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 노총의 정치방침, 지속될 수 있을까?
양대 노총의 정치방침, 지속될 수 있을까?
  • 정우성 기자
  • 승인 2010.12.0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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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적 지지와 정책연대…언제 좌초될지 모르는 난파선
독자적 정치세력화란 이상과 현실
Special Report 노동계 정치활동 잔혹사 ① 역사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뜬금없이 노동계의 정치 활동사와 현재 제기되고 있는 문제점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방선거를 통해 등장했던 민주노총의 진보진영 단일화와 반MB연대, 그리고 한국노총의 정책연대는 각 총연맹에서 내부적 비판에 봉착하고 있는 현실이다. 특히 노조법 개정 과정에서 등장한 한국노총의 정책연대 파기 움직임과 민주노총의 진보정당 단일화론은 그 현실적 결과에 대한 평가와 함께 향후 노동운동의 또 다른 논쟁거리로 남을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이들이 주장하고 있는 정치방침의 근원, 즉 역사적 변천 과정과 현재 논의되고 있는 논란을 되짚어 보는 것은 지금 시기 상당히 유의미하다고 판단된다. 단지 2012년 총선에 대한 대비용이 아니라 현재 각 총연맹이 추구하고 있는 정치방침이 어떤 형태로 전개될 것인가를 예측하는 것도 또한 흥미있는 일이라고 보인다.

배신당한 노개투, 정치세력화 필요성 절감

민주노총의 정치운동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노동자 정치세력화’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노동자를 정치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정당을 만들자는 주장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출발은 1987년 대통령선거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6월 항쟁 이후 이어진 대통령선거 국면에서 재야 운동진영은 비판적지지론, 후보단일화론, 독자후보론(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등을 각기 내세웠다. 그중 독자후보론을 주장했던 이들은 백기완 씨를 대통령후보로 내세워 선거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독자후보론은 대통령선거 이후 활발한 진보정당 건설 움직임으로 이어졌고, 민중의 당, 한겨레민주당, 민중당 등이 1990년대 초반까지 생겨났다가 해산됐다.

1995년 공식 출범한 민주노총은 1996~1997년 ‘노개투 총파업’을 거치면서 “산별노조와 진보정당이라는 두 개의 조직적 무기를 갖추자”고 주장하게 된다. 이른바 ‘양날개론’이다. 산별노조는 대중투쟁을 조직하고 진보정당은 의회에서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대표한다는 것이 양날개론의 핵심이다.

1996년 12월 신한국당이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키자 민주노총은 한국노총과의 연대 총파업을 통해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을 무효화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이른바 노동법개악저지투쟁(노개투) 총파업으로 ‘정치파업’을 통해 법 개정을 무력화시킨 대표적 사례이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그로부터 2달도 채 되지 않아 정치권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아야 했다. 1997년 3월 정리해고 법제화, 변형시간근로제 도입,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무노동무임금 인정, 위원장 직권조인 보장, 해고자 조합원 자격 제한 등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보면 수많은 ‘독소조항’을 포함한 노동법이 여야합의로 국회에서 통과됐다.

노개투 이후, 민주노총 내부에서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진보정당의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노개투를 통해 노동자를 대표할 정치세력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민주노총은 그해 3월 대의원대회에서 ‘1998년 지방선거 적극 대응 - 1998~1999년 정당건설 - 2000년 국회진출’로 이어지는 정치방침을 결정했다.

민주노총이 정치방침을 결정하고 정치 대응과 정당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서자, 그때까지 지지부진했던 진보정당 건설 움직임도 활기를 띠었다. 1992년 대통령선거 이후, 진보정당 건설 논의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런 상태로 또다시 1997년 대통령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짧은 영광, 진보정당의 첫 원내진출

19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노총은 민중운동진영과 함께 대통령선거 대응기구로서 ‘국민승리21’을 출범시켰다. 국민승리21에는 민주노총뿐만 아니라 전국연합, 진보정치연합 등 민중운동단체가 참가했다. 그리고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대통령후보로 내세웠다.

하지만 시험보기 직전에 벼락치기 공부를 한다고 성적이 쑥쑥 오르지 않는 것처럼, 선거를 불과 2달 앞두고 급조된 국민승리21이 대통령선거에서 큰 성과를 내기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민주노총이 3월 대의원대회에서 정치방침을 결정했지만, 그 정치방침이 실제 국민승리21이라는 결과물로 나타나기까지는 6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다.

