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아니면 안 돼!
“변호사 아니면 안 돼!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1.04.29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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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만 ‘長’을 하는 법률구조공단의 폐쇄적 보직기준…노조, 인권위에 진정
관리보직에 ‘변호사’자격 꼭 필요한가?

“골품제와 다름없다. 변호사 자격이 없는 일반직은 아무리 일을 잘 해도 ‘육두품’ 신세다.”

천오백 년 전 신라의 신분제도 논란이 대한법률구조공단(이사장 정홍원, 이하 공단)에서 벌어지고 있다. 공단의 직제규칙에 따르면 지부장, 출장소장, 지소장이 되려면 ‘변호사(변호사 자격이 있는 자 포함)’여야 한다. 특이한 것은 공단의 대표자인 이사장과 사무총장은 꼭 변호사일 필요는 없다. 이에 대한 법률구조공단노조(위원장 문서기, 이하 법률구조공단노조)는 현 직제규칙을 ‘골품제’에 비유하며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해 9월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한 차별대우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접수했다. 유독 지부장, 출장소장, 지소장에게만 특정한 ‘신분’을 요구한 까닭은 무엇일까?


ⓒ 대한법률구조공단
현 직제규칙은 차별대우…인권위 진정

법률구조공단은 법률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회취약계층이나 일반인들을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무료법률 상담과 소송대리 등의 ‘법률구조’ 활동을 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국에 18개 지부, 39개 출장소, 30개 지소로 조직돼 있다. 해당 단위의 업무를 총괄하고 직원들을 지휘·감독하는 지부장, 출장소장, 지소장(이하 지부장 등)은 법률구조공단 직제규칙 제11조 직위별 보직기준에 따라 변호사(변호사 자격이 있는 자 포함)로 한정된다.

법을 다뤄야 한다는 점에서 보직기준에 변호사 자격을 명시한 것이 언뜻 보기에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법률구조공단노조는 변호사 자격이 있다고 지부장의 업무를 소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오히려 지부장은 소송전 구조, 이동상담차량 운영, 법 교육, 해외 지부 설치, 지소 설치, 예산 확보, 각종 홍보활동, 감사와 같은 다양한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포괄적인 능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소송대리, 형사변호, 법률상담 등의 업무는 법률전문가인 변호사의 능력이 발휘되는 분야다. 하지만 변호사의 일도 공단의 일반직, 서무직의 다른 업무들과 마찬가지로 법률구조사업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적 업무에 불과하다. 변호사 자격은 ‘변호’ 그 자체를 위한 자격이지, 조직 내 경험과 능력을 겸비한 불특정다수가 일선 기관장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까지 차단시킬 수 있는 자격은 아니라는 것이다.

변호사 자격은 ‘변호’ 그 자체를 위한 것

법률구조공단노조는 변호사가 아닌 일반직 역시 지부장과 같은 보직을 수행할 능력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2011년 1월 현재, 공단 직원 중 지부장 등의 보직을 맡을 만한 상위 직급인 일반직 5급 이상의 평균 경력은 19년 2개월이다. 또한 전체 일반직 384명 중 법학을 전공한 사람은 320명으로 80%를 넘는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공단의 일반직 5급은 대부분 법대를 졸업하고 법학과목에 대한 공채시험에 합격해 공단에 입사한다. 그리고 20여 년간 재직하며 축적된 경험을 지니고 있다. 선배·변호사들의 조언을 통해 법률상담에 필요한 이론적·실무적 지식은 물론, 행정업무에 대해서도 충분한 경험을 갖고 있다.

또한 1,000만 원 이하의 약식소송구조처리를 통해 본안소송의 소송제기, 증인신청, 증거신청, 준비서면 작성, 답변서 제출이나 신청사건, 경매사건과 같은 각종 소송절차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쌓는다. 1,000만 원 이상의 사건에 대해선 각 기관에서 송무업무를 담당하면서 각종 업무 지식과 경험을 습득한다. 여기에 5급 승진시험을 통해 다시 한 번 법적지식을 검증 받는다. 따라서 일반직 5급 이상은 소송업무, 행정업무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쌓았기에 지부장과 같은 관리 보직을 맡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일반직 5급 이상, 능력 충분

그런데 공단은 왜, 단지 변호사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지부장 승진에 제약을 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이 시원치 않다. 공단의 한 관계자는 <참여와혁신>의 취재 요청에 “공단 경영에 관련된 문제고 이에 대한 공단의 입장은 이미 인권위에 상세한 답변을 제출했다”며 “(조사가 끝나지 않은) 현 시점에서 이 사안에 대한 공단의 입장을 밝히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만 답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국가인권위원회에는 어떤 답변을 했을까?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관계자는 “아직 조사 중이라 공단이 답변한 입장에 대해서 밝히기 곤란하다”고 답변을 거부했다. 진정이 접수된 지 7개월 넘게 결론이 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하고 있다”고만 말했다.

결국 보직기준에 대한 공단의 입장은 법률구조공단 노조를 통해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노조에 따르면 공단은 지부장 등의 보직을 일반직으로 둘 경우 ▲ 소송구조결정 ▲ 변호사 근무평정 ▲ 공익법무관 복무지도·감독 등의 업무를 수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동안 ‘합리적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이 ‘합리적 차별’에 대해 노조는 그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소송구조결정 업무 가능한가?

