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혈세로 살린 기업 매각 ‘새길’ 열리나
국민 혈세로 살린 기업 매각 ‘새길’ 열리나
  • 승인 2005.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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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 방어 위한 노동조합 대응 사례

브릿지증권, 토종금융자본과 노조 전략적 선택 만나 극적 회생

노사 공동의 경영권 방어·새로운 노사관계 가능성 제시해

“더 이상 속수무책으로 앉아 좋은 주인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지는 않겠다.” 내년 상반기 중 매각을 앞둔 대우건설 등 5개 기업 노동조합들이 공적자금이 들어간 기업의 매각에 노동자와 임직원 등 기업 구성원과 국민의 참여를 보장하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이 제시한 방식은 우리사주조합을 통해 매각 기업의 지분 일부를 인수하는 것.


대우건설, 대우조선해양, LG카드, 브릿지증권 등 4개 기업 노동조합은 지난 10월 서울 명동 브릿지증권 본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사주조합 인수 참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우리사주 공대위)를 공식 결성했다.


이날 회견에서 대우건설노동조합 정창두 위원장(공대위 공동 대표)은 “IMF 이후 수많은 기업들이 투기적 외국자본과 재벌에 매각됐지만 결과는 어떤가”라고 되묻고 “고용과 투자를 확대하기보다 자산매각을 통한 투자금 회수에만 열을 올린 투기자본과 재벌들이 결국은 국민 경제를 망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 대우자동차 매각 추진 시에 ‘국민기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가 흐지부지된 것과 최근 대우종합기계 노동조합이 지분 참여를 주장한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여러 기업 노조가 연합해 매각과정 참여를 선언한 것은 처음이다. 내년 중 매각 예정인 이들 기업은 건설과 조선, 금융 등 각 산업에서 업계의 지형도를 바꿀 수 있는 대형 기업들이다. 여기에 정치권과 시민단체들도 목소리를 보태고 있어서 이들의 행보가 공적자금 투입 기업의 매각에 있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채권단, 금융권이 우리사주조합을 통한 인수 참여에 부정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데다 과거 우리사주제도를 통한 소유와 경영의 분리 시도가 성공한 사례가 많지 않아 여론도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상태다.

 

인수합병 반대 투쟁서 새 주인 찾기로
이런 가운데 지난 98년 영국계 펀드 브릿지인베스트먼트홀딩스(BIH)에 인수됐다 청산위기에 몰린 브릿지증권 노조가 직접 인수자를 찾아나서는 한편 우리사주제도를 이용해 인수자와 컨소시엄을 구성, 벼랑 끝에 몰린 회사를 회생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BIH는 브릿지증권을 인수한 후 다섯 차례 이상의 유상감자로 자본금을 대거 유출하면서 증권업계 중대형 업체였던 브릿지증권을 점포수 45개에서 9개, 직원수 840명에서 180명의 ‘미니 증권사’로 전락시켰다. 급기야는 지난 2월 1350억원의 자본금을 회수한 후 리딩증권에 회사를 매각하려고 시도하다 금융감독원의 인수합병 불승인 결정에 부딪혔다. 인수합병이 결렬되자 BIH는 실질적인 청산 절차에 들어갔다. 


청산위기의 회사를 살리겠다고 나선 것은 노동조합. 이때부터 노동조합은 ‘인수합병 반대 투쟁’에서 ‘새주인 찾기’로 발 빠르게 대응을 전환하고 증권회사 인수 계획을 밝힌 금융회사 등을 밤낮으로 찾아다니며 직접 인수자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투기 자본의 전횡 속에 폐허가 되어버린 증권사를 선뜻 인수하겠다고 나서는 업체가 없었다.

 

우리사주조합과 토종금융자본의 컨소시엄 구성
이때부터 노조는 우리사주제도를 이용해서 지분의 일부를 확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증권노조 브릿지증권지부 강승균 지부장은 “단순히 청산 반대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노조가 실현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추진하는 것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다”며 “설령 새 인수자가 나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분의 10% 이상을 인수해 경영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가능한 구조를 만들 구상이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노동조합의 노력은 토종금융 자본의 육성을 목적으로 출범한 구조조정 전문회사 골든브릿지(대표 이상준)를 만나면서 탄력을 받았다. 골든브릿지는 우리사주조합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BIH 지분 77%를 인수하기로 했다. 1250억원에 달하는 인수대금 중 850억원은 유상감자를 통해 충당하고 나머지 400여억원을 인수대금으로 지급했다. 이로써 청산위기에 몰렸던 브릿지증권은 토종금융자본과 전 구성원이 함께 출자한 새로운 회사로 출발을 하게 됐다.


