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깎던 ‘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연필을 깎던 ‘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참여와혁신
  • 승인 2005.12.05 00:00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이들에게 ‘영광의 상처’를 허락하자

손가락 열 마디를 본다. 흉터 없는 손가락이 없다. 풀을 베다가 낫에 베이고, 연필을 깎다가 칼에 베이고, 조각을 하다가 조각도에 베이고, 소독약도 밴드도 없던 그 시절 흙으로 지혈을 시키고 뒷마당 돌담에 있는 풀잎을 돌로 찧어 약 대용으로 붙였다. 열 손가락의 흉터는 그날의 상처를 기억하게 하는 흉한 흔적이기보다는 열 손가락의 기능을 최상으로 만든 영광의 상처이기도 하다.


얼마 전, 9살인 아들에게 사과를 깎아 달라고 했다. 아들은 별 생각 없이 칼과 사과를 잡았는데 아내가 사과를 깎다가 손을 다친다며 막아섰다.
‘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자꾸 막느냐?’고 손을 다치는 과정을 넘어서야 익숙해지는 과정에 들어선다며 조금 화를 냈더니 아내가 한 발 물러섰다.


아들이 직접 사과를 깎는 역사적인 경험이 9살에 이루어졌다. 요즘 시대로 치면 겁 없는 아빠일수도 있다. 3번째 사과를 깎던 아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깎던 사과를 들고 다니며 자랑을 한다. 가운데 씨 부분을 도려내다가 자기도 모르게 ‘툭’ 떨어져 나갔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게 아닌가! 위험의 가능성도 있지만 하나를 성취한 기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 속으로 뿌듯했다.

 

‘과정이 생략된 결과’를 강요하는 사회
우리는 왜 점점 과정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원인 중의 하나가 ‘산업화’로 인한 ‘도시화’이다. 산업사회와 도시는 인간의 기능을 빼앗아야만 성장하고 유지될 수 있다. 일례로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연필을 다 깎을 수 있었는데 요즘 초등학생들은 연필을 깎지 못 한다. 왜냐면 ‘연필깎이’라는 기계가 연필을 깎을 수 있는 인간의 기능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잠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면 초등학교 1학년 때는 거의 모든 아이들의 연필을 부모님이 깎아 주셨지만 2학년이 되면서 같은 반에서 손이 빠른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연필 깎기는 서로에게 자극과 경쟁이 되어 삽시간에 반 전체로 퍼졌던 기억이 있다. 처음에는 서툴고 손도 베였지만 ‘연필을 깎는 과정’을 통해 결과를 얻고자 하는 너무나 당연한 생각과 행위를 지속해 왔다.


어느 날, 교실에 도시에 살고 있는 친척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는 지우개 크기의 ‘연필깎이’가 등장했다. 마술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연필깎이’ 마술이 펼쳐졌는데 우리는 연필 한 자루씩을 들고 온갖 아부를 다하며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얼마 후 그 연필깎이가 학교 앞 문구점에 진열되고 우리의 필통에도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지우개만한 연필깎이가 진화를 거듭한 만큼 연필을 깎을 수 있는 우리의 기능이 퇴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처럼 산업시대는 우리 인간의 기능을 기계로 대신하게 만들고 결국 ‘과정이 생략된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적 현상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사회 이면의 ‘과정상실증’
며칠 전, 내가 일하고 있는 체험학교에 초등학생들이 체험을 왔다. 비가 오는 관계로 고구마 캐기를 취소하고 실내에서 비석치기를 진행하였다. 편을 나누고 방법을 설명한 후 대결을 펼쳤는데 한 편은 5단계까지 올라갔고 다른 한 편은 1단계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지고 있는 편의 아이들이 신경질을 내며 자포자기 상태라 놀이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지고 있는 편의 아이들은 놀이가 아니라 거의 고문과도 같은 과정으로 놀이에 참여하고 있었다.


요즘아이들에게 ‘과정을 즐기는 놀이’는 무의미한 것 같다. 이겨야만 재미있는 놀이이고 지면 정말 재미없는 놀이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아이들의 심리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사회 문제의 시작이 되기에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한 장면이다.
지금의 현실과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산업사회의 사람들과 특히 도시의 아이들에게는 ‘기능상실증’과 ‘과정상실증’이라는 21세기의 증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증상은 어떤 상황이나 문제 앞에서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외부의 개입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외부의존성’을 점점 키운다.

 

농촌을 통해 열매 맺는 과정 배우자
이러한 증상을 인정한다면 가만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훌륭한 의사의 처방은 못되지만 우리 스스로 시도해 볼 수 있는 ‘민간요법’같은 방법은 없을까? 
필자는 하나의 방법으로 ‘농촌’을 주목하고 있다. 과거의 농촌은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자기 완결적 구조’를 가지고 살았다. 식료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통합적인 구조가 한 개인의 삶과 분리되지 않았던 농촌의 가치를 이 시대에 회복해야 한다.


요즘 붐이 일고 있는 농촌체험과 같은 일회적인 농촌의 경험이 아닌 씨앗을 뿌리고 밭을 가꾸고 수확을 하는 1년 단위의 지속적 참여가 가능한 농촌체험이나 주말농장에 가족이 참여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도시적 시각으로 보면 동네 슈퍼마켓이나 대형할인점에서 사먹는 것이 훨씬 경제적일 수 있지만 땅 속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들이 있다.
하나의 씨앗이 가꾸는 사람의 정성으로 인해 훌륭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는 것, 이보다 더 훌륭한 교육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