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하면 구속? 그럼 도둑질은?
낙서하면 구속? 그럼 도둑질은?
  • 하승립 기자
  • 승인 2010.11.0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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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전태일 만평 전시물과 낙서된 G20 홍보 포스터

▲ 하승립 lipha@laborplus.co.kr
# 지난 1일, 청계천 일대에 전시됐던 전태일 40주기 만평 작품들이 사라졌습니다. ‘범인’은 쉽게 밝혀졌습니다. 사라진 작품들은 청계천 관리사무소에서 쓰레기봉투에 담긴 채로 발견됐습니다. 서울시설공단측이 철거한 것입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서울시설공단이 그 전시회를 허가한 관할 관청이라는 점입니다. 자신들이 허가한 전시 작품을 자신들이 뜯어내고 쓰레기봉투에 담았습니다. 공단측에서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첫 째는 신청서에 전시 내용이 자세히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작품이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 하루 앞선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주변에 붙어 있던 G20 홍보 포스터 7장에 스프레이로 쥐가 그려졌습니다. 경찰은 현장에서 대학강사 박모씨와 대학생 박모양을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경찰은 박모씨에 대해 재물손괴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습니다. 영장 청구를 결정한 것은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로 알려졌습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검찰은 “정부 행사를 방해하려는 의도와 음모가 있다”고 판단했답니다. 법원은 구속영장을 기각했습니다.

ⓒ 트위터 @schbard

서로 다른 자를 쓰고 있느니

헛웃음이 나오는 일입니다. 이쯤 되면 시대에 대한 혼돈이 생깁니다. 전태일 40주기 행사가 한창인데, 지금 상황만 놓고 보자면 40년 전 전태일이 온몸으로 기준과 원칙을 이야기 하던 1970년대 쯤으로 보입니다.

감정적인 부분을 모두 배제하고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사실 두 사안은 크게 보면 다르지 않습니다. 전시물 훼손이지요. 그렇다면 두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과 잣대가 기본적으로 같아야 하고 일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전태일 만평을 떼어낸 서울시설공단은 신청서가 부실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전시를 허가한 것이 바로 자신들입니다. 따라서 이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남는 문제는 정치색을 띠고 있다는 거겠지요.

그런데 해당 작품들은 만평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만평은 풍자를 기반으로 합니다. 특히 정치권력에 대한 풍자가 일반적입니다. 공단의 잣대대로라면 매일 같이 정부 비판을 쏟아내고 있는 신문들은 모두 수거해 폐기처분해야 하는 걸까요.

백 번 양보해서 전시 작품에 문제가 있었다고 칩시다. 그럴 경우에라도 절차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전시 주체가 유령단체도 아니고, 연락을 취해서 설명을 해야겠지요. 하지만 이런 과정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포스터에 낙서를 한 행위에 대해 재물손괴로 구속영장을 청구한 검찰과 경찰의 판단을 기준으로 하자면 공단의 처사는 ‘절도’에 해당됩니다. 그간의 관례로 볼 때 재물손괴 정도는 구속 수사의 사유가 되기 어려운 반면 절도는 명백한 구속 사유입니다.

국격? 일단 부끄러운 줄부터 알자

또 정치색을 문제 삼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G20은 어떤가요. 스무 개 나라 정상들이 참여하는 회의는 당연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정치적’인 G20을 홍보하는 포스터 역시 정치색을 띠고 있는 거라는 결론이 나오겠군요.

물론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모이는 대규모 국제 행사를 앞두고 검찰, 경찰이 예민해졌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낙서를 했으니 구속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남발되는 생뚱맞은 단어 중 하나가 ‘국격’입니다.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이 말은 현 정부의 화두로 보일 정도입니다. 툭 하면 국격이 올라가느니 내려가느니, 혹은 국격에 맞느니 아니니 합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그 잘난 ‘국격’에 맞는 일일까요.

전시회를 허가한 관청이 만평의 풍자 내용을 문제 삼아 그 ‘작품’을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는 일, 그리고 시내 곳곳에 붙어 있는 포스터 중 일부에 ‘낙서’를 했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청구하는 일. 굳이 ‘국격’이란 엉뚱한 신조어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참 남부끄러운 일입니다.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판단 기준, 그리고 대중적 공감. 이런 것들을 바라는 것이 너무 큰 욕심인 건가요?

결론적으로 알아서 ‘윗선 눈치 보기’와 국제행사를 앞둔 ‘겁주기’로 판단됩니다. 여기에서 20여년 전인 1991년의 일이 겹쳐 보입니다. 당시 국무총리 서리였던 정원식씨가 한국외대에 특강을 하러 갔다가 학생들에게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받습니다.

그해 4월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경찰에 의해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10여명이 숨졌습니다. 수세에 밀리던 정권은 총리 계란 투척 ‘해프닝’을 부풀렸습니다. 각 언론들은 ‘패륜’이란 단어로 도배를 했고, 계란과 밀가루 투척에 가담한 학생들은 구속되어 실형 3년 이상씩을 선고받기에 이릅니다. 그 비슷한 시기에 영국 총리도 계란 세례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영국 법원의 판결은 세탁비를 변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포스터에 낙서를 했으면 과태료를 부과하면 될 일인 것을 마치 큰 일이나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면서 계란 던졌다고 청년들을 감옥에 가두던 그 시절이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 때 그 정권이 지금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는 지금의 정권이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을 겁니다.

[덧글] 그러고 보니 자수를 하나 해야겠습니다. 구청에서 쓰레기 불법 투기 하지 말라고 붙여놓은 안내문이 사무실 주변 지역에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이 안내문에 ‘폐기물’을 ‘패기물’이라고 오자를 냈지 뭡니까. 또 이런 건 못 참는 고약한 ‘직업병’ 때문에 펜으로 ‘패’를 ‘폐’로 고쳐 써놨습니다. 이거 재물손괴로 구속 사유가 되지는 않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