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그의 연기는 빛을 잃지 않는다
일흔, 그의 연기는 빛을 잃지 않는다
  • 안형진 기자
  • 승인 2011.01.3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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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과 욕심, 친숙함으로 빚어낸 45년 연기 인생
‘명품 연기자’ 변희봉의 세상을 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브라운관에서, 스크린에서 이토록 진한 페이소스를 뿜어내는 사람은 흔치 않을 듯하다. 세상이 그에게 요구한 역할은 언제나 ‘충실한 조연’이었다.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강직한 교수, 교장 선생님, 동네 주민에 이르기까지 그가 맡았던 역할은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스쳐지나는 제3자의 역할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맡은 역할 속에서 찬란하게 빛났다. 일단 젊은 톱스타를 전면에 내세워 소위 ‘흥행성부터 먹고 들어가는’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도 사람들은 ‘변희봉’이라는 이름을 기억했고, ‘명품조연’으로 칭송했다.빼어난 용모와 괜찮은 연기력을 가진 수많은 톱스타들 속에서 이제 곧 일흔에 접어들 그의 연기가 빛을 잃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의 삶 전체가 맡았던 수많은 역할들을 투영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인터뷰는 시작됐다.

<하얀거탑> 오경환 박사의 ‘고집’을 보다

스포츠 드라마 = 선수들끼리 연애하는 이야기, 메디컬 드라마 = 병원에서 연애하는 이야기, 사극 = 역사 속 인물들의 연애담의 공식 속에서 천편일률 로맨틱한 이야기들만 쏟아내던 드라마들 사이에서 단연 ‘군계일학’의 면모를 과시했던 드라마가 있다. 2007년 방영된 드라마 ‘하얀거탑’은 ‘명인대학교 의과대학’이라는 온갖 인간 군상들의 집합체에서 야망을 가진 한 천재의사의 이야기로 수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주인공인 천재의사 장준혁을 비롯해 친구 최도영, 외과과장 이주완, 부원장 이용길에 이르기까지 자기만의 색이 분명한 개성적인 캐릭터가 넘쳐났던 드라마 ‘하얀거탑’에서 변희봉은 병리학 교수 오경환 역을 맡았다.

평생을 ‘돈’ 안 되는 기초의학에 몸 바친 학자. 지나치게 깐깐하고 융통성 없으며 타협을 모르는 인물이다. 드라마 상에서 그와 대척점에 있던 지나치게 정치적이며 권력을 탐하는 인물들 사이에서 그의 연기가 빛났던 것은 단순히 양 극단의 성향을 가진 인물들을 대비시켜 얻은 효과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화려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 사이에서 교과서에 나올 법한 대사를 쏟아내는 인물이라면 오히려 극의 흐름 사이에서 묻혀버리는 것이 일반적 수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희봉은 노학자의 고집과 강단을 날카로운 인상과 호소력 짙은 연기로 깔끔하게 표현해 냈다.

▲ 小醫治病 中醫治人 大醫治國
작은 의사는 병을 고치고, 중간 의사는 사람을 고치고, 큰 의사는 나라를 고친다
<드라마 ‘하얀거탑’ 중 오경환의 대사> ⓒ MBC
실제로 만나본 변희봉은 정말 ‘편안한 사람’이었다. 자신은 ‘성격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며 연신 스스로를 깎아내렸지만 촬영 스케쥴로 인해 인터뷰 일정을 수차례에 걸쳐 미룬 것을 수 번에 걸쳐 사과했고(실제 유명인들 중에는 ‘스케쥴’로 인터뷰 일정을 수 차례 미루다 ‘영원히’ 일정을 미뤄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인터뷰 말미에는 “제가 너무 말이 많았는데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가 잘 되시려나 모르겠어요”라며 감사의 뜻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자신만의 ‘고집과 강단’이 있었다.

“성우 생활을 접고 TV를 하다가 그만 둔 적이 있어요. 가장 괴로웠던 것이 ‘코미디’를 하라는 선배의 제의였죠. 다른 선배들하고 상의도 해봤지만 어떤 선배는 해보라고 하고, 어떤 선배는 하지 말라고 하고. 계속 망설이다 결국 이야기 했습니다. 안 할란다고. 못하겠다고요. 그때 정말 욕 많이 먹었어요. 나쁜 새끼라고. 그때야 뭐 막가는 시대였으니까. ‘자식아 하라고 하면 하는거지’ 이런 이야기 나오는 시대요. 제가 성질도 참 나빠요. 안 좋습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나 배우 안해, 촌놈은 못할 짓이구나’했죠. 아주 힘들었어요”

그가 연기자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여기는 덕목 역시 ‘도덕성’이다. TV에서 여러 조연을 맡으며 활동영역을 넓혀가던 그가 7~80년대 쏟아지는 제의에도 영화 출연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도 그에 기인한다. 당시 영화 제작의 트렌드가 대부분 ‘성적인 것’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한 것이지만 뒤돌아보니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준 계기가 됐다.

