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여전히 힘에 겹고….
그 속에서 희망의 새벽도 열린다
세상은 여전히 힘에 겹고….
그 속에서 희망의 새벽도 열린다
  • 성지은 기자
  • 승인 2005.11.05 00:00
  • 수정 0000.00.0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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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진 남자의 뒷모습과 아직 채 냉기가 식지 않은 소주병 몇 개.
포장마차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모습은 무엇일까. 서민의 애환과 슬픔이 응집된 공간, 세상과 주변을 향해 소리를 내두르는 공간, 눈물을 삼키는 공간.
하지만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든’ 표정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깨를 두드려주는 공간. 사람 냄새가 풍기는 공간, 함께 내일을 이야기하는 공간.
포장마차는 역시 쌀쌀해진 날씨와 어울린다. 드리운 비닐 포장에서 새어나오는 불빛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의 온기.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이 올라타는 포장마차는 오늘도 한잔 술과 희망을 싣고 달린다.

경기가 너무 없으니까, 옛날은 생각도 안 해

“이리 와요.”
죽 늘어선 포장마차 입구마다 서 있는 아주머니의 손길이 분주하다. 여덟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도 벌써 몇 개 포장마차에는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소주병을 기울이고 있다.
5년 전 서울 용산 터미널 앞에 형성된 ‘포장마차 촌’은 이제 전자상가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관상의 이유로 철거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 아주머니들이 1년여 간 용산구청 앞에서 ‘시위’를 해 얻은 결과다. 포장마차의 크기도 작아지고 장사도 예전만 못하지만 그들에게는 큰 ‘승리’였다.
한 곳을 골라 포장을 걷고 들어가니 주인 아주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훔치면서 반갑게 맞이했다.

5년째 이곳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고 있다는 정순영(51, 가명)씨는 이제 아들딸들을 반듯하게 키워 시집장가까지 보내 놓은 ‘젊은 할머니’다.
후두암 판정을 받아 힘겨운 수술을 마친 남편을 대신해 운영하는 포장마차는 이들 부부의 생계수단이 되어 주고 있다.

ⓒ 성지은 기자
“하루에 잘 하면 한 10만원, 진짜 잘되는 날은 15만원 벌어. 거기서 재료비 빼고 뭐 빼고 그러면 한 사오만원 남는 거여. 그래도 쯧, 매일 열심히 하면 돈 백은 되니까 둘이 먹고 살 만은 하지 뭐. 옛날에 비해서? 아유, 그거 이야기 시작하면 한정 없지. 경기가 없어도, 없어도 너무 없으니까. 옛날 생각하면 못 살지.”

이 집의 평균 안주 값은 7천원에서 8천원. 요즈음은 그나마도 주 5일제의 영향을 받아 주말 손님이 많이 줄었다. 그래도 평일에는 낮에 라면이며 김밥을 말아 파는 것이 수입에 꽤 도움이 되곤 하는데 주말에는 한산해진 거리가 서운하기만 하다.
그래도, ‘떡볶이라도 한 접시’ 먹어 볼 것을 권하는 아주머니의 인심은 어느 곳 못지않게 후하다.

“힘든 거? 없어. 단골손님한텐 외상도 주고, 같이 술 한 잔 하기도 하고. 가끔 술 자시고 주정하시는 분들이 있기는 한데, 뭐 술기운이니까 잘 달래서 보내면 큰 일 없고. 사람들이랑 부대끼면서 아직 돈 벌 수 있다는 게 어딘데. 힘들다고 하면 다 힘든 거고, 좋다고 하면 다 좋은 거지.”

아이 갖기 두려운 30대, 출산장려도 소용없어

포장마차에 자리 잡은 사람들의 술잔 속 사연도 가지가지다. 한쪽에서는 학교 선후배들 간의 조촐한 모임이 열렸다. 유일한 여성 참석자는 임신 9개월의 고운 임산부다.
떨리는 마음으로 새로운 가족을 기다리는 남편과 아내는 그래도 걱정이 앞선다.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는 예비 아빠를 대신해 선배 김동선(33, 가명)씨가 말을 꺼낸다.

“우리가 힘든 거요? 여기 애기가 태어나면 곧 엄마 아빠 떨어져서 시골로 갈 거예요. 아직 둘 다 맞벌이고 생활도 힘든데, 아이가 생기면 당황스럽죠. 마음 아프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두 부부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진다. 남편 정덕호(31, 가명)씨는 “출산 장려책 한다면서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뭘로 어떻게 장려하고 있는지. 지금 아내도 출산휴가 중인데, 아직 우리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근심어린 말을 내뱉었다.

