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시민 모두가 전태일이 돼야 한다.
그래서 시민 모두의 전태일이 돼야 한다”
“대한민국 시민 모두가 전태일이 돼야 한다.
그래서 시민 모두의 전태일이 돼야 한다”
  • 하승립 기자
  • 승인 2010.11.08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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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은 민주주의 시대 새로운 시민의 등장
소년 안희정, 청년 전태일을 만나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안희정 충청남도 도지사도 평범한 삶을 살아온 사람 축에 끼기는 힘들다. 아니, 어쩌면 유별난 삶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논산 연무에서 ‘대도시’ 대전으로 유학을 간 고등학교 시절에 본격적인 ‘학습’에 나섰다. <러시아 혁명사>, <노동의 역사>, <역사란 무엇인가?> 같은 책으로 교과서를 대체했다. 그 결과는 고등학교 입학 6개월 만의 제적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 시절에 전태일을 만났다고 말한다. 1980년, 잠깐 동안의 ‘서울의 봄’이 오는 듯 보였지만 광주에서는 대규모 학살이 있었고, 노동자들의 삶은 여전히 신산했다. 그래도 전태일 사후 10년을 맞아 다양한 재조명 작업이 이뤄지면서 소년 안희정은 청년 전태일을 만난다.

‘학생운동을 하기 위해’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에 입학한 그는 그 시절 내내 학생운동의 최전선에 섰다. 하지만 안기부에서의 고문을 견뎌내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면서 ‘2선’으로 물러나기로 하고 국회의원 비서관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만난 초선 의원과 20년을 함께 했다. 그 초선 의원은 후에 대통령이 되었고, 그는 권력의 핵심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를 ‘동지’이고 ‘동업자’라고 불렀던 사람이 대통령의 자리에 있던 5년 동안 그는 단 한차례도 앞에 나서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그토록 존경하고 좋아했던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 이후에야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지방선거에 출마해 도지사가 되었다. 10대에 세상에 분노하고, 20대에 세상을 바꾸겠다고 결심했던 그는, 30대에 한 나라를 경영할 계획을 세웠고, 이제 40대에 차세대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참여와혁신>은 전태일 40주기를 맞아 전태일과 접점을 지니고 있으면서 한국의 내일에 중요한 역할이 기대되는 정치인 몇몇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대부분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했지만 여차저차한 사정들로 인해 미뤄지거나 무산됐고, 결국 안희정 지사의 인터뷰만 싣게 됐다.

도지사 안희정이 아닌 인간 안희정에게 오로지 전태일과 관련된 기억만 물었다. 그가 기억하는 전태일은 어떤 모습일까.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전태일은 민주주의의 상징

언제 처음 전태일을 알게 된 겁니까?

“1980년이죠.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느 차돌멩이의 외침>, 월간 <다리> 지를 통해서 전태일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안희정 지사는 <어느 차돌멩이의 외침>으로 기억했는데 정확한 제목은 <어느 돌멩이의 외침>으로 유동우가 77년에 쓴 노동현장 체험수기다. 월간 <다리>는 DJ계였던 당시 신민당 김상현 의원이 창간한 잡지로 자유와 민권의 수호를 표방했고 많은 지식인 논객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안 지사는 당시의 청계천 일대 피복노동자들의 작업 환경을 생생히 기억했다.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열악한 노동환경이었죠. 지금은 청계피복 공장들이 개량화 됐다고 하는데, 그 때만 하더라도 천, 광목 나르는 지게꾼들이 즐비했고, 한 층을 2층으로 나누고 다다미방으로 해서 미싱을 했었죠. 한동안 서울에 올라오면 늘 그 거리를 배회하곤 했습니다. 없는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그리고 착취 받고 있다고 표현되는 사람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상징이었죠, 전태일 열사는.”

안 지사는 ‘청계천 사람들’과 각별한 인연도 있다. 당시 대학생이던 그의 누나가 박형규 목사가 했던 제일교회의 노동야학이었던 형제야학 ‘강학’이었다. 그는 그 시절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했다.

“그 당시 제 친구들이 청계피복노조 2기였습니다. (청계피복노조 집행부들이) 형제야학의 멤버들이었죠. 우리 누님이 강학이었고, 당시 나는 고등학교 제적 당하고 놀 때라서 노동야학의 학생들과 자연스럽게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성숙이, 경숙이, 영미, 2기 집행부 그 친구들이 나보다 한두 살 많거나 내 또래였거나 그래서 청계피복노조는 내가 노조원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은 지사님이 살아오는 과정에서 어떤 의미였습니까?