“사회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도덕성을 갖춘 배우가 성공합니다. 감독이든 배우든 마찬가지에요. 도덕성을 갖추지 않은 배우가 만들어 낸 자기 캐릭터는 나쁜 역할은 잘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선한 역할을 맡으면 대번에 밑천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도덕성을 갖춘 사람은 선한 역할 뿐 아니라 악역도 바로 할 수 있어요. 그게 배우들의 변신이 되는거죠.”

지나치게 고집스럽고 강직했던 오경환 교수의 옷이 그에게 어색하지 않았던 이유. 이제야 조금은 이해가 될 듯하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더 게임> 강노식 회장의 ‘욕심’을 보다


변희봉이 출연했던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그가 전면에 떠올랐던 작품은 많지 않다. 그랬던 그가 2007년 처음으로 스크린에서 주인공에 도전했던 작품이 바로 ‘더 게임’(감독 윤인호)이다. 스토리 상 작품성에 대한 논란은 있었지만 주연 배우들의 연기력에 대한 논란은 ‘변희봉답게’ 깔끔하고 깨끗했다.

‘더 게임’에서 변희봉은 젊음 이외에 모든 것을 가진 강노식 회장과 가진 것은 젊음 밖에 없는 길거리의 화가 민희도까지 1인 2역을 부족함 없이 완성해냈다. 서로의 육체를 바꾸는 희대의 내기에서 승리한 강노식 회장의 만족감에 들뜬 천진난만한 미소는 영화가 지속되는 내내 관객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스러져가는 조그마한 육체 속에서도 거대한 게임을 제안하며 결국엔 승리하는 강노식 회장의 영민함은 끝없이 젊음을 갈구하는 강회장의 욕심에 근거한다. 강노식 회장의 육체에 깃든 민희도가 다시 강노식 회장과 대면하며 싸울 수 있는 용기 역시 자신의 몸을 되찾고자 하는 갈망에 기인한다. 욕심과 갈망은 인간을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가능한 일로 뒤바꿔놓기도 한다.

▲ “자네가 왜 가진 게 없나? 자네는 그 젊은 몸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영화 ‘더 게임’ 중 강노식 회장의 대사> ⓒ (주)프라임엔터테인먼트
최근 몇 년 간 가장 눈부신 활약을 펼쳐온 그였다. 매일 불규칙하고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기에 종심(從心)에 가까운 나이는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전혀 힘들지 않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일에 몰두를 하면 묘하게도 ‘힘들다’는 감정에 무뎌진다는 이야기.

곧 활동을 그만 둬야 할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일에 대한 꿈과 열정이 없다면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쉽게 말하기 힘든 답변이 아니겠느냐’고 묻자 변희봉은 손사래부터 쳤다.

“꿈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지금 이게 다 이룬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더 바라지 않아요. 앞으로 얼마나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정도 이뤘으면 더 바라면 안 돼요. 더 좋은 차, 뭔가에 더 도전하는 것. 저는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해요. 뒤따르는 후배들도 있는데 제가 그 후배들 앞길을 막아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그냥 내가 필요할 때, 그때 정 필요하다면 나를 쓰되 항상 정당하게 제가 쓰여졌으면 하는 생각 그것뿐이에요.”

일단 한 발짝 물러선다. 오랜 시간 몸에 익어온 듯한 겸손이다. 하지만 어딘가 부족하다. 그가 보여주는 완성도 높은 연기는 그의 내면에 담긴 연기에 대한 열정과 욕심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배역을 맡고 준비할 때 자신만의 비결이 있느냐고 묻자 그제서야 그의 연기에 대한 욕심이 묻어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선천적인 배우가 있고 후천적인 배우가 있죠. 나는 후천적인 사람이에요. 뭐든 직접 봐야 ‘아 저거다’하고 보지 않으면 못 느끼는 사람이죠. 배우들 모두 노력하는 사람들이고 저 역시 노력을 합니다. ‘변희봉’하면 ‘아 노력하는 배우다’ 이런 이야기 듣고 싶으니까요. 역할을 맡으면 일단 무엇인가 다른 1%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비슷비슷한 캐릭터들이 많은데 뭔가 다른 1%가 나오지 않으면 똑같은 연기가 되거든요. 하루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는 계속 제가 맡은 배역의 사람 생각만 하는거에요.”

