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은빛 넘실대는 ‘칼의 노래’
금빛·은빛 넘실대는 ‘칼의 노래’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0.12.0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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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은 살상 무기?…그 어떤 화려한 예술품 못지않아
맥 끊긴 전통기술 복원은 그야말로 ‘산 넘어 산’
[명장열전] 환도장 홍석현 선생

▲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십여 년 전, 인사동에 ‘나이프 갤러리’라는 곳이 생겼다 해서 기자는 호기심에 찾아가 본 적이 있다. ‘벤다’라는 칼의 기능에 서늘하리만큼 충실한 모습의 각종 일본도를 비롯해 장미꽃처럼 아름다운 문양이 검신(劍身)에 은은하던 다마스커스 검, 중세 서양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영화에서 봤음직한 롱 소드(Long Sword)와 바스터드 소드(Bastard Sword)까지. 크고 작은, 다양한 종류의 세계 각국을 대표할 만한 칼이 전시돼 있는 것을 매우 흥미롭게 구경하고 나왔던 기억이 있다. 물론 연필 깎는 주머니칼만한 것이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것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리 당시를 떠올려 봐도 우리의 전통 도검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분명 외국의 유명한 도검들과 함께 우리의 칼도 전시돼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영화나 역사드라마에서도 우리 도검이 많이 등장했을 텐데 딱히 어떤 모습인지 머릿속에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사무라이들이 쓰는 일본도의 생김새는 바로 기억이 나지만 이순신 장군이 썼다는 장검의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같은 검명은 기억나도 어떻게 생겼는지 잘 그려지지는 않는다.

▲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환두대도, 미인의 모습처럼 잊히지 않는 빼어난 자태

“직접 칼을 한번 보고 얘기해야지요.”

환도장 홍석현 선생(57)과 점심식사를 하며 선생이 복원한 우리 전통 도검에 대해 섣불리 이것저것 묻다가 기자는 찔끔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부터 사용했다더라’,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다더라’, ‘칼의 부위마다 이런저런 의미가 있다더라’ 등의 피상적인 지식들만 주워섬기려다 일도양단(一刀兩斷)된 꼴이다. 어떻게 생긴 칼인지 머릿속에 그림도 제대로 그려지지 않으면서 말이다.

유리 전시관에 보관된 선생의 복원 작품은 감탄이 절로 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묘인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된 환두대도(環頭大刀) 복원품은 ‘예술’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인상적인 외형이었다. 말마따나 ‘일단 한번 보고’나니 며칠 동안 그 매력적인 자태가 눈앞에 어른거릴 정도였다.

▲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환두대도는 기본적으로 곧게 뻗은 직도의 형태다. 따라서 베기보다는 찌르기 용도로 쓰였을 것이라고 선생은 설명했다. 피나무로 만들고 삼베를 두른 다음 까만 옻칠을 한 검집은 포마이카 코팅이라도 한 것처럼 반짝이고 윤이 나지만 합성수지로 도저히 보여줄 수 없는 깊은 광택과 색감을 지니고 있다. 검집의 한 가운데에는 은으로 섬세하게 X자로 세공한 장식이 길게 늘어져 검은 옻칠과 은빛이 강렬하게 대비된다.

칼자루에는 은사(銀絲)와 금사를 촘촘히 감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일이 실 한 가닥마다 올록볼록한 문양을 새겨 넣을 만큼 놀랍도록 손이 많이 간 것을 알 수 있다. 칼자루의 끝부분인 뒷매기에는 금으로 둥근 고리를 달고 가운데에는 용머리 장식을 넣었다. 환두대도라는 명칭은 바로 이 뒷매기의 ‘환두(環頭)’ 장식이 특징이기 때문에 붙었다.

조선 왕실의 사인검(四寅劍)을 검집에서 뽑아보면 검신에 상감된 무늬가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사인검은 인년 인월 인일 인시, 인(寅)자가 네 번 겹쳐질 때 쇳물을 부어 만드는 칼로 국가의 위기나 사특함을 베어 물리친다는 벽사(요사스런 귀신을 물리침)의 의미를 담고 있다. 불과 두 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동안 쇳물을 붓고 두드려 칼의 몸체를 만들어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십이지 중 호랑이(寅)는 동물의 왕이라고 불릴 만큼 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에 양기와 신령스러움을 상징한다. 유난히 미신에 관심이 많았던 연산군은 인시 동안 200자루의 검을 만들도록 지시했다는 기록이 문헌에 남아있다고 한다. 사인검에 대해 설명하며 화색을 띄는 선생의 두 눈은 호랑이 눈(虎眼)처럼 부리부리한 기운이 살아 있다.

