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_ 국가 고용서비스, 현장을 가다 ① 대구
르포 _ 국가 고용서비스, 현장을 가다 ① 대구
  • 승인 2005.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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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섬유노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말로만 ‘지역 밀착’ 사업 속 설자리 잃는 사양산업 종사자들

11월 중순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20·30 취업한마당’이 열리는 대구종합고용안정센터. 20~30대의 젊은이들로 활기가 넘치는 행사장 안에 중년의 사내들이 하나 둘 눈에 띈다. 이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연령대가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만은 아니다.


행사에 참여한 대다수 젊은이들의 눈빛이 기대와 설렘으로 반짝인다면, 적게는 5~6군데에서 많게는 10군데의 직장을 이미 거쳐 이제는 ‘업종불문, 대우불문’ 일할 자리만이라도 구해야겠다는 이들의 눈빛에는 절박함과 불안함이 묻어난다.

 

경비직도 감지덕지 한 ‘왕년의’ 섬유 노동자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들고 참여업체들이 빽빽이 인쇄돼 있는 종이를 들여다보는 김재복(57·가명)씨는 95년까지 달성공단의 중견 섬유업체에서 일했다. 이 일로 두 아이를 고등학교까지 가르치고 스무 평 남짓 작은 집도 마련했다. 지난 98년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구조조정과 함께 퇴사한 그는 그로부터 7년여 간 건설현장을 전전하며 일용직으로 일을 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급속하게 얼어붙은 건설 경기 때문에 그마저도 어려워지자 올해 들어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이날 그가 지원한 일자리는 작은 보안관리업체의 경비직. “새 기술을 배우기에는 너무 늙고, ‘몸으로 때우는’ 일자리도 없어, 경비직 말고는 할 일도 없다”는 김씨는 “그나마 여기도 정년이 60세인데 이제 다 늙은 나를 써줄지 걱정”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봉제 기술 배우러 정든 고향도 등졌지만…
김씨의 뒷줄에 앉아 있는 권수창(52·가명)씨도 같은 업체에 지원했다. 김씨와는 경쟁자인 셈. 권씨는 나일론 염색가공업체에 말단 생산직으로 입사해 10년 이상 일하면서 생산과장까지 올라갔지만 공장의 중국이전 결정으로 97년 권고 사직했다. 퇴사 후 “전공을 살리고 싶어서” 백방으로 길을 찾던 그는 안산행을 택했다. 대구 지역의 국비지원 직업훈련원에는 섬유관련 기술을 익힐 수 있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


안산에서 1년 동안 봉제 기술을 익혀 다시 대구로 내려온 그는 지난해에 성서공단의 한 커튼 제조업체에 입사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다니던 회사마저 30명의 생산직 직원을 모두 줄이고 물량을 중국으로 돌렸다. 결국 권씨는 애써 배운 봉제기술도 써보지 못하고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섬유업체 중견간부에서 보험 판매원으로
또 다른 중년의 구직자 최종길(51·가명)씨. 직업전문학교에 총무직으로 지원한 그는 2000년 파산한 대하합섬의 중견간부 출신이다. 회사 파산 이후 2년간 파산업무를 보던 그는 2002년부터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섰다. 그래도 ‘해 본 도둑질’이 낫다고 원사 대리점을 차렸다 원단 경기가 추락하면서 원금도 건지지 못하고 가게를 정리했다.

 

남은 돈으로 꽃집을 차렸지만 생전 처음 하는 장사는 쉽지 않았다. 꽃집을 정리하고 나서는 보험회사도 다녀 보고 친구가 하는 회사에서 총무일을 봐주기도 했다. 최씨는 “섬유산업이 사양화되면서 섬유 쪽 일을 하던 사람들에게는 재취업 문이 전혀 없다”며 “생산직 중에는 단순노동이나 구멍가게를 하는 게 그나마 제일 잘 된 사례일 것”이라고 말했다.


섬유회사 다닐 때의 얘기를 좀 더 해달라는 부탁에 굳게 입게 다물고 마는 그는 “꼭 일자리를 구하라”는 작은 응원에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채용 서류에 눈을 고정시킨다.

 

반 토막 난 섬유 종사자, 지금은 어디에?
이날 채용행사장에서 북적대는 청년들 사이에 마치 철지난 벽화처럼 어색하게 섞여 있는 중년 사내들은 모두 과거 섬유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하나 같이 “잘 나갈 때는 정부나 기업이나 모두 미래를 대비하지 못했고, 이미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고 보니 알아서 일자리를 찾아 나서라는 식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산업 구조조정은 활발했지만 그에 맞는 전직 지원, 재취업 대책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섬유산업이 최대 호황기를 누리던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대구지역의 섬유산업 종사자 수는 10만 명에 달했다. 99년 이후 섬유산업을 주도하던 지역의 대기업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섬유산업 전체가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종사자수는 반 토막이 났다.


그렇다면 어림잡아 5만 명에 달하는 섬유산업 종사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채용행사가 한창이던 대구종합고용안정센터에서 만난 중년의 구직자들은 이들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준다. 전직 지원과 재취업을 위한 지원이 전혀 없던 시절 무작정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들이 갈 곳이라고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막노동’이나 ‘자영업’이라고 포장되는 ‘구멍가게’들 뿐이었다.

