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보다 어리숙함이 현명하다
완벽보다 어리숙함이 현명하다
  • 최영우 한국노동교육원 교수
  • 승인 2005.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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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우
한국노동교육원 교수
울산에 소재하고 있는 E사는 올해 임·단협을 앞두고 회사측 협상라인을 새롭게 교체하였다. 지난해 협상에서 노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새로 노무업무를 맡은 임원은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노조가 반박할 수 없도록 치밀한 협상안을 만들어 노조에 제시하였다. 이에 노조는 사측의 빈틈없는 협상안에 놀라 협상을 지연시키면서 오히려 더욱 강한 반대논리를 개발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포장하길 원할 것이고, 능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도 좀 더 커 보이도록 하고 싶을 것이다. 협상가도 예외는 아니다.

 

자기가 제시하는 협상안이 더 이상 양보나 조정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것처럼 보이고 싶고, 협상자 자신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이 분야의 전문가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어 할 것이다.


심리학자 로드 크래머(Rod Kramer)는 협상자의 행태에 관한 연구에서 협상자들은 스스로를 상대보다 더 융통성과 과단성이 있으며, 유능하고 공정하고 정직하며 협조적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유능한 협상가는 상대에게 현명하게 보이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고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다.

 

협상테이블에서 상대에게 첫인상이 어떻게 비춰지느냐는 협상결과에 이주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협상에서 협상자의 이미지가 협상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재미있는 연구결과가 있다.

 

여러분이 협상테이블에 나간다고 하자. 말도 조리 있게 못하고 어눌해 보이는 사람과 이와는 반대로 아주 빈틈없고 똑똑해 보이는 협상상대자가 있을 때, 여러분은 어느 쪽에 더 많은 양보를 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는가.

 

상식적으로 보면 후자일 것 같은데, 실험결과에서는 전자의 경우에 더 많은 양보를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후자의 경우 상대방이 너무 빈틈없는 전문가로 보여 내가 방심했다간 큰 손해를 볼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나, 전자의 경우에는 크게 경계하지 않아도 내가 별 손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즉, 덜 현명하게 보임으로써 상대의 경계심과 경쟁심을 누그러뜨리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월왕(越王) 구천과 오왕(吳王) 부차의 고사나 사마의(司馬懿)의 이야기 등을 통해 삼십육계에 나오는 가치부전(假痴不癲)이라는 말을 알고 있을 것이다.

 

잘난 척하며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뜻으로, 실제로는 아주 총명하지만 겉으로는 어수룩하게 행동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아무리 훌륭한 협상안을 제시한다고 해도 그 협상안이 초기에 수용될 확률은 10% 정도에 불과하고, 상대로부터 반박당하거나 거절당할 확률이 90% 정도라고 한다. 최초의 제안은 확정된 것이 아니라 협상의 여지가 있는 안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회사측의 안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최선의 안이라고 해도 노동조합의 입장에서는 이 안을 협상초기에 선뜻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음 선거를 의식하는 노동조합이라면 협상승리를 위한 집행부의 노력과 대사용자 투쟁과정(?)을 통해 홍보효과를 높이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글머리의 사례에서 회사측 제안이 아주 괜찮은 해결책이라고 하더라도 협상의 여지를 열어두지 않고 이를 강하게 밀어붙인다면 노조측의 반발만 살 뿐이다.

 

상대방은 이를 검토할 시간도 필요하고, 조합원들에게 밀고 당기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체면도 설 것이다. WIN-WIN 협상의 성사여부는 노사 모두가 얼마나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자기의 요구수준을 낮추느냐에 달려 있다.

 

WIN-WIN 협상은 자신의 덜 똑똑함을 드러냄으로써 협상의 여지를 넓혀두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나친 자신감은 자신을 과신하게 만들고, 이러한 과신은 협상의 기본요소인 타협과 양보를 배척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