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 고’의 가발 이야기
‘미쓰 고’의 가발 이야기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1.01.3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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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부터 가발만 38년…일 밖에 모르던 나
‘가발명장’으로 불리는 게 꿈

충무로 ‘스타사’라고 들어본 적 있나? 30년 넘게 이 동네에서 수제가발만 전문적으로 다룬 산 증인 같은 가게를 모른다고? 뭣이, 가발은 할아버지, 아저씨들이나 쓰는 거 아니냐고? 모르시는 말씀, 요샌 젊은 아가씨들도 탈모 때문에 얼마나 고민들이 많은데.

다른 얘기보다 우선 한 가지 조언부터 하고 내 얘기를 시작하자. 괜히 돈 아낀다고 값싼 중국제 공장생산 가발을 쓴다는 분들, 그나마도 상태를 악화시키지 말고 좋은 것으로 골라야 된다. 무겁고 통풍이 좋지 않으며 제대로 맞지 않는 가발 때문에 모발이 가늘어지거나 두피에 염증이 생길 수 있다. 수제품이라 가격이 너무 부담스럽다고? 그렇지도 않습니다요~.


▲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화순 소녀 상경분투기


굳이 대라면 충무로 ‘스타사’의 고승연 원장이 내 정식 직함이다. ‘스타사’라는 간판은 충무로에서 최초로 생긴 가발전문점이었고, 난 2대째 상호를 물려받은 셈이다. 하지만 기본 2~30년은 드나드신 스타사 단골 손님들은 아직도 ‘미쓰 고’라는 호칭을 즐겨 쓰신다. 아들딸이 어느덧 대학생이 됐는데도 말이다. 호호.

내 고향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의 시골마을이다. 그 시절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 난 철없이 꿈 많은 딸이었다. 공부는 하기 싫었고 예쁜 옷이나 구두, 화장품을 보면 얼마나 가슴이 설레든지. ‘돈을 많이 벌어 내 손으로 사서 썼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공상을 펼치며 애꿎은 고무신만 일부러 뜯어내 망가뜨렸다.

그러다가 마침 가발공장에 들어가 일하던 고향 친구를 따라 무작정 상경하게 됐다. 그때가 열여섯 살 남짓 됐었나? 따지자면 ‘가출’을 시도한 것이나 다름없다. 서울 가는 기차를 타려고 친구와 광주역에서 기다리는 데, 애써 찾아오신 어머니가 치마폭에서 꼬깃꼬깃 차비를 꺼내 건네주신 게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일 하러 가겠다는 어린 딸이 얼마나 안쓰럽고 걱정되셨을까. 40년 가까이 남의 머리를 만지며 솜씨를 칭찬 받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지만 85세 연세로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 머리를 한번 만져드리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한이 맺힐 것 같다.

가발공장에서 일하게 된 것은 순전히 친구의 ‘착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당시 친구가 다니던 업체에선 가발 제작 경력자나 기술자를 데려오면 기숙사비를 면제해 주겠다고 제안했는데 친구는 아무나 일할 사람을 데려오면 된다는 줄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뭐하는 일이냐고 물었더니 자꾸 뭔가를 ‘뜬다’고 말하기에 난 손뜨개질이나 자수공장인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생전 보지도 못했던 가발공장이었을 줄이야. 이름도 잊지 않아, 공장의 정재규 사장님이 전라도서 올라왔다는 나를 난처하다는 듯 보시더니, 공장 귀퉁이에 책상과 작업대를 하나 내 주며 일을 가르쳐보라고 시키신 거지.

살면서 이를 악물고 어떤 일을 해 본적이 있나? 남자들은 군대에 가면 이를 악물고 훈련을 받는다는데, 나야말로 3일간 정말 이를 악물고 일을 배웠다. 사실 가발을 제작하는 것은 아주 신통방통한 기술이나 재주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꼼꼼하고 차분하게 작업을 하는지가 중요하다. 어머니께 큰소리치며 집을 나섰는데 타향에서 딱히 갈 곳도 없고, 돌아갈 차비도 없고. 주어진 3일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악착같이 가발을 한 벌 떴다.