 

일자리 찾아 서울로, 택시회사로
한국노동연구원이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전국 6대 도시의 노동시장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대구는 IMF 이후 제조업 비중 감소폭(-15.6%)이 가장 컸고 서비스업 비중이 가장 큰 폭(15.7%)으로 높아졌으나 서비스업 취업자는 오히려 감소해 산업구조 변화가 고용 창출로 이어지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분석에 따르면 이 기간 중 대구에서 서울로 직장을 옮긴 사람들 중 58.7%가 대구에서는  섬유산업 등 제조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서울로 올라와서도 계속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14%에 불과했고 63%가 서비스업에서 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연고를 옮겨 택시운전사로, 포장마차 주인으로, 공사장으로, 얼마 안 남은 퇴직금을 까먹고,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동안 국가는 고용서비스 개선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었다. ‘맞춤형’, ‘지역 밀착형’을 거쳐 올해 ‘고용지원서비스 선진화’ 사업까지, 고용안정센터 등의 기능을 제고하고 직업훈련 시스템을 다시 세우겠다는 공언은 매년 반복됐다.
하지만 막대한 예산과 정책 속에서도 이들은 갈 길을 찾지 못했다.

 

고용서비스 개선, 화려한 취업률 뒤의 그림자
대구종합고용안정센터의 경우 올해 5월 노동부가 추진한 고용지원서비스 선진화 사업의 일환인 시범센터운영 기관으로 선정돼 지난 11월까지 다양한 선진화 프로그램을 개발, 시행했다. 이 결과 전국 6개 시범센터 중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 받았다.

 

시범센터 운영 3개월째인 7월말까지 센터를 통한 취업자 수가 월평균 408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월평균 237명에 비해 72% 증가했고 또 구인 신청자와 구직 신청자도 이 기간 각 월평균 956명, 2천558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465명, 1천193명에 비해 각 105%, 114% 증가했다.


하지만 통계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점이 드러난다. 취업자의 연령대를 살펴보면 전체 취업자 중 20~30대 비중이 81.9%로 압도적이다. 이는 매주 2회씩 대학별 순회를 통해 현장 채용 행사를 벌인 결과다.


선진화센터 출범 시 운영 목표에는 청년층 취업 외에도 직종별, 대상별로 구직 서비스를 달리 하는 ‘맞춤형 취업행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서 성서·달성·진량 공단 등 주요 공단을 찾아가 기업의 현장인력 수요에 맞는 공단별 취업한마당 행사를 2주 단위로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년층 취업 실적에 비해 공단별 채용행사의 실적은 매우 낮다. 5월에서 11월까지 센터를 통한 전체 취업자 수 4249명 중 공단별 채용행사를 통해 취업한 수는 968명에 그쳤다. 그나마 공단별 채용행사의 경우에도 실업자 중 과거 섬유산업 종사자에 대한 대책을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맞춤형’ 취업 대책이라지만 지역 실업자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층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 지에 대한 사전 조사 작업이 부족했던 탓이다. 고용서비스 선진화의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지역 노동시장에 대한 진단도 턱없이 모자랐다.
과거 지역의 주력산업 종사자들이 어떤 직종에서 일하고 있는지와 이들의 전직, 재취업을 위해 필요한 요소 등 지역 노동시장에 대한 분석은 지난 2001년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조사 분석한 것이 가장 최근 자료일 정도.

 

지역 노동 시장 빠진 고용서비스는 무용지물
대구종합고용안정세터 고용선진화 T/F팀 관계자는 “고용서비스 선진화 시범센터 사업은 지역 내 고용정보 유통과 종합적 인력수급체계 구축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 산업의 유휴인력만을 따로 챙길 수는 없었다”며 “사양산업에 대한 지원의 경우 과거 고용안정센터가 추진해 왔던 기업구조조정 지원 프로그램 등으로 커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분석은 사뭇 다르다. 대구·경북연구원은 김모 연구원은 “주력산업인 섬유산업이 고부가가치화에 실패하면서 시장에서 강제퇴출 단계에 와 있고, 직장을 잃은 근로자들이 식당·택시 등 단순 서비스업 시장으로 몰려 과당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지역 노동시장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라며 “고용서비스 선진화를 위해서는 지역 노동시장에 대한 진단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이철수 정책기획국장은 “지난 5년간 정부가 섬유산업 부흥을 위해 추진한 밀라노 프로젝트에 들어간 6780억 원의 예산 중 섬유 노동자의 재취업 대책에 쓰인 예산은 한 푼도 없다”며 “이들의 재취업과 기술훈련, 전직 지원 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고용서비스를 선진화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 없던 취업한마당 행사도 끝나고 고용안정센터 문을 나서는데 경비업체에 지원했던 최씨와 다시 마주쳤다. ‘잘 될 것 같냐’는 질문에 쓴웃음만 짓던 그는 “나보다 한 살이라도 더 젊은 사람이 되겠지”라며 옷깃을 여민다.
단순 취업률 높이기 식의 청년층 실업대책과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고용서비스 선진화 대책의 그늘에는 여전히 ‘왕년의’ 섬유노동자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