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장님은 시를 좋아하세요
우리 회장님은 시를 좋아하세요
  • 배민정 기자
  • 승인 2010.09.16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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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교육 학습지 교사 농성 1001일째
본사 건물에서 매월 시낭송회 열려

mjbae@laborplus.co.kr
1.
최근 흥미롭게 읽은 책은 로베르토 볼라뇨의 <칠레의 밤>이라는 소설이다. 책의 첫 장은 죽어가는 노인의 환각과 헛소리로 시작된다. 종잡을 수 없는 횡설수설로 가득한 이 책을 가만히 넘기다 보면 문득, 무섭다.

소설의 주요 배경은 피노체트 정권하의 칠레. 주인공은 당대 최고의 문학비평가였으나, 이제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코앞에 바싹 닿은 죽음만을 바라보고 있다. 원래 임종의 장은 평화와 용서의 순간으로 알려져 있지 않나. 그런데 주인공은 이상하게도 못 견디게 심기가 불편하다. 도대체 왜? 그는 평생 문학이라는 한길을 걸으며 ‘떳떳하게’ 살아온 자신이 왜 이렇게 거북한 기분으로 죽음을 맞이하는지 되짚어본다.

신학교에서 공부에 전념했던 소년 시절. 시인을 꿈꿨던 청년 시절. 당대 최고의 문학평론가로 인정받았던 전성기. 순진한 문학청년들은 그를 존경했으며, 불멸의 시인들은 그를 친구로 여겼다. 아름다움과 이상으로 가득한 삶. 그는 때때로 창밖을 바라보며 말하곤 했다. “참 평화롭군, 참 조용하군.”

그는 부유한 예술애호가 여인의 저택에 초대받아 위대한 예술가들과 더불어 파티를 즐기기도 했다. 술, 음악, 춤. 취한 예술가들은 저택에서 가끔 길을 잃기도 했다. 그들은 지하실로 내려갔다 고문을 당한 채로 묶여 있는 사람을 보기도 했다. 모두들 샴페인잔을 놓지 않고 살그머니 뒤돌아 나왔다. 다시 술, 음악, 춤.

이 사건은 실제 피노체트 치하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당시 미국 CIA와 칠레 국가정보국을 위해 일한 마이클 타운리, 마리아 카날레스 부부는 종종 예술가와 지식인을 초대해 저택에서 파티를 벌였다. 그리고 이 저택 지하실에서 UN 산하 라틴 아메리카 경제위원회 직원이 고문 끝에 숨졌다.

소설의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는 칠레 문인들을 실명과 가명으로 등장시키며 예술가, 지식인이라는 작자들이 얼마나 부패 가능한 존재인지 여실히 드러낸다. 주인공은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너무 늦게 그 사실을 알았다. 나는 싸움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한 번도 싸움을 건 적도 없다. 나는 평화를 구한다.”

2.
재능교육 교사들의 농성이 1001일에 접어들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해고자 복직과 회원관리 수수료율 원상 복귀다. ‘회원관리 수수료’는 한 마디로 학습지 교사의 임금이다. 학습지 교사는 회원들에게 받은 회비를 100% 회사에 입금한 후, 그달 들어온 회원과 나간 회원 수를 따져 실적에 따라 수수료를 지급받는다. 예를 들면 교사가 새로운 학생을 맡게 되면 1만 원을 지급받고, 기존에 관리해왔던 학생이 학습지를 그만두면 7천 원을 깎이게 되는 식이다.

2007년 5월 재능교육은 학습지 교사들의 수수료율을 12% 내리고 나머지 10%는 성과에 따라 차등 적용하겠다는 내용의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교사들은 이 단체협약에 따르면 실질적으로 임금이 10만 원에서 100만 원까지 삭감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천막농성과 릴레이 1인 시위를 통해 “생존권을 보장하라”고 외쳤다. 돌아온 것은 해고통지서였다.

어제 재능교육 교사들의 농성장에 취재 갔을 때, 노조가 만든 팻말 중 ‘시인 회장님’이란 글이 눈에 번쩍 띄었다. 재능교육 회장이 시인이었나?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과연 그랬다. 그것도 그냥 시인이 아니라 무려 ‘명예시인’이다.

박성훈 재능교육 회장은 2007년 한국시인협회로부터 ‘명예시인’으로 인증받았다. 여러 매체 기사를 보면 박 회장은 평상시 노래보다도 시 읊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특히 유치환의 시를 좋아해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멋들어지게 낭송한다. 그는 정식으로 시를 발표한 적은 없지만, 한국 시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시인’이 됐다.

재능교육 본사에선 매월마다 시인과 학생들이 참석하는 시낭송회가 열린다. 또한 고은, 이건청, 이근배, 허영자, 신달자, 유자효 등의 시인들은 올해 경남 통영에서 열린 ‘2010 재능시낭송여름학교’에 나가 청소년들에게 시를 읽는 기쁨을 가르쳤다. 나는 모두가 좋은 뜻에서 한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재능교육 시낭송회와 <칠레의 밤>이 자꾸 겹쳐지는 이유는 왜일까. 물론 재능교육 지하실엔 고문을 당해 죽는 사람은 없다. 다만 정문 앞에서 월급을 올려달라고 시끄럽게 외치는 사람, 용역직원들이 빼앗아 가는 천막을 악착같이 부여잡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에 비해 길거리에서 외치는 구호들은 얼마나 속되고 투박한지. 농성하는 교사들을 지나쳐 낭송회장으로 쏙 들어가는 시인과 시 애호가들의 심정을, 아름다운 시를 널리 알리고 싶을 뿐인 박 회장님의 순정을, 우리는 드넓은 마음으로 이해해보자.

3.
오해 마시라. 나는 박 회장의 시 사랑이 교양인으로 보이기 위한 제스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제재로서 최하의 평가를 받는 시를 시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오랫동안 애써온 것을 허위라고 함부로 재단할 권리가, 나에겐 없다. 재능교육에서 주최하는 모든 시 관련 행사가 회사 이미지 제고를 위한 전략일 뿐이라 단언할 수도 없다.

무서운 것은 바로 이런 점이다. 재능교육 교사들이 투쟁하고 있는 본사에서 시낭송회를 연 박 회장도, 그곳에 참석한 시인과 학생들도 ‘시를 좋아하고 나누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뿐이었다면. 도대체 그런 바람이 왜 나쁜가 생각한다면. 하루가 다르게 온갖 일이 터지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신경 쓸 수 없지 않느냐 항변한다면. 그들이 입을 열 때 <칠레의 밤> 주인공과 같은 말이 나온다면.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너무 늦게 그 사실을 알았다. 나는 싸움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한 번도 싸움을 건 적도 없다. 나는 평화를 구한다.”

4.
나에게 <칠레의 밤>을 추천해준 친구는 말했다. “너무 멋있어. 용서와 화해가 다 뭐니. 문학은 분노 아니겠어.” 전국학습지산업노조 홈페이지에 올라온 구몬, 대교, 한솔,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의 호소를 읽으며 다시금 그 말에 동의한다.

-1일 근로 시간이 12시간을 넘습니다. 상품 판매를 암묵적으로 강요받고 있습니다. 교육비 수금도 교사 몫이고 교사 업무가 너무 많습니다. 일을 그만두려고 해도 1년을 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합니다. 어떤 대응을 할 수 있는지 답변 부탁드립니다. 수고하십시오. (전국학습지산업노조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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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과의 만남, 그것은 한 개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경계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 E. 레비나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