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조끼 입은 게 자랑스러운 날
노조 조끼 입은 게 자랑스러운 날
  • 승인 2005.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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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관리공단 노동조합의 뜻 깊은 일곱 번째 생일잔치
<주택관리공단 노동조합>

조용하기만 하던 영구임대아파트 단지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주황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단지 안을 누비고 다니며 가로등을 교체하고, 쌓여있는 낙엽을 쓸기 시작한다. 그 뿐인가.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 중 몇몇은 공구며 전등을 들고 어디론가 급히 뛰어간다. 갑자기 이곳에 찾아온 손님의 정체가 궁금한 주민들이 물었다.
“도대체 저 사람들 뭐하는 사람들이래?”

 

2005년 11월 25일, 이 날은 주택관리공단 노동조합(위원장 진성문)의 7번째 창립기념일이다. 바로 이 날, 그들은 서울 수서동에 위치한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를 찾았다.
‘수서 주공아파트 주민과 함께하는 주택관리공단 노동조합 사회봉사활동’이 바로 그 이유다. 주택관리공단 노동조합은 자신들끼리 모여앉아 ‘생일’을 축하하는 대신, 주황색 조끼와 공구를 들고 이웃과 함께하는 기념식을 택했다. 관성화 되어버린, 그래서 더 이상 의미를 찾기 어려워진 창립기념일 행사를 조합원들이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날로 보내기로 한 것.


전국 각지에서 모인 조합원 80여 명과 본사 임직원 20여 명이 함께 한 이 행사는 독거노인을 위한 점심 무료급식,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한 목욕 자원 봉사, 특히 어려운 이웃을 위한 도배 및 장판 교체, 단지 내 환경 조성 사업, 생필품 전달, 헌혈 등으로 채워졌다.


영구임대아파트의 주민들은 대개 기초생활수급자를 비롯해, 독거노인, 장애우 등 사회의 특별한 보호와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이렇듯 사회의 보호와 관심이 필요한데도, 아직도 정부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지 않는 것을 보면서 노동조합의 사회적 역할을 다하고, 그들이 결코 외롭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하는 진성문 위원장.
진 위원장은 “노조가 여러 불미스러운 일들로 인해 국민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는 지금, 이런 나눔 활동을 통해 노조에 대한 불신 풍조를 바꾸고 쇄신할 뿐 아니라, 노조와 이웃이 함께 나누는 활동들을 확산하는 역할을 했으면 한다”고 전했다.

 

도배 전문가 못 되도 나눔 전문가
수서 단지 114동 어느 집. 서너 명이 안방에 달려 있는 형광등을 교체하는 것을 보고 전국 각지 사투리로 훈수를 둔다.


“알어, 가만 좀 있어봐.” “그랑께, 이쪽으로 하랑께” “한 번도 안 해봤죠? 솔직히 말해서 (웃음)” “마이 해봤다, 쪼매만 기다려봐라.”


티격태격 웃음꽃이 핀 잠시 후 형광등 스위치를 올리고 나니 불이 들어온다. 다들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전북지부, 서울지부, 제주지부 등 전국 각지의 이름표를 단 조합원은 이제 슬슬 도배할 준비를 한다. 그들이 도배·장판 전문가는 아니지만, 집에 있는 짐을 들어내고, 조명기구를 갈아 끼우고, 어긋난 싱크대를 망치로 두들기는 표정만은 완벽한 전문가급이다.
힘들어 보이는 이들은 오히려 재미있다고 대답하면서 정작 진짜 힘든 일은 따로 있다고 말하면서 낯빛이 변했다.


“임대료 장기 체납 등의 이유로 퇴거 조치를 할 때가 있어요. 그런 날은 정말 쓴 소주를 들이부을 수밖에 없어요.”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맡아야만 했던 그들에게 있어 이런 나눔의 기회가 얼마나 뜻 깊은 일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다음 날 몸살 안 나는 사람 5대 맞기’ 내기가 한창이었다.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나누는 그들이야말로 나눔 전문가다.

 

회사도, 노조도… 모두 이웃과 함께!
이날 행사는 노조 창립기념일 행사이지만, 독거노인을 위한 점심 무료급식을 할 때는 주택관리공단 사장이 직접 찾아와 배식을 돕고 가기도 할 만큼 회사 측의 반응도 매우 좋은 편이었다. 조합의 행사이긴 하지만 점점 노사 공동 행사가 되어 가는 분위기다. 이번 행사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노려보던 노사가 같은 방향을 보며 웃고 있는 모습만으로 의미를 갖게 해 주었다. 


주택관리공단 노조는 올 1월 대의원대회를 통해 이런 활동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기로 결정했는데, 여기에 더해 회사 측과 협조해서 전 직원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보겠다는 포부도 품고 있다. 이런 노조의 뜻에 화답해 공단에서는 자원봉사기금 1200만원을 책정했다.

단결투쟁이라고 써 있는 노조 조끼가 오늘은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진성문 위원장의 표정에서 조금씩 희망의 빛이 새어나왔다.

 

공짜로 해 준다고 해도 못 했는데…
아픈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벽지며 전등을 갈 여력을 찾기 어려운 사람. 그런 사람을 여기 수서 단지에서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조합원들이 도배하고, 장판 까는 작업을 모두 마치고 어긋난 싱크대를 툭탁거리고 있을 때, 박순자(61) 씨는 먹다 만 자장면을 옆에 두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장이 좋지 않아 혈액투석을 위해 병원에 다니고 있는 그에게 형광등을 갈고, 도배를 새로 하는 일이란 여간해서 할 수 없는 일이다.


“새로 도배하려면 돈도 돈이지만, 인부들 밥 해줄 기력이 없어서 엄두도 못 냈어. 그런데 여기 이분들이 와서 손댈 것도 없이 다 해주고 가니 너무 고맙지.”


작은 땀방울로 외롭고 힘든 이웃과 함께하는 그들의 모습 뒤에 작은 숙제가 남겨져 있다. 손길이 가야 할 곳은 많건만 나눌 수 있는 여력이 아직 부족하기에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저희도 늘 고민하는 부분이에요. 조합비의 3%로 이런 활동을 하는 건데, 확실히 턱없이 부족하긴 하죠. 앞으로 계속 고민해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수서 단지에서 저 너머를 바라보니 강남의 고층 빌딩숲이 보인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현장에서 소외된 그들이 바라보는 저 세상이, 남의 세상이 아닌 함께 사는 세상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뛰어다니는 조합원의 마음. 그 마음 때문인지 오늘 조합원들이 입은 주황색 조끼가 환한 표정과 어울려 유난히 더 근사해 보인다.

성지은 기자 tjdwldms@laborpl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