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소리에 취해 걸어온 40년 한 길
기타 소리에 취해 걸어온 40년 한 길
  • 박석모 기자
  • 승인 2011.04.2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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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렴한 연습용 악기라고 정성까지 저렴하랴
자신만의 소리 찾아 공방을 섭렵하다
[명장열전] 클래식기타 장인 김제만

학창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기타(Guitar)를 뚱땅거리며 자기만의 흥에 취했던 기억이 있으리라.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같은 연주자들의 신들린 듯한 손놀림을 보면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들 중에서도 기타를 잘 연주하는 친구는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야유회라도 갈라치면 기타는 빠질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그만큼 기타는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악기 중의 하나였다.

그런 기타는 클래식 음악과는 거리가 있는 악기처럼 생각되기 십상이다. 심지어 합창단을 지휘했던 기자의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은 기타를 악기로 인정하지도 않았을 정도다. 그만큼 기타는 우리에게 친숙한 악기인 반면, 클래식 음악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악기로 치부되기 일쑤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어느 악기 못지않게 기타로도 클래식 음악을 훌륭하게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묻지마 상경, 기타와 만나다

클래식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천상의 소리를 꿈꾼다. 마치 바이올리니스트라면 전설적인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꿈꾸듯이.

우리나라에도 적잖은 장인들이 클래식기타를 만들고 있다. 20여 년 전의 아련한 향수를 더듬으며 클래식기타를 만드는 장인들 중 첫 손에 꼽히는 김제만 명장을 만났다. 김제만 명장이 운영하는 ‘크라우스 공방’이 위치한 경기도 양주의 한 시골마을. 대낮인데도 오가는 인적이 뜸할 정도로 한적하다. 낡고 허름한 건물에 입주해 있는 크라우스 공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특유의 나무향이 콧속을 간질인다. 반쯤 만들어진 울림통들은 그다지 넓지 않은 공방을 절반이나 차지한 채 건조되고 있다.

40년 넘게 기타를 만들어온 김제만 명장이 이 공방을 연 지는 채 20년이 안 됐다. 그동안 기타 공장과 다른 이들의 공방을 전전하던 김 명장은 지난 1996년에야 비로소 자신의 공방을 열었다. 비록 공방의 역사는 짧지만, 김 명장의 손끝에 익은 기술은 김 명장을 단숨에 명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어떤 소리가 좋은지 알아야 클래식기타를 제대로 만들 수가 있어요. 하지만 나도 클래식기타 소리를 안 것은 이제 겨우 15년 정도밖에 안 됩니다. 기타공장을 전전하던 당시에는 외모를 매끈하게 만드는 데에만 신경 썼지요.”


15년이라면 김 명장이 크라우스 공방을 연 때와 대략 일치한다. 바꿔 말하면 소리를 알기까지 김 명장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클래식기타를 만들지 않았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김 명장이 처음 기타를 만들기 시작한 게 40여 년 전이니 그동안은 자신만의 소리를 찾는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대구가 고향인 김 명장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친구와 함께 이른바 ‘묻지마 상경’을 했다. 그때가 1969년. 당시 대구에 있는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일하던 김 명장이 상경한 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받은 1달치 월급 4천 원 남짓이 그가 가진 돈의 전부였다.

서울에 올라오기 전 김 명장은 자신이 기타를 만들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노래를 좋아했던 그에게 그때까지 기타란 그저 흥을 돋워주는 도구에 불과했다. 직접 기타를 만져본 것도 자동차부품 공장에 다닐 때 공장 앞 기타 학원에서 서너 달 연주를 배운 것이 전부였다.

수중에 가진 돈이 떨어져갈 무렵, 김 명장은 청계천 근처의 직업소개소를 찾았다. 그때 소개받은 곳이 장위동에 있던 기타 공장이었다. 마침 서너 달 동안 학원에서 기타 연주를 배웠던 터라 기타 공장이라고 하니 눈이 번쩍 뜨였다. 10㎞가 훨씬 넘는 길을 걸어 찾아간 공장은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려고 준비하던 곳이었다.

당시는 기타 붐을 타고 여기저기 우후죽순 격으로 기타 공장이 생기던 때였다. 이른바 통기타의 유행이 시작된 것이다. 기타 공장들이 여기저기 들어서면서 같이 일하는 이들을 따라 김 명장은 여러 공장을 전전했다. 그렇게 전전하던 공장들에서는 기타 모양만 만들어지면 출고했다. 거의 날림에 가까웠다. 꼼꼼한 성격의 김 명장에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김 명장의 손을 거치면 도무지 능률이 나지 않았다. 기타 공장 사장들은 그런 김 명장을 탐탁찮게 여겼고, 다른 공장을 소개해주며 내보내기 일쑤였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소리,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김 명장이 기타 제작기술을 차분히 배우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게 기타 공장을 전전하다 비로소 정착한 곳이 모래내 근처에 공장이 있던 맘보기타(현 가야악기)였다. 맘보기타 김대현 사장도 꼼꼼한 성격이어서 김 명장과 잘 맞았고, 기타도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 한 예로 당시 대부분 합판을 가공해 앞판을 만들었는데, 맘보기타에서는 단판을 썼다. 김 명장은 맘보기타에서 일하던 10년 동안 비로소 기타 제작 기술을 제대로 익힐 수 있었다.