게다가 민중운동단체들이 대통령선거라는 단일한 이슈로 결집하기는 했지만 이들의 생각과 활동방식은 천차만별이었다. 급조된 조직이었던 만큼, 선거에 대한 준비가 돼 있지도 않았다. 이런 준비부족과 내부 이견은 선거 과정에서의 혼란으로 나타났다.

‘일어나라! 코리아’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국민승리21은 그해 대통령선거에서 30만여 표, 1.2%의 득표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연초의 노개투 총파업에서 나타났던 폭발적인 참여와 지지가 대통령선거에서의 표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대통령선거 이후 진보정당 건설 논의가 활발히 진행됐다. 그리고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이 창당됐다. 그해 4월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출마지역에서 평균 13.1%라는 만만치 않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2년 후 2002년 지방선거에서 기초자치단체당 2명과 비례대표를 포함한 광역의원 11명을 당선시킨 민주노동당은, 그해 대통령선거에서 다시 권영길 대표가 후보로 출마해 98만 표, 3.98%의 득표를 기록했다.

그리고 2004년,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에 성공했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에서 8.13%의 정당 득표율을 기록해 지역구 2명, 비례대표 8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켰다. 1997년 노개투 당시, 단 1명이라도 국회에서 노동자를 대변해줄 사람이 아쉬웠던 민주노총은 한꺼번에 10명의 노동자 출신, 또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국회의원을 가지게 됐다. 2004년 총선은 민주노총의 정치운동사에 영광의 한 페이지로 기록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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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의 분열, 그리고…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원내 진출 이후 들뜨고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던 민주노동당은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최대의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권영길 대표가 다시 한 번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지만 결과는 앞선 2002년 대통령선거 결과에 훨씬 못 미쳤다. 권영길 대표는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71만 표를 득표했다.

2004년 총선 이후 한때 19%에 이르는 정당 지지율을 기록했던 민주노동당은 불과 3년 사이에 지지율 하락을 경험해야 했다. 이렇게 된 원인을 놓고 민주노동당 내부에서는 격렬한 이념논쟁이 터져 나왔다. 대통령선거의 책임을 지고 당 지도부가 사퇴한 가운데, 심상정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비상대책위원회는 기존 자주파 당 지도부의 이른바 패권주의와 종북주의를 비판하며 쇄신안을 내놨지만, 당의 다수파인 자주파는 이를 당대회에서 부결시켰다. 심상정 비대위원장 등 다수의 평등파 당원들은 쇄신안 부결 이후 민주노동당에 미래가 없다며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했다. 이로써 2000년 대다수 민중운동진영의 참여와 지지 속에 출범했던 민주노동당은 출범 8년 만에 분당됐다.

분당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5.68%의 정당 득표율을 기록해 지역구 2명, 비례대표 3명의 국회의원이 당선됐다. 반면 진보신당은 정당 득표율 2.94%를 기록해 한 명의 국회의원 당선자도 내지 못했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총은 여전히 민주노동당 배타적지지라는 정치방침을 유지했다. 일부에서는 민주노동당이 분당됨에 따라 배타적지지가 더 이상 적절치 않다며 정치방침 수정을 요구했으나,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정치방침을 어떻게 결정했든, 활동가들은 자기가 속한 정파의 입장에 따라 각자가 알아서 선거활동을 펼쳤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 배타적지지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정치방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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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총, ‘정치적 중립’을 탈피하기까지

