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화려한 전성시대
원더풀~ 원더풀~ 아빠의 화려한 전성시대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1.03.30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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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양복과 함께 한 40년…한 사람을 위한 정성
기성복에 밀려 사라지는 맞춤양복 아쉬워
[명장열전] 양복명장 백운현 골드핸드 대표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인마, 양복점이 아니라 라사야, 라사. 우리는 절대 양복점이라고 안 해.”

연극 <시동라사>를 보면 넘쳐나는 기성복 때문에 5년째 양복 한 벌 주문받지 못한 주인공이 소주를 마시며 위와 같은 푸념을 늘어놓는다. 20년 전 만해도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양복·라사’라는 간판은 이제 참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맞춤양복점을 뜻하는 ‘라사(羅絲)’는 포르투갈 어로 두터운 고급 모직물을 뜻하는 ‘라샤(raxa)’라는 단어에서 차음했다고 한다. 유럽을 일컫는 ‘구라파’라는 단어에서 라 자를 가져오고 거기에 실 사 자를 붙여 그 의미도 얼추 맞아 떨어진다.

서울 양재동에서 맞춤양복점을 운영하는 백운현 명장은 ‘라사’의 화려한 전성기를 고스란히 경험한 산 증인이다. 점차 사라져가는 맞춤양복점들에 대해 아쉬워하면서도 수십 년 경력의 전문 기술을 작은 아들인 백승민(30) 씨에게 가르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한다. 아래 기사는 백운현 명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백승민 씨 시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15살에 견습공으로 시작…7년 후 국제기능올림픽 금메달


맞춤양복점 ‘골드핸드’는 요란하고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대로변에서 건물 안쪽으로 들어오면 세 평 남짓 아담한 매장을 찾을 수 있다. 옷걸이에 걸린 양복 재킷과 넥타이, 구두, 고풍스러운 느낌의 수트케이스, 해외 엽서와 사진 등으로 쇼윈도를 점잖게 꾸며 놓은 매장이다. 벽에 걸린 상장과 오래된 사진들, 선반 위에 놓인 트로피들이 아버지 백운현 명장의 ‘화려한’ 경력을 장식하고 있다.

아들인 나는 작년부터 아버지께 일을 배우고 있다. 아버지의 연세는 올해로 쉰여덟. 열다섯 살 때부터 양복 일을 배우기 시작해 40년이 훌쩍 지났다. 경기도 파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일을 시작하셨다. 6남매가 모두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할 만큼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집에서 세를 살던 아저씨 한 분이 ‘양복장이’ 일을 하는 분이었고 그 분을 따라 견습공으로 일을 배우러 간 작업장에서 아버지는 깜짝 놀라셨다고 한다. 바느질이라면 여자들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삼사십 대 ‘아저씨’들이었다. 다들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하신다.

“요즘 학생들은 여러 가지 일들을 다양하게 경험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잖니? 그런데 예전에는 참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단다. 서울 같은 대도시면 또 모르겠지만 아빠가 자란 시골에선 특히 그랬어. 기술을 배운다고 하면 고작해야 철공소 일 이런 데 밖에 없었지.”

아버지는 그렇게 시작한 양복 기술을 좋은 스승 밑에서 열심히 배웠다고 하신다. 그리고 국제기능올림픽에 도전해보라는 조언을 듣고 금메달을 목표로 노력하셨다. 세계대회 출전을 위해선 지방 기능경기대회와 전국단위 기능경기대회를 거쳐야 했다. 1972년에 경인지방 기능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고 이듬해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따 드디어 1975년에는 스페인에서 열린 28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출전하게 되셨다.

당시 한국 선수들의 기량은 유럽 선수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다. 국제기능올림픽에는 스무 살 미만의 선수들만 출전 가능한데,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일을 배우기 시작한 외국 선수들은 기껏해야 3년 정도의 경력을 갖고 있는데 반해 우리 선수들은 어린 나이부터 일을 배우기 시작해 6, 7년의 경력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국제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대단히 비장한 각오로 경기에 임했다고 아버지는 회상하셨다. 김연아 선수나 박태환 선수 등 요즘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의 젊은 선수들을 TV를 통해 지켜보며 “참 밝고 예쁘다”고 감탄하시기도 한다. 그에 반해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시절, 학업도 채 마치지 못하고 일을 배우기 시작해서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해외여행’까지 경험하게 된 70년대 우리 선수들은 꼭 1등을 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그와 비례해 선수들이나 경기 결과에 대해 국민적인 관심도 대단히 높았다. 국제대회 출전을 앞두고 선수들이 합숙 훈련을 하는 작업장에는 ‘높은 양반’들이 수시로 들러 경과를 살피고 격려하기도 했다. 매장에 걸려 있는 사진에서는 작업물을 다림질하고 있는 젊은 아버지를 격려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아버지가 우승하고 귀국했을 땐 공항에서부터 카퍼레이드를 하기도 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양복으로 바뀐 아버지의 인생…앞으로 10년은 더 배워야 한다고?


