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태일, 나의 하루는 이렇게 간다
나는 전태일, 나의 하루는 이렇게 간다
  • 배민정 기자
  • 승인 2010.11.08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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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는 애절함과 한없는 분노가 나를 단련시킨다
조그만 햇빛과 조그만 풀빵이 나의 희망

6:00~8:00
아무래도 버스는 고무풍선인가보다. 이미 콩나물시루 꼴인 버스에도 사람들이 끝없이 올라탈 수 있는 것을 보면. 아니, 어쩌면 우리가 고무풍선인가보다. 늙은이와 청년, 소년과 소녀들이 입을 꾹 다물고 사지에 힘을 준다. 납작하게 짜부라지지 않도록, 마침내 터져버리지 않도록. 차창 밖에 젖소를 실은 트럭이 유유히 지나간다. 다섯 마리를 칸막이해서 실은 것을 보고 나는 픽 웃어버린다.

빼곡한 머리들 틈 사이로 평화시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버스가 멈춘다. 아우성이 버스를 뒤흔든다. 나는 사람들의 몸통을 부서져라 밀어내며 좁은 문을 빠져나온다. 얼굴로 밀려오는 찬바람이 이때만큼은 제법 상쾌하다. 평화시장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8:00~12:00
작업장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냄새다. 원단 더미에서 풍기는 포르말린 냄새가 익숙하게, 그러나 매번 아리게 코를 찌른다. 밖이 환한데도 작업장은 침침하다. 눈앞에 매달린 백열전등이 날카로운 빛을 뿜는다. 이 빛에 익숙해진 사람은 밝은 햇살 아래 눈을 뜨지 못한다. 작업대에 몸을 굽히고 있는 열세 살짜리 시다들의 눈은 핏물이 든 것처럼 빨갛다.

재봉대와 시다판들로 꽉 찬 다락방에서 사이사이 끼어 앉은 여공들이 실밥을 뜯고 자크를 단다. 옷감에서 피어오르는 먼지 때문에 어두운 다락방은 더 어두워 보인다. 재봉틀 소리 사이로 기침소리가 발작처럼 울린다. 퇴근 시간까지 이들은 종일 닭장 같은 곳에서 재봉틀을 밟아대는 것이다.

나이 어린 시다들은 재봉일을 하는 틈틈이 미싱사의 잔심부름까지 해야 한다. 이들은 천정이 낮은 탓에 허리조차 똑바로 펴지 못하고 하루에도 몇 십 번씩 다락방을 오간다. 우리 작업장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열세 살 영희가 다락방에서 내려온다. 사다리를 잡은 하얀 팔뚝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이 위태롭다. 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먼지구덩이 속에서 애쓰는 것을 보면 인간이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아이가 기특하기도 하고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원단을 자르고 또 자를 뿐이다.

12:00~12:30
점심시간이 되면 제각기 작업대에 도시락을 올려놓고 가만가만 먹기 시작한다. 뚜껑을 활짝 열어놓고 먹지 못하는 까닭은 먼지 때문이다. 그래도 도시락을 가져온 사람은 형편이 나은 축이다. 밤샘 작업에 자지도 못한 어린 시다들이 점심까지 거르는 경우는 허다하다. 무언가를 사주고 싶지만 나에게도 돈은 없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도 집으로 돌아갈 차비뿐.

열서너 살짜리 시다들이 옥상 담벼락에 쪼르르 붙어 하늘을 보고 있다. 하루 중 유일하게 햇빛을 볼 수 있는 시간이다. 눈자위가 붉은 조그만 얼굴들이 햇빛 속에서 하얗게 빛난다. 누가 조금이라도 웃긴 말을 하면 일제히 깔깔거리는 모습이 눈물겹다. 저 생명들을 누가, 무슨 권리로 짓밟을 수 있으랴.

영희가 알은 채를 한다. 나는 차비를 털어서 산 풀빵을 내민다. 이것 나누어 먹어, 말하니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시다들이 풀빵을 게 눈 감추듯 먹어버리는 모습을 뒤로 하고 나는 평화시장을 내려다본다.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는 공장과 점포들, 얽히고설킨 전선줄,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 풀빵을 사줘도 마음은 조금도 가볍지 않다. 왜 이들은 하루에 14시간씩 일하고도 도시락을 싸올 수 없을까? 이들을 부한 환경에서 밀려나게 한 것은 누구인가? 업주? 노동청? 대통령? 나는 평화시장을, 그 너머의 세상을 노려본다.

12:30~22:00
종일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미싱 6대에 시다가 여섯 명. 되도록 시다들의 일을 덜어주고 주머니, 후다, 싱 같은 것도 풍부하게 잘라두고 싶지만 내 한 몸으로 모든 것을 해내기가 너무 힘들다. 허리가 결리고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그래도 원단에 금을 긋고, 재단기계를 잡고 그은 금 대로 자른다. 누가 잘랐을까? 문득 생각이 들면 역시 내가 잘랐다. 내가 아니라 몸이 일하는 것이다.

변소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만도 2천 명이 넘는데, 공동변소는 3개뿐이다. 늘어선 줄은 도무지 줄어들 줄 모른다. 세수라도 한 번 하면 정신이 좀 들련만.

왜 이렇게 의욕이 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져선 안 된다, 세상을 똑바로 봐야 한다…. 희미한 생각들을 붙잡으려 애쓰고 있으니 영희가 다가와 가냘픈 목소리로 말한다.

“아저씨, 어디든지 주일날마다 쉬는 데를 좀 알아봐 주세요.”

나는 우물쭈물 대답한다.

“글쎄, 보세공장 같은 데 말고는 어디 그런 곳이 드물 거야. 요행히 믿는 사람이 공장을 차리고 있으면 되겠지만, 어디 그런 집엔 자리가 잘 비지 않으니까. 하여튼 빨리 알아보도록 힘써 볼게.”

이렇게 무성의하게 대답하는 내게 영희는 고개를 꾸벅 숙인다. 그 순박한 얼굴이 돌덩이처럼 가슴을 누른다. 어디에 알아보겠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막상 희망을 걸고 알아볼 곳이 어디란 말이냐.

22:00~24:00
차비가 없어 집으로 걸어오는 길은 유달리 정신이 맑다. 몸은 고되지만 이 시간만큼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하늘에 흐드러진 별빛이 아름답다. 아이를 업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이 애처로워 아름답다. 이것을 느끼는 나는 분명 기계 부품이 아니라 인간인 것이다.

지금쯤 영희는 방바닥에 웅크리고 한없이 깊은 잠에 빠졌겠지. 빨갛게 부어오른 두 손을 가만히 얼굴 곁에 모으고 있겠지. 어디 영희뿐이겠나. 이 시대의 수많은 어린 시다들……. 남들이 한창 까불고 뛰놀 나이에 잠 한번 푹 못 자고 허리가 꺾어지도록 일하는 가엾은 동심들. 그들이 잠든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속에 부드러운 사랑과 불같은 분노가 함께 일어난다. 이 심경을 어느 사람과 나눌 수 있을까.

멀리서 통금단속 나온 순경이 나를 부른다. 오늘도 역시 파출소 신세를 지나보다.

*이 글은 ‘전태일 평전’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