클래식기타를 처음 만든 것도 맘보기타에서 일할 때였다. 지금이야 클래식기타를 만드는 공방이 많이 생겼지만, 당시만 해도 클래식기타 제작은 배울 데가 없었다. 하지만 통기타를 오랫동안 만들었기 때문에 클래식기타를 만드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 클래식기타를 만들 당시만 해도 김 명장에게 중요한 것은 소리가 아닌 외모였다. 그러나 클래식기타의 생명은 모양이 아닌 소리에 있었다. 외모만 매끈하다고 해서 좋은 소리가 나는 건 아니었다. 통기타와는 달리 나일론 줄을 사용하는 클래식기타는 소리도 통기타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울림통을 만드는 나무의 재질이나 두께에 따라 소리도 달랐다.

“소리를 안다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에요. 명품 기타의 소리도 들어보고 많이 접해봐야 합니다. 저는 연습용 악기를 만들면서 자꾸 이렇게 저렇게 응용을 많이 해요. 그렇게 해서 지금의 소리가 나오게 된 거죠.”

김 명장은 20여 년 전만 해도 소리를 알고 클래식기타를 만드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한다. 불과 20년 사이에 우리나라 클래식기타 제작자들은 외국의 유명한 장인에게 가서 배워오기도 하고 초청해서 배우기도 했다.

김 명장도 직접 외국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카즈오 사토 씨(일본 출신의 독일 기타 명장)나 헤르만 하우저 3세(기타 명장 가문인 독일 하우저 가문의 전승자) 등 유명 장인들로부터 클래식기타 제작에 대한 노하우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김 명장은 외국의 유명 장인으로부터 직접 배우는 것보다 외국의 장인들이 가지고 있던 도면을 입수하는 데에 더 힘을 쏟았다. 도면을 보면서 그대로 만들어보기도 하고 응용도 하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축적해 나갔던 것이다.

김 명장은 자신만의 소리를 얻기까지 10년 동안 몸담았던 맘보기타를 그만두고 수제기타 공방을 옮겨 다니며 노하우를 갈고 닦았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수제기타를 만들었던 고 엄상옥 씨의 공방에서도 일하기도 했다. 1960년 숭례문 보수공사 당시 나온 금강송을 이용해 제작한 클래식기타로 유명했던 고 엄상옥 씨는 이미 연로해 직접 기타를 만들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엄태창 씨가 기타를 만들었다. 김 명장과 엄태창 씨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며 1989년부터 5년간 함께 일했다. 여러 공방들을 거치며 자신의 노하우를 쌓았던 김 명장은 마침내 1996년에 지금의 자리에 자신의 공방을 열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명장 가문을 꿈꾸다


예전에는 울림통에서부터 헤드(줄감개가 있는 부분)까지 김 명장이 모든 걸 만든 적도 있었다. 지금은 울림통만 직접 짜고 나머지 부분은 전문 업체에 맡긴다.

“지금도 울림통은 직접 다 짜고 있어요. 울림통을 잘 짜야 소리가 잘 나거든요. 연습용 악기까지 일일이 울림통을 짜는 곳은 우리밖에 없지요. 연습용 악기라도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요. 브리지(울림구멍 아래 줄을 걸어주는 받침부분)만 해도 일반 공장에서는 쉽게 굳는 강력접착제로 붙이는데, 여기서는 굳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도 나무본드를 써서 단단하게 붙입니다. 기타 연주하다 보면 브리지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잖아요? 우리 제품은 15년이 됐지만 아직까지 브리지가 떨어진 건 없어요.”

김 명장은 비록 연습용 기타라 하더라도 허투루 만들지는 않는다. 연습용 기타는 가격이 저렴하지만, 재질 때문에 가격 차이가 날 뿐 악기에 들이는 정성은 고급 제품과 차이가 없다. 김 명장의 기타를 한 번 써본 사람이 다시 찾는 이유는 연습용 기타 하나까지도 온 정성을 다하기 때문이리라.

김 명장이 기타에 쏟는 정성은 40여 년이 되도록 한결같은 그의 출근시간에서도 드러난다. 김 명장은 지금도 매일 아침 8시면 공방의 문을 연다. 김 명장이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시각은 보통 밤 10시경. 자정을 훌쩍 넘겨 작업하는 날도 드물지 않다. 그런 40년 세월의 흔적일까? 김 명장의 손에는 지문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지경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옆에 있던 김 명장의 부인은 얼마 전 결혼하고 나서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여권을 발급받으러 갔는데 지문이 찍히지 않아 애를 먹었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25년 세월을 오로지 성실성 하나만 보고 살았지요. 저도 공방에서 같이 일을 하기는 하지만, 아저씨한테 가족은 뒷전이에요. 기타가 우선이죠. 그래도 지금 대학교 다니는 아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았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흐뭇해요. 아버지의 성실한 모습이 아마 아들한테도 깊은 인상을 줬나 봐요.”

그렇게 아버지를 존경해서일까? 부인은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김 명장의 뒤를 이어 기타를 만들기로 했다고 귀띔한다. 독일의 하우저 가문(요제프 하우저부터 헤르만 하우저 3세까지 4대째 기타를 만들고 있는 가문. 김 명장은 3세에게 사사 받기도 했다)처럼 김 명장의 가문은 머지않아 명품 클래식기타를 만드는 가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리라.

그리고 시간이 흘러 김 명장 부자의 손끝에서 또레스(스페인의 기타 명장 안토니오 데 또레스가 만든 기타. 그가 만든 악기는 1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명기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를 능가하는 명기가 탄생하기를 기대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