첫째, 소송구조결정 업무는 변호사만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노조는 ‘법률구조사건 처리규칙’에 의거해 구조대상자나 구조대상사건이 이미 공단 규정에 열거돼 있기 때문에 고도의 법률적 판단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 승소가능성에 대한 판단 등은 조사담당 변호사의 의견을 존중해 결정하면 되기 때문에 일반직이 수행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애인인 의뢰자가 손해배상 사건의 법률구조를 의뢰했는데, 비록 의뢰 자체가 소송구조 요건에 해당되더라도 의뢰자가 대단한 재력가인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소송에서 만약 승소하게 되면 경제적 형편이 열악한 상대방에게 손해를 유발하게 된다. 그렇다면 공단의 설립 취지나 목적 등에 비춰볼 때 해당 사건이 공단에서 도와줘야 하는 것인지 판단하기 애매한 경우가 종종 생길 수 있다. 그럴 때에는 오히려 법률구조에 대해 경륜이 있는 일반직이 짧은 경력의 변호사보다 판단하기 쉬울 것이라는 주장이다.

비변호사가 변호사를 평가할 수 있는가?

둘째, 일반직이 지부장이 됐을 경우 변호사가 아닌 자가 변호사를 평가하게 되는데 이런 평가가 가능한가란 부분이 있다. 일단 공단의 각 보직별 근무평정은 아래 표와 같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업무실적이나 직무수행능력은 승·패소율, 제소기간 도과여부율 등의 객관적 데이터로 평가가 가능하다. 관리자의 자질이나 직무수행태도는 오히려 장기간 근속한 상급자가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게 노조의 주장이다. 또한 지부장이 변호사들을 평가한다고 해도 최종 확인이 사무총장에 의해 시행되기 때문에 독자적 판단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공익법무관 복무지도·감독 등의 업무수행 가능한가?

공단은 2006년 9월, 직제규칙 상 지부장 등의 보직기준이 ‘소속변호사’로 돼 있는 것을 현행처럼 ‘변호사 및 변호사 자격이 있는 자 포함’으로 개정했다. 이는 공익법무관을 공단의 보직에 쓰기 위해서라고 노조는 주장하고 있다.

공익법무관제도는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군미필자의 대체복무제도 중 하나이다. 현재 공익법무관은 공단 내에서 지소장 직무대리, 출장소의 구조팀장직을 맡고 있다. 대통령령인 ‘행정기관의 조직과 정원에 관한 통칙’ 규정상 공단 제 보직은 공단 직원만이 가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조는 “일반직의 보직 참여를 배제하고 경력이 일천한 공익법무관을 변호사라는 이유로 임명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대우”라며 반발하고 있다.

법률구조공단노조 문서기 위원장은 “지방의료원 같은 타 기관의 경우 의사 자격이 없다고 해서 의료원장직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진 않는다”고 말했다. 지방의료원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의료원장을 임명하는 기준은 의사 자격 유무를 떠나 ‘운영에 관한 전문적인 식견과 능력이 있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지방의료원에서는 의사의 진료 업무와 일반·서무직의 여타 업무가 혼재돼 있기 때문에 공단의 상황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 대한법률구조공단
“의사 아니라도 지방의료원장 자격 배제 없어”


법률구조공단노조는 그간 지금의 직제규칙을 개정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보지 못했다. 지난해 인권위에 진정도 접수했지만 이 또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 사이 노조의 집행부가 바뀌었다. 새 집행부는 공식임기가 시작되면서 차별적인 직제규칙에 대한 문제를 이슈화시킬 예정이다.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변호사 및 변호사 자격이 있는 자를 포함’한다는 보직기준을 ‘변호사 또는 법률구조분야에 전문적 지식을 가진 자’로 개정하라는 것이다.

문서기 위원장은 “공단의 전신인 대한법률구조협회가 1972년 출범될 당시 검찰청 산하의 조직이었기 때문에 대대로 검사들이 보직을 맡아 왔다”며 “위계질서가 강한 법조계 조직문화를 감안하더라도 직제규칙에 명백히 차별적인 내용이 명문화돼 있다는 것은 문제”라고 밝혔다.

지난 2009년,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은 “헌법재판관 9명 중 3명은 법관이나 변호사 자격이 있는 사람 외에 다양한 직역에서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현행 헌법재판소법에 따르면 15년 이상 경력의 현직 판사ㆍ검사ㆍ변호사, 변호사 자격을 갖고 있는 40세 이상의 자만 헌법재판관이 될 수 있다.

다원성·다양성은 이미 현대 사회의 본질적 속성이 됐고, 나아가 발전을 위한 동력원이 되고 있다. 이 소장의 발언은 강고한 법조계 울타리 바깥의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원천 배제할 이유를 더 이상 법조인 스스로도 찾을 수 없다는 자성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법률구조라는 대국민 서비스에 종사하고 있는 공단에서 법률적인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업무와 통상적인 관리·운영·행정·서무 등의 업무가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는 점은 외부의 시각으로도 명확하다. ‘변호사 자격’이라는 특정 요건이 단위 조직의 업무를 조율하고 총괄하는 ‘장’의 보직에 필수적이어야 하는 지에 대해 십 수 년 간 공단의 구성원이었던 조합원들이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나 설득의 과정이 전혀 없다는 점은 명확한 법률을 다루는 공공기관에서 하는 행동치고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