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누이들이 있었다
그곳에 누이들이 있었다
  • 참여와혁신
  • 승인 2010.12.05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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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로 인해 시작된 과거여행…거기서 발견한 나
우린 살아서 싸워야 한다
[내 인생의 전태일 13]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이창근 기획실장

▲ 이창근
2001년 쌍용자동차 입사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 당시 언론담당 기획부장
2010년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기획실장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기억의 한 편으로 애써 밀쳐뒀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왜 노동운동을, 그리고 지금도 차가운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을까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변을….

그러니까 불과 몇 달 전이다. 쌍용자동차 파업으로 2009년 8월 6일 구속 수감 된 후 6개월 만에 출소해 보니 여전히 상황은 그대로였다. 아니 좀 더 악화된 느낌마저 들었다. 아들 녀석의 심리상태에 마음이 쓰인 건 한참 후의 일이다. 5살배기 아들 녀석은 명랑하고 쾌활하다. 눈썰미가 있어 곧잘 남들의 행동과 말투를 따라해 주변의 칭찬을 듣곤 했다.

그러던 녀석의 성격과 말투가 많이 바뀌어있었다. 2009년 공장 안팎에서 벌어지던 살풍경 때문이란 것을, 4살짜리 아이의 눈과 귀와 몸으로 체험한 쌍용차 강제진압과정은 분명 트라우마로 남을 것임을 확신하게 되기까진 시간이 꽤 흘렀다.

강자가 되고 싶어서일까. 아이는 경찰놀이를 하고 고함과 화난 표정을 자주, 그것도 사람을 당혹스럽게 할 정도로 주변을 의식치 않고 불쑥불쑥 해 댔다. 아내와 상의 끝에 청소년 심리 상담센터를 찾았다. 조합원 가족들의 심리 상담과 그에 따른 일정만 고민하던 내겐 이 상황은 분명 당황스러웠다.

다시 내 누이에게 돌아가다

아이의 심리 상담과 치유를 목적으로 방문한 센터에서 나는 뜻밖에 골목 귀퉁이에 쪼그려 앉은 자신을 발견했다. 나에게 문제가 있으며 나 또한 치료가 늦어선 안 된다는 다소 충격적인 상담결과를 접하고 한동안 멍했다. 그로부터 나에 대한 심리 상담이 시작됐다. 성장과정에서부터 하나하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같았던 상담과정에서 나는 뜻밖에 내 누이들을 만났다.

내 누이는 다섯이다. 시골에서 아들 낳겠다는 신념으로 자식 일곱을 보게 된 부모님 덕분이다. 어렵고 고단한 시골 생활은 누이들을 고향에 있게 하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하고 서울에서, 부산 신발공장에서 누이들의 아리따운 청춘은 지나갔다. 명절이면 선물 보따리와 함께 수출용 신발을 받아 기뻐 날뛰던 내 모습, 햇수가 지나며 시골 논밭이 늘어나는 기쁨으로 즐거워하시던 부모님의 모습 뒤엔 내 누이의 눈물과 고단함이 배어있었다. 잔업과 철야를 밥 먹듯 하곤 또다시 지친 몸을 이끌고 야간고등학교를 다녔을 내 누이가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 곁에서 평범한 고등학교를 다닌 또래들의 구김살 없는 표정이 내 누이에겐 여전히 없다. 그래서일까 누이들은 지금도 예전의 일들을 잘 말하지 않는다. 이 누이들에게 노동의 ‘신성함’을 나는 아직 말할 자신이 없다. 누이에게 내가 느꼈던 건 연민이었던 것 같다. 딸과 아들의 차이, 시대의 차이는 나의 연민을 더욱 부채질했다.

전태일이 느꼈을 연민을 나는 내 누이들에게서 발견했다. 여공들의 고단한 삶을 자신의 문제로 아파하는 성찰은 체험으로부터 발화되고 있었다. 내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누이들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상담 결과는 운동을 지속하게 만든 이유까진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전태일이었다. 내 나이 21살, 전태일을 처음 만났다. 경상도 출신인 내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친구 녀석과 모란공원엘 갔다. 지금도 왜 갔는지는 명확치 않다. 그냥 그래야 하는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1년 뒤 평전을 읽었다. 신경숙의 소설이 내 누이들의 이야기였던 것처럼, 전태일을 통해 내 누이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작은 청년의 저항과 고뇌와 깊은 성찰로부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꽤나 심각히 고민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또 시간은 흘렀다.

날마다 다시 전태일을 기억하자

2009년 쌍용자동차 공장점거파업. 질식할 것 같은 갇힌 공간, 숨 막히는 정권의 살인적 탄압 앞에 몸을 던져서라도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수많은 노동자들 머릿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부끄럽게도 ‘아이와 가족과 미래가 있지 않냐’는 나름의 변명거리가 내겐 있다고 생각했다. 폭력적인 공권력과 5시간이 넘는 싸움을 하면서 허기를 느꼈다. 배가 고팠다.

전태일을 각오한 수많은 전태일은 전태일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분신항거라는 일면만으로 전태일을 기억하려는, 평전을 오독한 우리들의 무지몽매가 아니었을지. 노동자를 위해 이미 자신의 몸을 던진 전태일. 이런 전태일로 인해 우리는 살아서 싸워야 하는 운명이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나를 버린 전태일 또 다른 나를 갈구한 전태일을 우린 기억해야한다.

인간 사랑의 살아있는 현재며 마르지 않는 투쟁의 샘물인 전태일을 우린 기억하고 학습해야 한다. 자본과 정권의 탄압으로 비로소 자신의 발목에 천형처럼 달려있는 비정규직의 족쇄가 보이기 시작한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다. 아니, 근로기준법 준수하라는 전태일의 외침을 반복하고 있다.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전태일의 소망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침을 외면한다면,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던 전태일의 연대를 망각하는 것이다.

전태일은 이렇게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녹아있고 살아있다. 방법이 아닌 방향과 지향을 알게 한 전태일이 오늘 가슴 저리게 고맙고 또 고맙다.

쌍용차 정리해고 과정에서 숨진 아홉 분을 기억합니다. 그분들의 뜻이 왜곡되지 않기 위해 싸우고 또 두 손 모읍니다.

뱀꼬리.

아이는 건강하게 잘 치료 받고 있고, 누이들은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누구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