“민주주의의 상징이었습니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을 요구한 거였잖아요. 사회주의 혁명을 선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을 보장하라는 것이었죠. 민주주의에 온몸으로 자기를 던졌던 열사고 영웅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단순히 전태일 열사를 노동조합운동의 역사에서만 국한된 노동운동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민주공화국의 헌법에 보장된, 헌법적 권리를 요구했던,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왔던 지도자입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우리 모두가 가해자고 피해자

흔히 관용적으로 전태일 정신이라는 말을 많이들 사용합니다. 전태일 정신이란 대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지나놓고 보면, 기본권에 대한 요구입니다. 더도 덜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계도 아니고, 잘 때 좀 자야겠다는 기본권에서 출발합니다. 인격적인 대우를 받아야 할 권리, 사람으로서 정상적으로, 잠 쫓는 약 먹고 가혹한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은 너무 열악한 것이잖아요.

우리가 말하는 노동3권은 어쩌면 사치스러운 단어입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던 파리한 노동자들이 시커먼 2층 다락방에 앉아서 시다로 있으면서 실밥 나르고, 재단천 옮기고 했습니다. 그런 가혹한 노동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기본권 투쟁입니다. 같은 사람으로서 가슴 아픈 일이고 거기에 대한 공분이었습니다. 헌법으로 보장된 기본적인 권리잖아요. 기본권을 보장하는 헌법 정신, 민주주의 정신을 지키는 싸움이라고 승화해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는 형제야학 친구들을 사귀면서 봤던 현실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봤던 그 때 현실은 인간 이하의 삶이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투쟁 덕분에 청계시장에서의 노동관행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80년, 81년 상황만 하더라도 노조 설립은 불법이고, 빨갱이였고, 해고되거나 쥐어터지거나 그랬습니다. 노조 설립 하는 건 인간적인 대접을 받겠다는 거였습니다.

엄청나게 월급 올려달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기 동의에 의해서 노동이 가능하도록 해야 하고, 비경제적인 요소로, 인격적으로 모독 받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정당한 대가, 정당한 임금 하에 내 노동력이 팔리는 기본이 안 돼 있는 일방적 게임에서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생활상을 방치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투쟁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20, 30년 지난 지금도 노동과 자본의 거래에 있어 노동력 상품을 파는 노동자들이 여전히 불공정하고 불리한 지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2010년 대한민국 사회는 어떻다고 보시나요?

“옛날에는 탐욕스런 자본가 계급과 싸우면 싸움은 간단했습니다. 지금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몸입니다. 지금에 있어 자본주의의 모순은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선악의 단계를 뛰어넘어서 모든 사람이 가해자이고, 모든 사람이 피해자가 되는 상황입니다. 더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을 얻기 위해서 대형마트가 지역 내에 들어오기 원하는 소비자가 존재하고 있고, 소비자들에게 좀 더 값싼 제품을 제공하기 위한 유통업자가 존재하고 있고, 대형마트에 물품을 납품하기 위해 단가를 후려쳐야 하는 제조업이 존재하고, 그것이 더욱 더 질 나쁜 노동시장으로 산성화 시키고, 황폐화시키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삶이 더 불안해지는 악순환 사이클에 우리는 빠져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가해자고 피해자입니다. 누군가 악순환의 고리에서 빠져서 이 상황을 놓고 보면서 즐기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 사람에 대한 미움만으로 문제는 안 풀립니다.”

안희정 지사의 현실 인식. 그는 여기서 목소리에 힘을 줬다.

“산업자본 초기에 자본주의 시장이 정착될 때는 탐욕스런 자본가 계급과 잘 싸우면 될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탐욕스런 자본가 계급과 싸운다고 문제가 안 풀립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탐욕스러운 소비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식을 가진 사람은 내가 주식을 가진 회사가 좀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길 바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은 좀 더 값싼 질 좋은 제품을 소비하려고, 모든 사람은 소비자로서 자기가 선택합니다.

