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의 아픔 함께 하는 노동자들
농민의 아픔 함께 하는 노동자들
  • 승인 2005.12.05 00:00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농민이 우리 고객, 농민이 없다면 우리도 없다”
<농엽기반공사노동조합>

우리의 기억 속에 남은 가을걷이 끝난 농촌의 풍경은 풍요롭고 한가롭다. 가을 한 철 수확을 위해서 1년 동안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았던가. 더욱이 올해 쌀농사는 풍년이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우리네 아버지와 어머니의 입가에 싱글벙글 미소가 떠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들판엔 웃음 대신 한숨으로 가득하다. 그 한숨이 너무 깊어 대한민국의 지반이 다 내려앉을 지경이다. 쌀협상 국회 비준동의안이 처리된 후 허탈감과 분노만이 남았다.


이런 농민의 아픔을 함께 하겠다며, 임금동결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과감히 포기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농업기반공사 노동조합(위원장 신기준)이다.

 

생존 싸움 앞에 임금으로 싸울 수 없어
농업기반공사는 농어촌 정비사업을 실시하고, 농업기반시설 관리 등을 통해 농업생산성이 증진될 수 있도록 농민들을 도와주는 공기업이다. 농로를 만들고, 농업용수를 관리하는 등의 업무를 한다. 농민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농업기반공사 노동조합 신기준 위원장은 얼마 전 쉽지 않은 선택을 했다.


“공기업 노동조합의 경우 위원장들의 재선이 드뭅니다. 노동조합이 내부의 조합원들에게 얼마나 (경제적 이익을) 주느냐에 따라 재선여부가 결정되는데, 공기업의 구조적인 한계 때문에 재선이 힘들죠.”


언제부턴가 임금협상에서 얼마를 따내느냐가 노동조합의 중요한 임무가 되어버렸다. 그만큼 임금협상 때가 되면 조합원들의 기대감도 커진다.
그런데 농업기반공사 노동조합은 다른 공기업노조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올해 임금동결을 선언했다. 가장 큰 이유는 올해부터 추곡수매가 이루어지지 않고, 쌀값이 하락해 농민들이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이다.


“반발도 많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농민들은 고통을 받고 있는데 우리만 살 수는 없지요. 생활이 불편한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생존의 위협을 받는 것은 참을 수가 없거든요.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농민들이 저렇게 거리에 나가 있는데, 우리가 임금을 적게 올려준다고 싸운다면 정말 어떤 명분으로도 이야기 할 수 없지요.”


농업관련기관에 종사하는 사람이 고객인 농민과 같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발로 뛰며 닫힌 마음 풀어내다
“내부문제를 풀어보려고 회사측과 교섭도 해보고, 정보도 입수했죠. 그때 느낀 것이 공기업의 구조적인 문제는 내부에서 풀리지 않는다는 거였죠. 내부문제를 풀기 위해선 외부에서 문제를 풀어 와야 한다는 걸 알게 됐죠.”


공기업의 문제는 우선적으로 국가가 풀어줘야 하지만, 주고객인 국민이 풀어줘야 하는 것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걸 깨달은 지난해 10월부터 외부 농민단체들을 찾아 다녔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정부기관에 대해 농민들 마음에 쌓인 불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부지런히 발로 뛰어다녔다. 어떤 이는 사장이 해야 할 일을 왜 위원장이 하고 다니느냐고 했고, 어떤 이는 농업기반공사의 공식 ‘술상무’는 노조 위원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위원장을 비롯한 집행부들이 발로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농민들도 닫힌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작년 10월부터 농민단체들과 부지런히 접촉을 했는데, 올 5~6월부터는 조금씩 마음을 열더라고요.”


한 번 열린 마음은 서로 간의 연대를 강화시켰다. 현장에서 농민들을 직접 만나서 그 어려움을 몸소 느꼈기에 임금동결이라는 선택까지 할 수 있었다고 신 위원장은 말한다.

 

체육대회 대신 쌀 구입해 농민·이웃 도와
농업기반공사는 2000년 3개 조직(농어촌진흥공사, 농지개량조합, 농지개량조합연합회)이 통합해서 다시 태어났다. 3개 기관의 고유정서와 문화가 상당히 달라서 노노간의 갈등과 파업까지 가는 극단적인 상황이 연출됐다.


“그런 아픔을 겪고 나니까 이젠 정말 공생을 하려면 상대를 이해해야 된다고 깨달았죠. 그렇지 않으면 공멸할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진정한 사회적 통합을 한번 해  보자는 의미에서 우리가 한식구라는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노사한마음 체육대회’를 계획했죠.”


결코 한바탕 놀기 위한 행사는 아니었지만, 이 어려운 시기에 농민들을 자극하는 행동을 할 필요가 있을지 고심했다. 유대관계가 형성된 농민단체들도 걱정을 했다. 결국 노동조합은 행사를 취소했다. 대신 행사경비로 쌀을 구매하기로 했다. 7천 명의 직원이 1인당 10kg짜리 쌀 한포씩 7천 포를 구입해서 각 지역의 사회복지시설에 지원했다. 많지는 않지만 농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또 농업기반공사 노동조합은 강원도 양양군 일대에 발생한 산불로 피해를 입은 농민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농민이 농업기반공사와 노동조합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23일 국회에서 세계무역기구(WTO) 쌀 관세화 유예협상에 대한 비준동의안이 통과됐다. 한해 온 정성을 다해 수확한 나락을 붙들고 우리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대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농업기반공사 노동조합은 타인을 위해 자신들의 이익을 포기했다. 농업기반공사 노동조합의 작지만 너무나 큰 발걸음을 통해 연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농사꾼 전우익 옹은 이렇게 일갈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겨울은 내년 농사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농민들이 내년 봄에 다시 씨를 뿌릴 수 있길 바란다.

함지윤 기자 jyham@laborpl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