▲ ⓒ 홍석현

검신의 한 면에는 국난을 헤쳐 나간다는 의미의 주문이 전서체로 음각돼 있으며 새겨 넣은 글자마다 일일이 금사를 다져 박아 넣은 상감기법의 정수를 보여준다. 검신의 반대쪽 면에는 28성숙(별자리)도를 그려 넣었다. 딱히 접착 기술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바깥보다 안쪽을 깊게 새겨 넣은 홈 때문에 절대로 박아 넣은 금이 빠질 수 없다고 한다.

단순히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금과 은처럼 귀금속이 많이 쓰이고 제작과정도 복잡한 데다 고도의 공예기술이 없으면 제작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 자루의 검을 제작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값도 그만큼 고가다.전통검의 복원 작업 이외에도 구매를 원하는 사람들로부터 주문을 받아 제작하기도 하는데, 어떤 칼이냐에 따라서 백만 원을 넘어가는 가격에서부터 수천만 원, 수억 원의 값을 호가하기도 한다고 선생은 밝혔다.

▲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나전칠기 공예부터 시작해 환도장이 되기까지

195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홍석현 선생은 열네 살이 되던 1968년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나전칠기 공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1983년 경, 선배의 권유로 도검 제작 일을 처음 접하게 됐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전통적인 도검 제작 기법은 맥이 끊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고 선생은 회고했다.

도검 제작에 있어서 어떤 점이 가장 어렵냐는 질문에 선생은 “모든 과정 과정이 다 어렵지만 특히 철을 다루어야 한다는 점이 가장 어렵다”고 답했다. 시행착오를 반복하기도 하고 장인들의 후손 등을 찾아가 한 수 가르침 청하기를 십 수 년, 겨우 그제야 도검을 보는 눈이 틔는 거 같았다고 한다.

칼을 보는 눈이 틔니 또 다른 어려움이 닥쳐왔다. 아무리 애를 쓰고 작업을 해도 도무지 완성된 작품들이 성에 차지 않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도검의 재료인 쇠를 제련하는 야철장과 직접 칼을 만드는 환도장이 구분되어 있었으나 전통 기술의 맥이 끊어진 지금은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도맡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선생도 처음 도검 제작을 시작했을 당시엔 기술자들을 데려다가 작업을 시켜봤다고 한다. 그러나 스테인리스 스틸을 프레스기로 찍어서 만드는 일반적인 칼들과는 달리 쇠를 접고 단조해야 하는 전통 도검의 제작에 기술자들이 일하는 방식은 좀처럼 맞지 않았다.

“뭐가 되질 않더라고. 별 수 없었지 뭐~ 내가 혼자서 하나하나 허는 수밖에….”

한국의 전통 도검 중에서 진짜 중 진짜는 환두대도라는 생각이 들자 선생은 “저걸 한번 복원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도통 칼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박물관에 남아 있는 유물이라 봤자 부식돼 조각조각 나 있었기 때문에 전체의 모습이 어떤지, 어떤 느낌인지 막연히 짐작해야만 했다.

“집을 지을 때도 설계도면이 있어야 기와집을 짓든 5층집을 짓든 할 거 아녀? 근데 다 삭아뻐려 갖고 머리 한 토막, 날 한 토막, 이렇게 남아 있는 데 전체 그림이 그려져야 말이지. 당최~.”

날마다 박물관에 가서 전시 창에 코를 박고 칼을 들여다보는 것이 일이었다고 선생은 말했다. 결국 박물관 측에서 실측도면 같은 것을 구해주기는 했으나 도검 제작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됐을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고 고백했다. 그렇게 애 쓴지 십년이 넘어서야 서서히 눈이 틔어 어떤 기법을 사용했는지, 이 부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오더라는 설명이다.

▲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장인은 밥 안 먹고 사나”…전통 복원만큼 중요한 기술인 우대

지난 2001년 홍석현 선생은 무령왕릉 환두대도를 복원해 전승공예대전에서 장려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에는 가야 단봉 환두대도로 같은 장려상, 지난 2003년에는 조선시대 사인검을 재현해 대통령상을 받았다.