그는 습관적으로 책(시나리오)을 보고 고민한다고 한다. 밤이고 낮이고 구별이 없다. 그런데 그 ‘책’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다. 걸으면서 읽었던 책이 가만히 앉아 볼 때와는 느낌이 다르고, 낮에 읽었던 책을 새벽에 잠시 잠에서 깨어 등불 하나 밝히고 보면 또 생경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책 속의 인물과 함께 하고 동화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 정제된 캐릭터를 우리는 브라운관에서, 스크린에서 ‘변희봉’이라는 이름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게 참 고통스럽긴 합니다. 뭔가 완벽주의랄까. 그 인물이 머리 속에 다 들어와야지 그렇지 않으면 연기가 안돼요. 요즘 드라마같은 경우는 대본이 그날 바로 나오기도 하는데 특히 뭔가 변화가 요구될 시점에는 대본이 좀 일찍 나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죠”

완벽한 연기를 향한 끊임없는 욕심과 갈망이 식지 않기에 일흔에 접어든 연기자의 발걸음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괴물> 희봉 노인의 ‘친숙함’을 보다


변희봉에게 ‘봉준호’라는 이름은 각별하다. 봉준호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이었던 <플란다스의 개>에서부터 <살인의 추억>, <괴물>에 이르기까지 변희봉은 봉준호 감독의 세계 속에서 ‘어르신’을 대표하는 페르소나로 칭해도 무방할 것 같다. 봉준호 감독과 함께 했던 영화 세 편을 통해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는 점에서 변희봉은 그에게 ‘고마운 천재 감독’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은 지극히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인물들을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상황으로 내몰아가며 이야기를 완성시킨다. 영화 <괴물>에서 한강에 출몰한 괴물에게 손녀가 납치된 희봉 노인의 일가가 그랬다.

한강변에서 괴물과 맞대면해 총을 겨누지만 탄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희봉이 조용히 총을 내리고 가족들에게 인사하며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영화 <괴물>이 보여주는 비상식적인 상황에서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애잔한 아버지,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줬던 변희봉의 연기는 애초부터 그 무게감이 남달랐다.

▲ “방금 임마! 4번 돗자리에서 항의가 들어왔으야! 오징어 다리가 구개라고! 손님 입장에서 보면 말야, 오징어 맛이라는 것이 몸통 맛도 있지만 다리 맛이 또 어디냐? 그 중에서도 제일 긴 다리 맛이 독특한거 아니냐!”
<영화 ‘괴물’ 중 희봉의 대사> ⓒ (주)영화사청어람

변희봉은 근래 들어 친숙한 아버지, 할아버지 역할을 맡는 일이 많아졌다. 그가 연기하는 모습은 세상 어디에나 있을 법한 아버지이며 할아버지이지만 실상 ‘연기자’라는 조금은 범상치 않은 직업임에는 분명한 듯 보인다. 딸 셋을 키워냈고 번듯한 외손주도 있지만 아버지가, 외할아버지가 연기자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부담이 될까, 혹은 혹시라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보통의 할아버지. 그가 변희봉이다.

“제가 원래부터 시골에서 자라서 아무래도 도회지에서 생활한 분들하고 생각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원체 배우 마누라, 배우 딸 이래되니 편안하질 않아요. 그러다보니 애들이고 안사람이고 일할 때는 잘 안 불러요. 외손녀가 초등학교 5학년, 3학년인데 할아버지 일하는 걸 보고 싶어해. 그래서 그랬어요. ‘전 과목 만점을 받으면 구경 시켜줄게. 그 전에는 안 돼’ 애들은 보고 싶어해도 그걸 안 시켜줬죠. 아직 어린 아이들인데 할아버지 일하는 걸 보면서 꿈을 가질 필요는 없어. 나이도 더 먹어야 하고 공부도 해야하잖아.”

손주들이 할아버지를 보면서 훌륭한 연기자의 꿈을 키울 수 있다면 오히려 더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느냐고, 아이들에게는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질문하려다 접어뒀다. 외할아버지만의 자식 사랑의 방법에 대해 제3자가 왈가왈부할 수 없지 않은가.

“3학년짜리 외손주 하나가 지 언니한테 ‘왜 우리 할아버지는 밖에 나가면 다 가리고 다녀? 울 동네 사는 누구누구는 TV에 나오는데 다 그냥 다니던데’ 하고 물어봤대요. 그런데 5학년 짜리 언니가 ‘글쎄? 울 할아버지는 주인공이 아니어서 그럴까?’라고 했다데요.”

외손주 이야기를 하던 변희봉이 이내 너털웃음을 지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그는 ‘명품 연기자’이다


“배우는 절대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게다가 저는 별로 좋은 사람도 아니고요.”

변희봉은 끝까지 한 발짝 물러섰다. 습관처럼 배어있는 겸손, 그것은 어쩌면 평생을 조연으로 살아온 그가 몸으로 체득한 덕목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하나의 무대라고 가정한다면 그는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조연들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품 조연’ 변희봉은 조금 다르다. 수십 년동안 쌓아온 자신만의 연기에 대한 고집과 열정, 연기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세상 모든 조연들의 마음을 녹여내는 따뜻한 힘을 가졌다. 황혼에 접어든 나이에도 변희봉의 연기가 현재진행형인 이유는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젊은 배우들은 젊은 배우들 나름대로, 저같이 나이든 배우들은 나이든 배우들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죠. 젊은 사람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자기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잘 해주는 게 제일 좋다고 봅니다. 서로 존중하면서 말이죠. 저라고 특별할 것은 없습니다만 아직은 좀 더 힘이 있고 꺾이지 않는 연기를 더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