맞춤양복도 그 시절 전성기를 누렸다. 기술이 좋은 전문가들은 돈도 많이 벌었고 양복점들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맞춤양복의 화려한 시절은 아버지의 오래된 사진만큼이나 빛이 바랬다. 90년대 들어 대기업들이 기성양복 시장에 진출하면서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제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가일 수밖에 없는 맞춤양복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갔다. 아버지는 서울 종로구 소공동 일대에 맞춤양복점들이 거리에 즐비하던 시절의 얘기를 가끔 꺼내신다. 그러나 기성양복의 유행으로 맞춤양복점은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워 점점 골목 안쪽으로 옮겨가다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아버지가 가장 안타까워하시는 점은 수십 년간 손끝으로 익힌 기술과 노하우가 후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점점 사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맞춤양복이 잘 나가던 시절, 전문가들이 힘을 모아 후배 양성과 기술 전승을 위해 노력했더라면 상황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쉬워하시기도 한다.

아직 일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아버지의 기술을 물려받으려면 까마득한 것 같다. 투정이라도 부릴라치면 아버지는 ‘아직 십년은 더 배워야 손에 익을 것’이라며 미소를 지으신다. 막막하게 들리지만 그 얘기는 허풍이 아닌 거 같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구두장인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9살 때부터 구두를 만들어오다가 나중엔 미국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인체해부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평생 관심을 갖고 보니까 나중엔 발만 봐도 몸 전체의 밸런스와 건강 상태까지 맞출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맞춤양복을 평생 만들어 오신 아버지도 그에 못지않다. 아니, 어찌 보면 구두보다 신체 구석구석에 대해 세밀히 알아야 하니 한 수 위라고 봐야할까?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맞춤양복은 젊은 사람들보다 연배가 지긋하신 분들이 선호한다. 손님들의 체형을 오랫동안 관찰해 오신 아버지는 5, 60대가 되면 확실히 사람의 체형이 무너진다고 설명하신다. 신장이 줄고 어깨나 허리가 굽거나 관절 등이 안 좋아져서 몸의 좌우 균형이 달라지기도 한다. 오래된 단골손님들의 경우 나이가 들어가고 체형이 변해가는 과정을 마치 주치의처럼 지속적으로 세밀히 관찰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런 경험에서 오는 지식은 사실 십 년의 노력으로도 얻을 수 없다.

젊은 사람들이야 체형이 곧기 때문에 미리 정해진 치수로 대량 생산되는 기성복을 입어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이렇게 체형이 변한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자신의 몸에 꼭 맞춰 지은 옷이 훨씬 더 편하다. 옷을 맞추는 과정에서 손님들의 기호나 의견을 꼼꼼히 체크하는 것은 기본이다.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문진(問診)을 통해 병을 진단하는 데 참고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너무 신경써야할 것이 많다고 입술을 비죽거릴 때마다 아버지는 자신이 기술을 배우던 시절의 얘기를 설교처럼 반복하신다. 아버지는 마치 중세시대 도제처럼 일을 배우셨다고 한다. 제대로 못하거나 게으름을 피울라치면 얻어맞거나 호되게 욕먹는 일은 다반사였다. 그렇다고 해서 스승이나 선배들이 제대로 붙잡고 일을 하나하나 가르쳐 준 것도 아니었다.

부지런히 소소한 잡일부터 맡아서 하는 가운데 어깨너머로 요령껏 얻어 배우고는 퇴근 후 늦은 시간까지 연습을 거듭했다. 요새 젊은이들은 소리만 한 번 질러도 적성에 안 맞아 그만두겠다며 나가는 것에 비하면 과거엔 스승으로부터 ‘그만 하산하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 자진해서 일을 때려치우는 경우는 없었다고 가끔 아버지는 흥분하시기도 한다. 어쩌겠는가, 세상이 그렇게 바뀐 것을.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어린 나이에 견습공으로 들어가 일을 배운다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공감이 되기도 한다. 비록 그 시절에는 다들 어려웠다고 말씀하시긴 하지만 말이다. 아버지께 넌지시 옛날 일 배우던 당시에 대해서 물어보면 피식 웃으시며 ‘울기도 많이 울었고 정말 힘든 것도 많았다’고 털어 놓으신다.

