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히어로가 되고 싶은 이방인
슈퍼히어로가 되고 싶은 이방인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0.11.08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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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동자이자 트랜스젠더…한국에서 살아가기
“소수자도 똑같은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한 이주노동자가 있다. 이름은 미셸, 나이는 39세. 필리핀에서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안 해본 일 없을 정도”로 돈벌이가 될 만한 것은 열심히 찾아다녔다. 고향을 떠나 한국에 온지 5년, 소규모 제조업 공장을 전전하며 ‘사장님’들의 부당한 차별과 멸시를 경험했다. ‘말이 안 통한다’는 이유로 사장님은 이주노동자들을 사람처럼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강한 사람이었다. 아니, ‘그’는 강한 사람이다.

▲ 미셸 민주노총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위원장.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홀로 싸우는 것에는 한계를 느끼고 2007년 이주노동자노조에 가입했고 2009년 7월 민주노총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Migrants Trade Unions, 이하 MTU)의 위원장이 됐다. 그리고 현재 MTU 위원장이자 민주노총 1번 대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두 개의 소수성…이주노동자·트랜스젠더

지난 8월 미셸 위원장은 이주노동자 강제단속에 항의하기 위해 단식농성을 진행하던 중 12일 만에 토혈 증세로 병원에 실려 갔다. 헬리코박터균으로 인한 위염이 있었는데 단식으로 증상이 심각해진 것이다. 그런데 중환자실에서 응급처치를 마치고 다음날 일반병실로 옮겨야 했으나 그러질 못했다. 이유는 미셸 위원장이 트랜스젠더이기 때문이다. 서류상 여자인 그에게 병원 측은 여자병실로 옮길 것을 요구했지만 성정체성이 남성이라 주장하는 미셸 위원장은 남자병실을 고집했다. 결국 입원 기간 동안 중성지대(?)인 중환자실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아직까지 이주노동자, 성소수자들에게 차별과 편견이 남아있고 극단적으로 배타적이기도 한 한국에서 ‘소수성’을 두 개나 갖고 살아간다는 것. 섣부르게 넘겨 짐작하거나 이해한다고 ‘착각’하지나 않을까 싶어 매우 질문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는 언제, 어떻게 ‘커밍아웃’하게 됐을까?

“별로 감추려는 의도는 갖지 않고 지냈습니다. 내 ‘젠더’의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 부인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한국에 오기 전에도 누군가 물어보면 사실대로 대답해 줬습니다. 공식적으로 커밍아웃하게 된 것은 MTU 위원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입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게 내부에서 논의를 거쳐 나온 결론이었습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미셸 위원장에게 지금은 애인이 없다. 그동안의 ‘로맨스’에 대해 조금 얘기해 달라고 졸랐더니 예전 여자친구에 대한 얘기를 잠시 꺼냈다. 세 명의 여자친구를 만났는데 두 명과는 남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비밀연애를, 가장 오랜 기간 만났던 한 명과는 연애사실을 주변에 ‘오픈’했다고 한다. 언제나 당당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비밀리에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좀 껄끄러운 구석이 있는 데 반해, 서로의 관계에 대해 숨기는 것이 없었을 땐 부담이 없고 참 좋았다고 회상한다.

세 번의 연애를 돌이켜 보면 좋았던 기억, 상처 받았던 것들, 누구나 다들 연애 도중 느껴봤을 법한 감정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것들에 울고 웃었다며, 그렇게 평범하다는 의미로 보면 자신이 “아주 특별한 로맨시스트는 아닌 것 같다”고 미소 짓는다.

지난 농성 기간 동안에는 성소수자 단체인 ‘동성애자인권연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해당 단체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탄압이나 차별이 성소수자를 비정상으로 낙인찍는 것과 다르지 않다’며 연대의 뜻을 전해왔고 모금활동이나 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이에 미셸 위원장도 동성애자인권연대에 정식으로 가입해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소방관에서 사무원까지… 뭐부터 얘기하지?

필리핀에서 일한 경험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부탁하자 “뭐부터 얘기하지?”라고 반문한다. “소방관에서부터 사무직까지 다 해 봤어요”라고 대답하며 킥킥 웃는다. 전자제품 엔지니어, 건설노동자, 집 수리공, 학교 교직원, 상담교사, 비서, 주유원, 쇼핑몰 점원, 가정부, 베이비시터, 유리창닦이…. 생각나는 대로 줄줄 읊기 시작하는 데 나중엔 “오케이, 오케이”하면서 그만 멈추게 해야 할 지경이었다.

여러 직종에서 일을 하면서 열악한 노동환경을 경험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도 많았으나 미셸 위원장은 필리핀에서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 접해볼 기회는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 대부분이 ‘노동조합’하면 빨갱이 내지는 닥치는 대로 파괴를 일삼는 과격분자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아무래도 교육시스템이 낙후해 사람들의 인식이 깨지 못해 그런 것 같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미셸 위원장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 고집이 강하고 부당한 것은 참지 못하는 아이였다”고 회고했다. “정의로운 수퍼히어로를 동경한다”더니 어린 시절 꿈에 대해 묻는 질문에 마치 지구의 수호자처럼 “Saving the world?”라고 농으로 받는다. 꿈이나 이상은 갖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먼저 실천해야 할지를 몰랐는데, MTU에서의 활동이 그 지침이 돼가고 있는 것 같다는 설명이다.