출범 당시 골든브릿지-우리사주조합 컨소시엄은 차입형 우리사주제도를 통해 50억원을 대출 받아 우리사주조합이 지분의 12%를 보유토록 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BIH가 청산 계획을 발표한 후 증권거래소가 브릿지증권의 상장을 폐지해 버려서 금융권이 대출을 꺼리는 상태였다.


노조는 또 한번의 결단을 내렸다. 남은 임직원 전원이 퇴사 뒤 재입사하는 절차를 거쳐 명예퇴직금 일부를 출자하거나 개인적으로 대출을 받아 인수금액에 10억원을 보태 지분 2%를 보유한 것. 노동조합이 이런 용단을 내릴 수 있었던 데는 함께 회사를 살리겠다는 전 구성원의 의지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근로자복지기금에서 천만원 이상의 대출을 받아 우리사주에 참여한 이수창 대리는 “개인적으로 대출이라는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우리의 눈물과 땀으로 세운 회사가 하루 아침에 공중분해 되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며 “출자를 통해 회사의 전 구성원이 실질적 주인이 된 만큼 회사를 키우기 위한 노력도 더 많이 기울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인수합병 보호막에 경쟁력 책임지는 노조 되겠다
브릿지증권의 사례는 청산 위기의 회사를 노조가 나서 구했다는 의의 외에도 새로운 노사관계 모델의 가능성을 열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월 취임한 브릿지증권 이상준 사장은 “노동자와 전 구성원을 기업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새로운 노사 상생모델을 위해  우리사주조합의 지분율 확대와 이사추천권 부여 등을 통해 노동자, 주주, 경영자가 삼위일체가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노동조합 강승균 지부장도 “우리사주조합의 지분 참여는 공격적 인수합병에 대한 보호막을 두텁게 할 수 있고  노조도 회사 운영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어 경쟁력도 높아질 것”이라고 밝은 전망을 내놨다. 이제 막 시동을 건 브릿지증권의 앞길에는 여전히 장애물도 많다. 증권거래소가 브릿지증권에 대한 상장폐지 결정을 철회하지 않고 있어 우리사주조합의 금융권 차입이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 현재 노조와 회사는 증권거래소의 상장폐지결정 철회를 요구하는 소송을 진행 중이다.


금융감독원 증권감독국 허영민 과장은 “상장폐지 철회가 당장 어려운 것은 회계연도상 6월에 감사보고서를 받도록 되어 있기 때문인데 브릿지증권의 경우 상장폐지를 유지할 만한 실질적 사유가 사라졌으므로 증권거래소 쪽과 예외적 경우로 처리할 수 있는지 여부를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이미 11월부터 법제화된 차입형 우리사주제도에 대한 인식 부족과 재경부 등의 부정적인 시각도 문제다. 증권노조 브릿지증권지부 김필수 수석부지부장은 “노사정위원회 합의사항과 정부 정책적 차원에서 이미 법제화된 우리사주제도의 실질적인 시행을 위한 보완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제안했다.

 

일부 기업 노사 의견 접근, 채권단이 향방 좌우
투기자본에 의해 폐허가 되다시피 한 브릿지증권이 토종금융자본과 노동조합의 전략적 선택을 만나 생존의 활로를 찾자 우리사주를 통한 매각 참여를 요구하고 있는 우리사주 공대위도 탄력을 받는 모습이다. 이미 구체적 자금 출연 방식까지 고민하는 등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는 대우조선해양은 물론 대우건설도 노사가 상당한 접근을 이뤘다.

 

그간 매각 방향에 대해 입장 표명을 자제하던 대우건설 박세흠 사장은 “매각 차익을 노린 투기자본을 막기 위해서는 국내외 어디든 자금출처보다는 자금의 성격을 따져야 한다”며 “우리사주조합의 인수 참여는 애사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경영권 획득이 목적이 아니어서 정부에서 생각하는 매각 목적과 일치한다고 본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간 기업의 회생에만 급급한 나머지 국가 기간산업과 국민혈세로 살린 기업을 투기자본, 부실자본을 가리지 않고 매각한 끝에 국민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는 것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입증됐다. 공적자금 투입 기업 매각의 ‘막차’를 탄 대우계열사와 하이닉스반도체, LG카드 등은 하나같이 국가 경제를 좌우하는 중요한 산업에 속해 있다.


경영권 방어와 새로운 노사관계를 위해서 전 구성원이 나서고 있고, 새로운 가능성도 일부 열렸다. 이들 기업의 구성원은 물론, 정부와 채권단의 선택이 새로운 가능성을 키울 수도 죽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