비록 생계를 위해 학업도 포기하고 시작한 일이지만 아버지에게 양복 일은 천직이라고 할 만큼 적성에 잘 맞았다고 한다. 일감이 생길수록 재미를 느꼈고, 그래서 밤새워 일하면서도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먹고 살기 위해 일거리를 찾았지만 양복으로 인해 인생이 바뀌게 됐다고 아버지는 단언하신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20군데를 재고 150조각 맞추는 ‘조형예술’


평소 아버지께 듣던 풍월이 있으니 맞춤양복에 대해서 더 얘기를 풀어 놔 보자. 기성 양복점을 가면 스타일마다 사이즈마다 수십 벌, 수백 벌의 옷이 매장 가득 걸려 있는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맞춤양복점에선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완성된 옷이 아니라 각종 원단이 종류별로 진열돼 있다.

손님이 찾아오면 우선 스타일에 대한 상담과 함께 옷에 쓰일 원단을 고르게 된다. 원단의 가격에 따라 완성된 양복의 값은 천차만별이다. 손님의 기호나 원하는 가격대에 맞춰 적당한 원단을 추천하기도 한다. 골드핸드의 경우 130만 원 대부터 300만 원 대까지 가격이 책정돼 있다. 기성복이 10만 원 대도 있는 것에 비하면 확실히 고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맞춤양복의 전성기였던 70년대 중반에는 양복 한 벌이 대기업 임원의 한 달 월급보다도 비쌌던 것에 비하면 물가가 오른 것에 비해 양복 값은 많이 정체된 편이다.

그 뒤에 체형에 따른 신체사이즈를 측정하는 채촌(採寸) 과정을 거친다. ‘채촌’이란 단어는 일본식 한자어인데 서구의 봉제기법이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이 채촌은 맞춤양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정으로 무려 20여 곳 넘게 측정하는 경우도 있다.

채촌한 치수를 가지고 단 한 벌을 위한 패턴(본)을 떠서 원단을 잘라 가봉을 한다. 임시로 바느질 해 고정시킨 옷을 손님에게 입혀 보고 재차 체형에 맞게 보정하는 과정이다. 여기까지의 과정이 매장 안에서 이뤄지게 되고 보정이 끝난 가봉 옷은 소공동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완성품으로 마무리 짓는다.

남성 양복의 생명은 어깨 부분이다. 팔을 올리거나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없어야 할뿐 아니라 멋들어진 스타일이 어깨 부위에서 좌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문용어로 ‘견봉점’이라고 부르는 어깨관절 부위의 채촌 과정이 대단히 중요하다. 양복 상의의 무게는 보통 650g 정도 되는데, 옷의 무게 중심이 목과 척추 방향으로 안쪽에 잡혀야지 바깥쪽으로 양 견봉점 부근에 무게중심이 잡히는 경우엔 옷이 무겁고 불편해진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게 채촌 후 패턴을 그릴 때부터 머릿속에 계산돼야 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채촌을 하고 패턴을 그리는 과정을 가르쳐주시며 아버지는 항상 “비록 평면인 종이 위에 패턴을 그리게 되지만 사람의 몸은 입체로 돼 있음을 염두에 두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옷 한 벌을 짓기 위해 여러 조각의 패턴을 그리는 것이다. 보통 많게는 150조각이 합쳐져 상의 한 벌이 완성된다. 움직일 때 편안함은 물론, 시간이 지나도 흐트러짐 없이 제 모습을 유지해야 하므로 패턴을 그리는 2차원의 작업이 4차원의 경지로 끌어올려지는 셈이다.

43년 평생을 바친 일이 앞으로도 계속 후배들의 손에서 명맥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게 아버지의 꿈이다. 꾸준한 노력의 결실로 2007년 기능인들의 최고 영예인 대한민국 명장 자리에 오르고, 역시 같은 해 노동부가 선정하는 기능 한국인으로 뽑혔지만 아버지는 남들에게서 받은 것을 보답하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벌써 20년 넘게 일주일에 한 번씩 안양교도소를 다니며 재소자들에게 기능을 가르치는 봉사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비록 맞춤양복점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이지만 매년 1만 명씩 배출되는 의상학과 졸업생들 중에서 남성복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아버지는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셨다고 한다. 당차고 적극적인 어린 학생들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궁금한 점을 물어보면 바쁜 와중에도 아버지는 이런 저런 상담으로 관심을 쏟는다.

“예전 맞춤양복 전성기 때 모습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겠지. 하지만 양복기술이 사라지진 않을 거야. 선배들에게 배우고 내가 평생 닦은 전문기술을 후배들이 이어 받아 빛을 보게 해 주는 게 아빠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