한국노총은 오랜 역사에 버금가게 많은 변화를 겪어 왔지만 지배적 정당과의 연대라는 차원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1946년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으로 출발한 한국노총은 처음 시작부터 정치와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해방 이후 설립 당시부터 좌익 조직인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에 대항하기 위해 우익 인사들로 구성된 대한노총은 이승만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출발했기 때문에 자유당의 전신인 한국민주당 시절부터 정권과의 연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한국노총이 초기에 추구했던 ‘노동조합의 정치적 중립’은 강령에만 언급되었을 뿐이며 정부나 여당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에 반발했던 일이 전혀 없었던 것 또한 아니다. 실제 한국노총은 이미 1963년에 노동자들의 정당을 구성해야 한다며 한국노총 내 일부 산별연맹 위원장을 중심으로 민주노동당(2000년 창당한 민주노동당과 같은 이름) 창당 준비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과 한국노총 상층 지도부의 만류와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한국노총 내부에서도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모색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던 한국노총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영향 하에서 1988년, 정치활동 전담기구를 상설 운영할 것을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결의한다. 이제까지 정치방침이었던 ‘중립’이라는 입장을 탈피해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정치권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1년 한국노총은 지방자치단체 선거, 총선, 대통령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노동자 출신의 정계 진출을 지원하며 독자적 정당 결성을 추진한다는 ‘90년대 한국노총의 운동기조와 활동방침’을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채택한다.

이러한 정치방침은 90년대 들어 더욱 확장돼 19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희망의 21세기를 한국노총과 더불어’라는 정치활동 계획과 대통령 선거 전략을 확정·발표한다. 당시 ‘정치활동 플랜’에 따르면 한국노총은 2004년 독자정당 건설을 목표로 1997년 대통령선거와 2000년 총선에서 정책 연합 혹은 정당과의 제휴를 통한 정치권 진입을 당면 목표로 설정했다.

이에 따라 19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한국노총은 4차례에 걸친 주요 후보별 조합원 여론조사를 실시해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를 공식 지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치위원회가 정책연합 여론조사 결과에 따른 정책연합 대상자를 발표하지 않고 ‘친노동자 후보’라는 애매한 기준만 제시해 한국노총 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결국 대상자를 발표해야 한다는 내부적 압력에 의해 당시 박인상 위원장은 개인 명의로 “김대중 후보를 유일한 대안으로 보고 당선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할 것”이라고 밝혀 김대중 후보 지지를 공식화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녹색사민당의 실패와 정책연대로의 회귀

97년 확정된 정치활동 플랜에 따라 한국노총은 2002년 11월 전국대의원대회에서 한국민주사회당(민사당) 창당을 결의한다. 그러나 민사당은 2002년 대선에서 한국노총의 정치방침과 활동의 혼선으로 인해 후보조차 내지 못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이는 정치활동 플랜에 따라 급조된 민사당으로서는 애초부터 예상됐던 문제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노총은 선거전략과 관련해 중앙 정치방침이 하부 조직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각 지역 본부, 조합원들의 정치활동이 제각각 이루어져 혼란만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에 한국노총 중심의 민사당은 대중적 정당으로서의 모습보다는 한국노총 조직에 의존한 정당이라는 문제점도 노출했다. 또한 조합원과의 소통 부재로 정치방침 자체에 대한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된 점도 뼈아팠다.

그러나 한국노총은 이후에도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 2003년 민사당은 전당대회를 통해 한국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2004년 2월 녹색평화당과의 합당을 통해 장기표를 당대표로 하는 녹색사민당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2004년 4.15 총선에서 녹색사민당은 참패하게 된다.

이에 대해 한국노총은 “한국노총의 노선과 활동에 대한 조합원의 신뢰를 획득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부 명망가 중심의 정치세력화 추진으로 일반 여론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녹색사민당의 참패는 97년 ‘정치활동 플랜’ 자체를 폐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는 근본적 요구에는 동의하지만 현재 수준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로서 한국노총은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꿈을 잠시 접고 새롭게 정치 방침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국노총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고, 현실적으로도 독자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차선책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가장 충실히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의 후보를 선택해 한국노총의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한 ‘정책연대’ 방침을 결정했다.

2007년 3월 14일부터 4월 10일까지 진행된 조합원 총투표에서 76.21% 찬성으로 정책연대 방침이 확정됐다. 이에 따라 8월부터 손학규 통합민주신당 대선예비후보를 시작으로 정동영 통합민주신당 대선예비후보,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통령 후보,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등이 차례로 정책간담회를 가졌으며 후보별 방송 3사 여론조사 평균지지율에 따라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무소속 이회창 후보 3명으로 후보를 확정했다. 이후 12월 1일부터 7일까지 ARS 총투표를 실시해 이명박 후보가 42%의 득표를 함에 따라 한국노총 2007년 대선 정책연대후보로 확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