얼마나 이를 악물고 시키는 대로 떴는지 식사시간에 밥을 한술 뜨니 생니가 다 흔들거릴 정도였다. 그렇게 완성한 가발을 사장에게 보였더니 대뜸 이마에 대고 슥슥 문질러 보는 게 아닌가. 바느질이나 자수도 촘촘히 꼼꼼하게 하면 부드럽고 매끈매끈한 것처럼 가발도 세심하게 정성을 기울이면 피부에 닿는 느낌이 다르다고 한다. 노력한 보람이 있어서일까 사장님은 정식 제품제작에 투입해도 좋다고 허락해 줬고, 다른 직원들에게 돌려 보이며 이것처럼 꼼꼼하게 뜨라고 지시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성남시로 통합됐지만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탄리, 고바우 다방 근처 여인숙을 개조한 수출용 가발제작 공장에서 나는 그렇게 70여 명의 직원들과 함께 일하게 됐다. 전라도에서 서울 영등포역까지 오는 동안, 서울에서 다시 공장까지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생초짜라고 말 한번 붙이지 않던 동료 직원들과 함께 말이다.

▲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수출용 공장에서 충무로에 입성


수출업체에서는 ‘물량’이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물량을 기일에 맞춰 대기 위해 무엇보다 빠르게 가발을 뜨는 기술이 요구됐다. 게다가 몇 벌을 떴는지 작업량에 따라 임금이 매겨지던 형편이라 공장 직원들 모두 품질보다 작업속도에 신경을 기울였다.

그에 반해 난 한 벌을 뜨더라도 허술하게 대충 넘어가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일을 오래하다 보면 기술이 손에 익어서 자연스럽게 속도가 빨라지지만 가발을 만들기 시작한지 38년이 지난 지금도 빠르게 작업하는 것보다 질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남들보다 만들어내는 제품 수가 적으니 내 월급은 다른 직원들에 비해 훨씬 적었다. 그러다가 부서를 개발실로 옮기게 됐다. 개발실에선 해외에 샘플로 보낼 제품을 한두 벌씩 소량으로 생산해내는 부서였다. 보낸 샘플의 품질에 따라 수주를 받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에 꼼꼼한 일처리가 눈에 띈 덕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개발 부서에서는 생산량과 무관하게 월급이 고정적이었다.

개발실에서는 샘플을 제작하는 것 외에 수출할 제품을 검사하는 일도 맡아야 했다. 워낙 요령이 없는 성격이라 제품검사를 하는 것도 책임감 때문에 대충 넘어갈 수가 없었다. 금촌, 파주 등지를 비롯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생산공장들을 다니며 제품을 검사하고 성에 차지 않는 불량품들은 그 자리에서 직접 고쳐서 들고나오다보니 사실상 퇴근시간이라는 게 없다시피 했다.

어느 날 저녁에 검사한 제품을 가득 채운 박스를 들고 서부역에서 기차를 탔다. 일이 너무 힘들기도 하고, 차창 밖을 내다보는 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 나정도 실력이 된다면 수출업체가 아니고 내수업체에서 일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 쇼윈도 너머 마네킹에 씌운 가발들을 보니 내 실력을 발휘해 열심히 일하고, 쉴 때는 좀 쉬면서 지냈으면 싶었다. 그래서 결국 충무로의 가발가게로 온 것이다.

▲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한국영화 ‘메카’에서 이름 석자를 날리다


한국영화의 메카라고 불리는 충무로에서 참 고지식하게 일한 나는 차츰 손님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음알음 단골들의 소개로 영화나 방송용 소품의 제작도 맡게 됐다.

예를 들어 사극을 한 편 찍는다고 하면 가발이나 수염이 한두 벌 필요한 게 아니다. 한번은 국내 사극 분장에서 아주 유명하신 분이 소문을 듣고 수염 백 벌을 제작해 달라고 찾아왔다. 그런데 그 분은 지독히 꼼꼼하게 제품을 검사하는 거라. 보통 내가 만든 제품에 그렇게 태클을 거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 분은 돋보기를 들이대고 수염을 한 올씩 검사하는 거였다.