앞서 말한 전승공예대전 수상 작품을 비롯해 김유신의 용봉 환두대도, 조선 왕실의 운검, 별운검, 곽재우 장군검 등 선생이 재현한 우리 전통 도검은 8종에 이른다. 선생은 칼 한 자루를 만들기 위해선 무엇 하나 빠지는 기술이 있으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우선 칼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쇠의 경우 전통 단조와 열처리 기법이 필요한 것은 물론, 문자나 문양을 새겨 넣을 수 있는 금속 상감기법, 칼자루나 칼집을 제작하기 위해선 목공예기술과 옻칠, 자개 기법, 이런저런 장식을 위해 다양한 금속공예나 가죽공예 기법이 필요하다. 그야말로 전통공예가 총 망라돼 있는 것이 한 자루의 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은 “거의 종합예술의 경지라고 생각한다”고 확언했다. 그것도 각각의 공예기술에 이만저만 능통해서는 시도조차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이렇듯 전통 도검을 제작하는 일은 고되고 배고픈 일이라며 선생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도검 만드는 것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제자를 돌려보낸 일도 있다고 한다. 평범한 손재주로는 아무리 오랜 세월 노력을 한다고 해도 경지에 오를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다른 일을 찾아 밥벌이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우리 전통 기술의 맥이 끊기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겉으로야 누구든 안타까워 할 테지만 막상 고생문이 훤한 그 일에 인생을 거는 사람이 흔하겠냐는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인들에겐 전통을 잇는다는 일종의 사명의식 같은 게 요구되는 한편, 정부나 기술전승협회 등 단체의 지원도 시급하다고 선생은 덧붙였다.

선생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전통 도검 제작소의 한 편에 새로 화로를 만들고 전통 방식인 사철을 녹여서 검을 만드는 일을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다만 칼 한 자루분의 쇠를 녹여내고 열처리하는 작업에 숯이 한 트럭 넘게 들어가는 데 이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작업 착수가 늦어지고 있다고 한다. 선생께 일을 배운 수제자 역시 밖으로 내보내 다른 일로 생계를 잇게 했다. 전통 도검의 맥을 잇는 무거운 짐은 본인이 질 테니 살 길을 찾으라고 얘기했다며 선생은 허허롭게 웃었다.

▲ ⓒ 홍석현
칼은 마음의 수양을 비추는 거울

수십 년 칼 만드는 일에 매진한 홍석현 선생에게 “칼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을 했다. 칼은 내 마음의 수양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더 이상 칼싸움을 하고 다니는 시대가 아니잖여? 물론 이 칼이라는 것이 본래 무기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장인들은 거기다 정신이나 의미를 불어 넣을 수 있어야 하는겨. 칼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 항상 스스로를 되짚어보려는 노력, 이런 칼의 정신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글공부를 하는 선비들도 몸에 칼을 가까이 지니고 마음 수양을 했던 거여.”

티끌 한 점 없이 거울처럼 맑고 투명한 도검도 관리를 안 하고 방치해 둔다면 쇠로 만든 것이니 만큼 녹이 슬게 마련이라고 한다. 또한 검신을 직접 맨손으로 만지거나 해도 녹이 슬기 때문에 항상 한 손에 깨끗한 수건을 받쳐 들고 봐야 한다고 선생은 덧붙였다.

선생은 현재 전통 도검을 복원하는 작업 이외에 주문을 받아 칼 제작을 하기도 한다. 주로 검도를 수련하는 사람들이 구매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끔 명검을 가보로 간직하기 위해 주문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홍석현 선생은 “특정 목적으로 연월일시를 맞춰 제작한 사인검 뿐만 아니라 장인이 혼과 땀을 불어 넣은 좋은 칼은 영험한 기운을 띄기 때문에 가까이 두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특별히 주문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밝혔다. 도검 자체가 최상급 공예품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심미적인 가치가 뛰어난 것은 물론이다.

도검을 제작하는 것 이외에 정식으로 검법이나 도법을 수련하시기도 하냐는 질문에 “황학정 등지에 나가서 궁시를 즐기기는 하지만 딱히 무예 수련을 하진 않는다”고 선생은 답했다. 수십 년을 칼을 만져왔는데 아무리 그래도 어지간한 고수들보다는 아마 발검(拔劍)하는 속도가 빠르지 않겠냐며 호탕하게 웃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선생은 맥이 끊긴 전통기술에 대한 안타까움과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웬만큼 해결됐음에도 아직까지 그에 대해 무심한 세간의 시선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특히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 한반도를 거쳐 철기문화가 전래됐음에도 도검 제작 기술을 훌륭히 전승하고 세계적인 수준의 문화 기호로 승화시킨 면과 비교하면 안타까움이 더 크다고 한다.

“우리 민족은 동이(東夷)라고 불렸을 정도로 활에 뛰어났지. 그래서 우리 전통 각궁은 옛날부터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성능을 자랑했고 그 기술도 맥이 안 끊기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겨. 거그 비해 도검을 만드는 기술이 실전돼 버린 건 참말 아깝기 그지없는 일이여. 나처럼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서 전통 칼 복원한다고 맨주먹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앞으로는 없어야 디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