그나마 편히 출산휴가를 쓸 수 있는 아내는 다행이라고 한다.
“아무도 이야기를 선뜻 밖에 내놓지 않지만, 얼마 전에 우리 회사 온라인팀에 팀원이 많아서 좀 떨궈 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어. 그 이야기 나오고 얼마 있다가 한 여직원이 출산 휴가를 3개월 받아서 아이를 낳으러 갔는데 업무복귀 전에 이미 해고 통보가 갔더라고. 그거 불법이거든.”

해고를 하려면 복귀 후 정당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직원은 아이를 낳고, 회사에 다시 출근하지 않았다. 단지 궁금해서, ‘뭐 낳았대요?’라고 물어본 다른 부서 직원의 질문에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는 직원 모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미안해서’ 모두들 그냥 넘어갔다는 것.
김동선씨는 사은품과 전산용품 판매 사업을 하고 있다. 소자본으로 동업을 해 시작한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아무래도 없으면, 돈이 없으면 제일먼저 표 나는 곳이니까……” 라고 말끝을 흐리는 그는 그래도 아직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아직 불태울 젊음이 있기에, 조금 억울하고 힘들어도 그들의 웃음소리는 포장마차 안을 채우고 넘친다. 이러한 이들의 대화는 밤늦도록 계속됐다.

방향 잃은 40대는 세상이 무섭다

“백수에요, 백수.”
‘무엇을 하시냐’는 질문에 농담조로 대답하는 김남재(42, 가명)씨는 좀처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는다.
잔을 비우며 단지 하소연을 하는 그는 “그래도 50대에서 60대 되는 사람들은 좀 나아요. 자식 다 키워놓고 하다못해 어디 경비라도 서면 한달에 먹고 살 만큼은 벌 수 있잖아. 막말로 그 돈 벌어서 이제 돈 달라고 떼 쓰는 애새끼들은 뭘로 벌어 먹이고 내 노후는 어떻게 마련하냐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지.”

그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는 세상이 무섭기만 하다고 말한다.
“30대는 그래도 적응 잘 하잖아. 50대는 얼마 안 남았고. 우리는 나락이에요, 나락. 한번 떨어지면 걷잡을 수 없는 나락에 떨어지는 거지. 직장에서 쫓겨나고 마음 걸칠래야 걸칠 데가 없는 사람들이 우리라고.”
그래도, 그는 요새 컴퓨터로, 이야기로 세상 따라가기에 힘쓰고 있는 중이다. 아직은 그가 의지하는 술잔과 삶의 무게가 무겁기만 하다. 그래도 내일은 더 나으리라는 희망으로 살아가는 그는 ‘아버지’다.

예전엔 이런 데 쳐다보지도 않았지

아홉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벌써 빈 소주병이 여러 개다. 주름진 얼굴, 작업복 차림의 한 남자는 이미 얼굴이 불그레하다.
조그만 가전 부품 관련 사업을 운영한다는 김승구(49, 가명)씨는 ‘요새 경기가 어떠냐’는 질문에 ‘뻔한 걸 왜 묻냐’며 퉁명스레 말을 건넨다.

술이 몇 순배 돌고, 그는 “차라리 문 닫고 노는 게 편하겠다”며 속내를 털어놨다.
“내가 요 몇 년 새에 2억을 까먹었다고. 알아? 몇 명 없는 직원이나마 월급 맞춰주고 다달이 월세 320만원씩 나가고 나면 적자야, 적자. 그래도 어떻게 하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할 게 이것밖에 없는데. 어쩔 거야. 응? 답답해도 하소연할 데도 없고.”

세상은 자꾸 변하는데, 자꾸 갖고 있는 것들은 소용없어지고, 대학에 다니는 두 아이의 등록금은 너무나 버겁다.
“예전에 잘 나갈 때는 이런 데 쳐다보기나 했나? 내가 여기 이렇게 앉아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하며 쓴 웃음을 짓는 그는 “2만원이면 편하게 앉아 취하도록 마실 수 있는 포장마차가 이제는 정들어 간다”며 잔을 부딪쳐 왔다.

‘등을 토닥여 주는’ 포장마차

세상사는 이야기가 곳곳에 스며있는 2005년 포장마차. 일하는 이들의 삶은 아직 고단하기만 하다.
체감경기는 바닥을 치고 실직한 아버지들은 갈 곳이 없다. 작은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적은 월급과 자격지심, 그리고 힘든 생활에 어깨가 무겁다. 하지만 포장마차의 천막 아래 동그랗게 둘러앉아 나누는 이야기들은 흥겹고, 이마를 맞댄 사람들은 그 곳에서 내일을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

‘등을 토닥여 주는’ 곳이 되고 싶다는 한 포장마차 주인 아주머니의 말이 새삼 따뜻하게 느껴지는 쌀쌀한 새벽. 얼큰하게 취한 이들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_ 쥐꼬리만한 봉급 이야기를 나누는 테이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