과거에 전태일 열사가 싸웠던 것은 국가권력, 부당한 자본가 계급 권력으로부터 자신의 기본권을 지키는 생존권 싸움이었다면 지금 21세기 전태일 정신의 핵심은, 전태일 정신이 계승되고 그 역사가 흘러간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역사입니다. 지금 분명한 사실은 우리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고서는 기본적으로 우리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그런데 당분간은 (이렇게) 굴러갈 것 같습니다. 이 문제를 궁극적으로 풀려면 세계적 차원의 민주주의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공정 거래, 공정 무역, 공정 상품 이런 것입니다. 이것을 일국 내에서 노동시장에 대한 보호정책,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정책으로 끊임없이 강화해야 하는데, 그것이 일국으로는 무기력합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더 좋은 민주주의를 꿈꾸며

우리는 전태일이 꿈꿨던 사회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희정이 꿈꾸는 사회는 어떤 겁니까?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돈이 사는 것도 아니고, 물질이 사는 것도 아니고, 경쟁이 사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연대와 우애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에는 탐욕이 존재하고, 물질에 대한 요구가 존재하고, 소비와 경쟁욕구가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하는 이상이 돈, 물질, 경쟁, 탐욕을 제거해야만 선한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고 생각 안 합니다. 그것이 조절되는 나라를 꿈꿉니다.

적어도 인간의 탐욕이라고 하는 것, 새로운 것을 소비하고자 하는 욕구가 결과적으로는 경쟁하게 만들고, 더 벌게 하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더 소비하게 합니다. 욕구라는 것을 사람들 사이의 우정, 연대, 사랑, 박애 이러한 것으로 균형을 맞춰줘야 합니다. 이 균형이 없으면 끊임없이 먹으면 먹을수록 더 배가 고픈 탐욕으로, 이 브레이크 없는 전차로 계속 가면 자본주의가 망합니다. 자본주의 뿐 아니라 인류사회가 망합니다.”

그래서 그는 ‘더 좋은 민주주의’를 꿈꾼다고 말한다.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더 좋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탐욕과 시장의 질서를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20세기까지의 국민이 직접 투표를 하고, 독점을 방지하고 전쟁을 방지하는 수준의 민주주의 제도장치만 가지고는 진화된 자본주의와 탐욕의 질서를 통제 못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좋은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합니다. 행정에서의 더 좋은 민주주의, 정치에서의 더 좋은 민주주의, 기업과 시장에서의 더 좋은 민주주의 관행들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전태일 정신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전태일 정신은 민주주의 정신입니다. 한 단계 더 내려가면 인간주의 정신입니다. 물질주의가 아니라 인간주의. 그래서 인간주의, 민주주의 이 보편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전태일 동지는 자기 시대의 그 과제와 맞서서 싸웠던 것입니다. 70년은 헌법을 만든 지 20년 정도 밖에 안 된 시기였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 임금(왕)이라는 이름으로 통치했던 그 시절부터 헌법을 만들어서 대한민국이 운영된 지 20년 밖에 안 된 시절이었습니다. 현명한 임금님, 현명한 목민관 만나서 통치가 잘 되길 바라던 그런 나라로부터, 헌법으로 민주주의 구성의 권리를 규정하고 제도를 통해서 국가가 운영돼야 한다고 선언했던 그 시스템이 20년 밖에 안 됐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지주를 만나서, 좋은 자본가 계급을 만나고, 좋은 군수를 만나고, 좋은 대통령을 만나서 선정을 베풀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바랐던 그런 사고방식을 가졌던 시대입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그는 전태일을 새로운 시민의 등장으로 규정했다.

“그 시대에 헌법과 노동법의 기본적인 권리를 주 장한 것은 어떻게 보면 새로운 시민의 등장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를 법치주의, 또는 인간주의라고 표현한다면, 민주주의 운동의 인류의 역사에서,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전태일 열사는 역할을 해주신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시민권, 시민권의 한 구성요소가 노동권인데 이런 것을 ‘법대로 해라, 내가 다른 것 요구 안 한다, 법에 쓰여 있는대로 줘라, 내가 나를 불쌍하게 여겨달라는 얘기도 아니고 나한테 온정을 베풀어달라는 얘기도 아니다, 법에 쓰여 있는대로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민주주의를,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들어나가는데 전태일 동지의 투쟁은 열여섯 살 청춘의 시기에 굉장히 강렬한 메시지였습니다.”

내 열여섯 청춘의 강렬한 메시지

그래서 모두의 전태일이어야 하고, 모두가 전태일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태일 동지가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만의 전태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한민국 모든 시민은 전태일이 되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이 정도 민주주의 국가로, 어디에 내놔도 독재국가 소리 안 듣는 데는 전태일 동지만큼 기여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시민 모두의 전태일이 되어야 합니다. 시민 모두의 전태일이 되려면 전태일을 보편적인 시민의 요구로 더 확대해석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희정 지사는 인터뷰 시작 무렵에 동희오토, 발레오공조 같은 충남 도내의 갈등 사업장 노조의 얘기를 들어보고 해법을 모색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에 시민 모두가 전태일이 되고, 시민 모두의 전태일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다 하겠다고 했다. 그 약속이 실천에 맞닿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