아버지와 남자형제 둘, 조카들, 할머니를 필리핀에 두고 미셸 위원장은 2006년 1월 한국에 들어왔다. 고용허가제로 입국해 3년 동안 일했고 재고용되기 위해 필리핀에 다녀와서 3년을 더 일할 수 있다. MTU 위원장 임기는 내년 2월까지다. 얘기 도중 미셸 위원장은 “12살 난 조카 클라리스와 할머니 아나스타샤가 가장 보고 싶다”며 잠시 필리핀에 두고 온 가족들을 떠올린다.

한국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사장님, 나빠요’로 통칭되는 한국내 이주노동자들의 처우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미셸 위원장도 이미 한국으로 오기 전부터 필리핀에서 그런 사례들에 대해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굳이 한국행을 택한 이유는 미국이나 유럽 등과 같은 지역은 근로 비자를 얻기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인력의 수요가 많지 않아 기회를 잡기 어려운 데 반해 한국은 일하러 오기가 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하러 오기 전 일정기간 동안 필리핀에서 오리엔테이션을 가졌는데, 이미 한국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필리핀 노동자들에게서 안 좋은 사례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노동자들은 다시 한국에서 일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은데, 필리핀에서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그럼 미셸 위원장에게 한국은 어떤 느낌일까?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나 성적소수자들에게 차별과 편견이 남아 있는 거 같습니다. 한국의 문화는 역동적이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부분도 있지만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부분도 있어 매우 대비적이에요. 내가 만나본 한국 사람들은 매우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고, ‘다름’을 포용하며 감싸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친밀하게 대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한국에서 만난 좋은 친구들에 대한 자랑이 이어졌다. 하루에 3, 4시간 밖에 자지 않는 미셸 위원장이지만 최근 일이 너무 바빠 친구들을 그리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고 한다. 해외에 있는 친구들이 많기도 해서 주로 인터넷 채팅을 열심히 한다. 친구들 얘기를 꺼내는 미셸 위원장의 표정은 아주 즐거워보였다. “MTU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친구들과 아주 가깝습니다. 그 친구들이 다시 다른 사람들을 소개해 주기도 하고. 그러면서 점점 친구들이 많아지게 됐지요.”

필리핀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두 명의 이주노동자와는 ‘의형제’라고 부를 정도로 가깝다고 한다. 지금은 경기도 화성에서 일하고 있는데, 서로 일이 바빠 역시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게다가 둘 중 한 명은 최근 결혼했기 때문에 더욱 얼굴보기가 어려워졌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그밖에 소소한 이야기

적극적인 성격의 미셸 위원장은 좋아하는 게 참 많다. 바쁜 일정 때문에 자주 다니지는 못하지만 여유 시간이 생긴다면 국내 구석구석을 여행해 보고 싶다고 한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는 부산이라고 한다. 한 달 정도 긴 휴가가 주어지고 누군가가 여행비용까지 마련해 준다면 아마 제주도에서 머물고 있을 것이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미셸 위원장의 요리 솜씨는 주변에서 다들 감탄하는 수준이다. 국적에 관계없이 처음 시도하는 요리도 레시피만 주어진다면 그럴듯하게 뚝딱 만들어낸다고 한다. 한국 요리는 물론 가끔 친구들이나 주변인들에게 필리핀 요리를 대접하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재료나 양념 등이 다르기 때문에 ‘오리지널 필리핀’ 맛과는 다르다고 한다. 맛이나 향에 대한 감각이 남들보다 좋은 거 같다고 미셸 위원장은 덧붙였다. 그밖에 사진 찍는 것이나 수채화 그리기, 기타 연주도 취미이자 특기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주로 뭘 하느냐는 질문에 “술 마시지요”라고 답할 정도로 술자리도 즐기지만 너무 과음하는 것은 스스로 자제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간 기능이 안 좋아졌기 때문에 예전만큼 많이 마시진 못한다. 그럼에도 술자리에서 대화는 아주 즐겁다고. 주량은 소주로 치면 두 병 정도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주로 위스키처럼 독한 증류주를 좋아하는데, 막걸리 같은 한국 술도 즐긴다고 한다. 코코넛과 열대 꽃술로 만든 필리핀 전통주에 대해 설명하며 “도수는 낮지만 신선하고 마실만 하다”고 덧붙인다.

미셸 위원장은 인터뷰 내내 특유의 낙천적인 웃음을 보이며 즐겁게 얘기를 이어 나갔지만 이주노동자 문제와 관련된 얘기가 나오면 눈빛부터 달라졌다. 개개 사연을 일일이 소개하진 않았지만 아직도 부당한 대우와 차별이 “너무 많다”고 얘기하는 그의 눈빛은 안타깝고 서글픈 기색이 엿보이기도 했다.

한국어를 거의 못하는 미셸 위원장도 정확히 발음하는 ‘사장님’들은 다 악독한 사람들일까? “글쎄…”라고 잠시 뜸을 들이다 “꼭 그렇진 않다”고 답한다. 세 번째 일터인 지금의 성수동 신발공장 사장님은 노동조합 활동을 한 적도 있고 마음에 든다고 한다. ‘악덕 사장님’들도 나름의 변명거리가 있을 것이다. 자본의 질서 속에서 사업장을 지키기 위해 그들도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다.

문제는 “어쩔 수 없다. 결국 그렇지 않나?”라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비롯된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차별이 잘못된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상황을 하나둘 허용하기 시작하면 이는 무관심보다 더 무서운 ‘만성’의 지경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셸 위원장은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을 새롭게 다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존중받아야 합니다. 홈리스, 빈민, 동성애자, 장애인, 비정규직 그리고 이주노동자 할 것 없이 모두 똑같이 말이죠. 모두가 같은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