그래서 내가 너무 질려서 다른 일이 바빠 못하겠다고 참 보기 드물게도 일을 거절했더니 이 분이 삐치셔서 다른 가게에 제작을 맡겼단다. 그런데 제대로 쓸 수 있는 물건이 나오질 않아서 결국 백 벌을 몽땅 버려야 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다시 내게 오셔서 ‘미쓰 고 때문에 애꿎은 수염 백 벌을 버렸다’고 투정을 부리셨고, 뭐 어쩔 수 없이 내가 해드렸다.

80년대 인기였던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를 비롯해서 굳이 사극이 아니더라도 촬영에 가발이 필요한 경우는 허다하다. 가게를 거쳐 간 연예인들은 워낙 많아서 전부 다 얘기할 순 없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탤런트 최재성을 꼽을 수 있다. 참 자상하고 인간적이더라. 연예인이라고 하면 보통 좀 성격이 까칠한 데 말이다. 얼추 이십년 전인데, <아담이 눈뜰 때>라는 영화를 알고 있나? 당시 최재성은 군복무 중이었고 머리가 짧으니까 가발을 쓰고 촬영을 했다.

여자 연예인들은 실물과 화면에서의 모습이 확연하게 다른 경우가 많다. 그런데 탤런트 이경진 같은 경우엔 실물로 봤을 때 정말 예쁘다고 느꼈다. 너무 나이든 배우만 얘기하는 건가? 탤런트 박해일이 <국화꽃 향기>의 촬영 때문에 가게에 온 적이 있다. 8~90년대야 충무로 일대는 연예인들이 워낙 주둔하다시피 해서 특별히 가게에 들른 사람들에게 기념 사인을 받아놓거나 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일종의 홍보가 아닌가? 그래서 박해일에게도 얼른 사인을 받았지. 난 솔직히 말해 당시엔 박해일이 유명한지 잘 몰랐다. 영화에 함께 출연했던 장진영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을 때는 가슴이 아팠고.

1984년에 영화배우 김지미가 <비구니>를 촬영하면서 삭발을 했기 때문에 가발을 주문했다. 당시는 가발의 두상틀 부분을 고무나 실리콘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았는데, 통풍이 안 돼서 두피에 좋지 않았고 모양이 부자연스러웠다. 결국 예민한 성격의 톱 여배우가 ‘한국의 기술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냐. 돈은 상관없으니 편하고 좋은 걸 만들라’고 불만을 털어놨다.

결국 영화계에서 가발제작으로 소문난 내게 의뢰가 들어왔고, 여러 가지 연구 끝에 실크 소재의 원단에 머리칼을 심은 ‘김지미 가발’을 개발했다. 가볍고 통풍이 잘 되는 가발에 김지미 자신도 크게 만족한 것은 물론이고, 소문이 퍼져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종류의 가발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했으니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애를 썼겠지만 그런 쪽으로 감이 부족한 나는 손님 입맛에 맞는 가발만 열심히 만들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가발명장’으로 불릴 때까지


내 오른손 검지와 새끼손가락은 바깥쪽으로 눈에 띄게 굽어 있다. 연필만한 굵기의 가발 바늘을 쥐고 40여 년을 가발 뜨는 일에 매진했기 때문에 생긴 세월의 흔적이다. 머리칼이 사람의 외모를 얼마나 달라보이게 만드는가. 그동안 오로지 손님들이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에 함께 기뻐하며 일에만 몰두해 왔다.

30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오니 이제 십년 쯤 가게를 드나드는 손님들은 어지간해선 단골이라 명함을 내밀기도 어렵다. 2, 30년 단골 고객이 수두룩하다. 단골손님들의 나이가 지긋해지신 만큼 ‘미쓰 고’도 중년 아주머니가 됐다. 충무로 명물 ‘스타사 가발’도 요즘 사람들의 눈에는 허름하고 낡아 보이는 가게가 됐다. 내부수리라도 말끔히 할라치면 그 사이 찾아오실 단골손님들이 걱정돼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젊은 아가씨들이 새 단골손님으로 이름을 올렸다. 요새 젊은 여성들 중에 탈모로 고민인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 미처 몰랐다. 하루는 탈모로 고민인 여성들의 인터넷 모임에서 잘 한다는 얘기를 듣고 두세 명의 여자 손님이 가게를 찾았다. 처음에는 허름한 겉모습에 의심스런 눈길을 보내던 아가씨들이 막상 가발을 착용해 보고 매우 만족해하며 돌아갔다. 인터넷을 통한 입소문이라는 게 이렇게 빠른가 보다.

