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걷던 길우리가 걸어보니…
그가 걷던 길우리가 걸어보니…
  • 안형진 기자
  • 승인 2010.11.08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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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전태일 평전’ 속 그 곳들
전태일은 추억이 아니라 현실의 정신
지금 그곳은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아직까지도 수많은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은 ‘전태일 정신’을 이야기합니다. 40년이 흘렀지만 그의 정신은 현실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태일이 남긴 것이라고는 늙으신 어머님과 몇 권의 수기집,그를 기념해 만든 평화시장 앞 흉상 정도입니다. 역사를 움직였지만, 아무것도 남길 것이 없었던 그는 ‘보통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떠난 뒤 40년, 희미해져가는 그의 흔적을 <참여와혁신>이 따라가 봤습니다.

남대문 거리의 천사, 전태일을 만나다

전태일의 흔적을 찾는 첫 여정은 남대문 일대에서 시작했습니다. 남대문은 전태일이 잠시 다녔던 남대문초등학교가 있던 곳이고, 어린 전태일이 동생의 손을 잡고 복잡한 시장 골목을 헤매며 구두를 닦던 곳입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하고 싶었던 전태일은 동생 태삼의 손을 잡고 서울로 올라가 고학할 것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고난으로 가득한 서울 생활 사흘이 시작됐습니다. 전태일은 남대문시장에서 동생 태삼과 함께 밀가루 수제비를 한 그릇 사먹고, 남은 돈으로 구두통과 구두를 닦을 도구를 산 뒤 무작정 거리를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구두통을 메고 거리에 나선 태일은, 구두를 닦자는 손님을 만나는 시간보다도 이미 자기 구역을 차지하고 있는 아이들을 피해 다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손님이 많은 다방이라든가 도심지 고층건물 근처의 구두닦이 구역은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에 거래된다. 구두통 하나만을 들고 거리에 나선 태일은 가는 곳마다 ‘구역’ 아이들로부터 발길질을 당하고 큰 광솔 하나를 빼앗기기까지 했다. 겨우 30원을 벌었을 때 해가 졌다. (전태일 평전 중)

▲ 지금도 남대문 시장의 골목골목은 복잡하기 그지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수많은 먹을거리 사이에서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고, 아무 것도 먹지 못했던 전태일과 동생 태삼은 고립무원의 처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이었지만 존중받지 못하는 그저 남대문 시장을 떠도는 유령과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결국 형제의 서울 생활은 사흘 만에 끝이 납니다. 이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도 전태일은 동대문과 남대문을 떠도는 품팔이 생활을 지속했습니다. 그때 전태일은 인간이면서도 인간답지 못한 자신과 그런 자신을 품어줄 수 없는 야박한 세상에 대한 연민을 가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해에 태일은 남대문초등공민학교에서 남대문초등학교로 편입하는 시험을 치렀는데 여러 응시자들 가운데 그 혼자만이 합격하여 전학을 하였다. 식구는 여동생인 순덕이가 하나 더 늘어 모두 여섯 식구인데, 누구 한 사람 돈을 버는 사람은 없고 게다가 정신이상자(당시 이소선 어머니는 아버지 전상수 씨의 사업 실패로 인해 거의 정신이상자가 되다시피 했다고 전태일 평전은 적고 있습니다)까지 발생하였으니… (전태일 평전 중)

▲ 전태일이 잠시 다녔다는 남대문초등학교는 지금 없어졌습니다. 당시 남대문초등학교가 있었던 자리에는 대한상공회의소가 자리하고 있고, 현재는 남대문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임을 알리는 작은 알림돌이 세워져 있을 뿐입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발걸음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동대문 평화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전태일의 ‘마음의 고향’이며 ‘이상의 전부’인 어린 동심의 삶터. 전태일이 보낸 그 많은 시간과 공상을 함께 했던 그 곳을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태일은 아무리 피곤해도 집에 오면 이소선에게 이것저것 캐물었다. 이소선이 말을 하면 ‘그랬군요’, ‘힘드셨겠네요’, ‘잘하셨어요’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태일이도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이소선에게 빠짐없이 이야기 했다. 태일은 옳은게 무엇인지, 그른게 무엇인지 조리 있게 말할 줄 알았다. 어린 여공들이 졸린 눈을 비벼가며 일하다 다리미에 화상을 입은 일이며, 먼지가 많은 곳에서 일하다 보니 폐병에 걸려 피를 쏟으며 병원에 가는 이야기, 작업반장에게 욕먹고 훌쩍이는 이야기…. 태일에겐 그 모든 것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오도엽 저)

▲ 동대문 어린 시다들을 향한 자신의 열정을 끝내 새하얗게 불태웠던 그 자리에는 아직 평화시장이 있습니다. 새롭게 물길이 난 청계천 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납니다.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만든 전태일의 흉상과 바닥에 깔린 동판은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 사이를 공기처럼 떠다닙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쌍문동 208번지평화시장을 지나 과거 전태일이 자신의 차비로 풀빵을 사서 여공들에게 주고 걸어왔을 법한 그 길을 따라 쌍문동 208번지로 향해봅니다. 맑은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대학로를 지나 돈암동 - 수유리 - 미아리 - 쌍문동을 지나는 길입니다. 4호선 지하철로 여덟 정류장인 그 길은 생각보다 길었습니다. 통행금지 단속에 나선 야경꾼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합니다.

짧아진 가을해는 걸음을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짧아진 해를 핑계로 택시를 잡아타고 전태일이 살던 곳, 쌍문동 208번지로 향했습니다. 그곳은 이미 재개발되고도 한참이나 시간이 지났습니다. 삼익아파트 112동. 그 자리에 전태일이 살았습니다.

쌍문동 208번지는 공동묘지였다. 이재민들은 시멘트 블록을 사다가 무허가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지붕은 슬레이트나 루핑으로 덮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타이어나 돌을 지붕위에 얹었다. 가끔 철거반이 들이닥쳐 무허가 집을 부수고 갔다. 태일이는 철거반원이 온다는 말이 돌면 집을 미리 해체해 놓았다. 한번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철거반이 들이닥쳤다. 막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서던 태일은 부랴부랴 집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철거반을 지휘하는 반장이 태일이한테 오더니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물었다.“철거당하기 전에 미리 집을 해체하는 거예요. 반장님도 어디 헐고 싶어 헐겠어요. 위에서 시키니 하시는 일일 것이고, 저희는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집을 지어야 하고요. 괜히 다퉈봤자 벽돌만 부서질 테니 미리 내려놓는 거에요.”태일의 말을 들은 철거반장은 반원들에게 지시했다.“이 집은 망치로 부수지 마. 벽돌이 깨지지 않게 조심해.”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중 - 오도엽 저)

▲ 그 집 쌍문동 208번지에서는 동대문에서 일하는 재단사들이 여러 번에 걸쳐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전태일이 떠난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곳을 찾아왔습니다. 대한민국 노동운동이 힘차게 다시 태동했던 그 곳 쌍문동 208번지에 새로 지어진 삼익아파트에는 지금도 동생 전태삼씨가 살고 있습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40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전태일을 추억할 도구를 찾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가 남긴 뜻과 정신뿐입니다. 그의 이야기가 세월이 흘러 조금씩 잊혀지는 ‘보통 사람들’의 역사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남겨진 과제가 아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