착하게 되는 인간의 본성을 비꼰 우화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피그말리온의 집착이(혹은 사랑이) 아무리 크고 절실해도 절대적 능력을 가진(돌에 생명을 불어넣는) 신이 등장하지 않으면 결코 지금과 같은 결말을 지을 수 없습니다.

어찌됐든 이야기 속 피그말리온은 꿈꾸던 사랑이라도 찾았지만 사는 게 재미없다던 내 친구는 마지막에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당신

제가 활동하던 동호회의 한 회원 분은 사석에서 “장비병 환자들은 대부분 인간적으로 미성숙하다”고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분위기가 머쓱하기에 ‘좀 심하게 쏴 붙이시네요’라고 대꾸하니 그 분은 “타인에게 애정을 쏟으려면 이래저래 소통의 단계도 필요하고 상처받는 아픔도 겪어야 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그런 종류의 성숙의 과정을 겪기 싫어 일방적으로 사물에만 사랑을 주는 사람을 미성숙하다고 하는거 아닌가?”라고 반문을 합니다.

듣고 보니 딴에는 그럴 듯합니다. 끝끝내 인간의 사랑을 피하기만 했던 피그말리온 왕도 신의 파워를 빌어서야 겨우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앞에서 말했듯 재미없는 제 친구도 모두들 어디하나 빠지는 구석 없는 녀석들인데 가끔 보면 자기비하가 지나쳐 자기혐오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습니다.

보통 “네가 어때서? 팔도 두 개지, 다리도 두 개지. 뭐가 부족해?”하고 농담으로 받지만 심하게 괴로워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때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하고 토닥여 줍니다. 심하게 자책할 만큼 멍청한 일을 저질러 놓고도 한 이십 초 지나면 잊어버리는 무딘 신경인 제가 그 친구들의 괴로움을 두고 ‘좀 더 자기애(愛)를 가져보지’ 어쩌구하는 생각을 갖는다는 것조차 좀 미안합니다.

세상사를 즐거운 일과 아닌 일로 나눠보자면 취미를 즐기는 것은 분명하게 즐거운 일에 들어갑니다. 반면 아침에 출근하는 일은 후자 쪽에 가깝겠지요. 즐거운 일에 자꾸만 마음이 쓰이고 눈을 감으면 생각나고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아주 복잡 미묘하고 우주만큼 커다란 의미를 갖는,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가장 달콤하고 알기 쉬운 느낌으로 설명하라면 저는 ‘즐거움’과 비슷하지 않겠냐고 답하겠습니다.

여하튼 그래서 ‘도통 재미있는 게 없다’라는 얘기를 들으면 ‘도통 사랑할 수 없다’로 들리고, 재미있는 게 없는 친구가 장비에 애정을 쏟는 것을 보면 “저건 분명 가짜 사랑이야. 상처 받게 될꺼야”하고 혼자 중얼거립니다.

끝으로 장비병 ‘환자’ 운운하면서 함부로 일반화시킨 부분에 대해서 사과를 드립니다. 대단히 깊은 경지에 다다른 취미인들이 고가․고급 장비를 마련해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일 것입니다. 동호회 모임에서 누군가 비싼 장비를 들고 나왔다고 너무 백안시하지는 마세요. 그 분 옆에 앉아계시면 한번 만져보게 해줍니다. ^^

박종훈의 테아트룸(Theatrum)

테아트룸(Theatrum)은 라틴어로 극장을 의미한다. '극장'은 모든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