그 뒤로도 젊은 여자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그 중 몇몇과는 개인적으로 각별하게 지내고 있다. 탈모로 심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여자 손님이 정성껏 만들어 준 가발을 쓰고 선을 봐서 결혼하게 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내 딸을 시집보내는 것 모양 가슴이 설레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묵묵히 가발 뜨는 일에만 몰두해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 아닐까? 작년 봄 모 방송프로그램에서 몇 차례 경합을 거쳐 수제 가발제작의 달인으로 뽑히게 된 것은 수십 년 해온 내 일에 대한 시각을 조금 바꾸게 된 전환점이 됐다. 2010년 현재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선정하는 대한민국 명장 부문에 가발제작은 들어있지 않다. 유사한 업종으로 서비스부문에 미용 명장이 인정받는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방송에서 소개된 이후 몇 차례 취재 요청이 더 들어오기도 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평생 함께해 온 이 일이 당당하게 다른 여러 업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위치로 격상됐으면 한다. 묵묵히 내가 하는 일을 지지해 준 남편과 엄마 노릇을 충실히 못해 늘 미안한 마음인 아들딸, 일에 바쁜 며느리를 두신 시어머님께 그렇게나마 조금 면목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미쓰 고’의 사랑이야기

충무로에서 근무할 때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쌀쌀한 날씨의 어느 날, 의경 두 명이 가게 앞을 오가며 거리 순찰을 돌고 있었다. 오들오들 떠는 모습이 안쓰러워 잠시 들어와 따뜻한 것을 마시고 가라고 호의를 베풀었다. 말을 건넸던 의경이 고참에게 물어보고 함께 가게로 들어왔기에 커피를 두 잔 끓여서 건넸다.

안경을 썼으며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고참 의경은 나를 째려보면서 커피 한 잔을 묵묵히 훌훌 마시고는 ‘전 신세는 갚는 사람입니다’하며 나가는 것이었다. 추워 보이는 게 안쓰러워 커피 한 잔 줬더니 무슨 무게 잡고 신세 갚는 타령은, 참내.

그러고 얼마 지나서 ‘안경잡이’ 고참은 후임들을 우르르 데리고 가게로 찾아와서는 ‘신세 갚으러 왔다’며 예전 스카라극장 근처 다방에서 사람 숫자대로 커피를 사 가지고 왔다. 그러나 나는 딱히 이 사람이 마음에 들지도 않고 해서 ‘커피 안 마신다’고 튕겼더니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두 잔을 훌쩍 마셔버리는 게 아닌가. 그러고 나선 신문을 펼친 채 돌아가지도 않고 마냥 가게에 죽치고 앉아서는 대뜸 “이름을 알려주기 곤란하면 성이라도 좀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런데 이 사람 어느 날 가게로 엽서를 보내며 받는 사람으로 당시 내가 근무하던 가게 상호인 ‘마돈나’를 적어 보냈다.

그 뒤로 수시로 편지나 엽서를 보내는가 하면, 거리 순찰을 돌 때면 가게에 들어와 얼굴을 비추기도 하고, 가게로 전화를 걸기도 하고, 시간이 나면 책을 사서 갖다 주면서 끈질기게 내 성을 물어왔다. 하도 집요하게 묻기에 결국 3개월 만에 성을 알려줬는데, 요새 식으로 생각하면 내가 너무 튕겼던 걸까?

그렇게 조금씩 ‘안경잡이’ 고참과 사이가 가까워졌지만 제대 후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야 하는 사정으로 잠시 헤어지게 됐다. 하지만 사람의 인연이란 것이 서울과 부산 사이의 거리를 뛰어넘을 만치 질기더라고. 우리의 만남은 그 뒤로도 7년 동안 이어졌고 결혼에 골인하게 됐다. 남편은 내게 과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좋아한다, 사랑한다 얘기도 한번 제대로 못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