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우울증 환자, 환하게 웃는 날
18년 우울증 환자, 환하게 웃는 날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1.05.02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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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힘든 곳에 갈비와 함께 나타나는 주방장 윤종철

▲ 재능교육 혜화동 본사 앞 농성장에서 갈비파티가 열리고 있다  

'눈물은 내려가고 숟가락은 올라간다.'

슬픔과 분노가 찢어진 천막이 가득한 농성장. 그곳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갈비로 웃음꽃을 피어내는 사람이 있다. 눈물만 흘러내려서야 되겠는가, 숟가락이 올라가야지. 모름지기 ‘밥심’이 있어야 싸울 수 있지 않는가.

갈비가 피우는 웃음꽃

지하철1호선 창동역 가까이서 갈비와 왕냉면을 만드는 주방장 윤종철 씨. 짧은 곱슬머리에 산적 같은 체구, 영락없는 주방장이다. 치과치료 중이라 마스크를 쓴 그의 얼굴엔 서글서글한 눈웃음이 멈추지 않는 자그마한 눈동자만 반짝인다.

윤종철 씨는 용산에서 컴퓨터 장사를 하다 2003년께 ‘제대로’ 망했다. 3억 가까이 떠안은 빚은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아픔을 안겨주었다. 이후 형제들의 도움과 은행대출로 냉면가게를 얻었다. 홀에서 쉼 없이 음식을 나르는 아내의 눈물과 주방의 뜨거운 불길과 마주한 자신의 땀방울이 식당을 채우고 넘쳤다. 그 눈물과 땀이 윤종철 씨의 가족을 ‘빚 구덩이’에서 건져주었다.

“몇 년 걸렸지. 무지하게 고생했어. 노동자는 산업재해로 죽기도 하는데, ‘이까이 거(이까짓 것)’하며 버텼어. 인대가 늘어나고 아킬레스건이 파열됐는데도 깁스를 할 수 없었어. 그냥 압박붕대를 감고 몇 달을 버티며 일했어. 공장에서 일하다 죽는 사람도 있는데, ‘이까이 거’ 하고 버텼지. 깁스를 하고 쉬게 되면 가게 문을 닫아야 하잖아.”

지난해 추석, 윤종철 씨는 천안의 큰형님 댁에 차례를 지내러 가지 않았다. “처갓집에 간다”는 이유로. 거짓말이었다. 윤종철 씨는 추석날 처갓집이 아닌 양재동으로 갔다. 기아자동차에서 ‘모닝’을 만들던 동희오토 비정규직 하청노동자들을 만나러. 노동조합을 만들겠다고 나섰다가 해고를 당한 그들의 농성장을 찾아 숯불을 지피고 갈비를 구웠다.

처가 대신에 갈비 들고 농성장으로

“아이고, 우울증 환자였어요. (명절날 처가에도 가지 않고 농성장을 찾아도) 내가 안 말리고 내비(내버려)두냐면, 무척 즐거워하며 행복해하니까. 연애시절부터 하면 18년짼데, 18년을 우울증 환자로 지내다가 농성장 갈비파티 하면서 인간답게 살고 있는 거예요.”

네 살 아래인 윤종철 씨의 영원한 반려자 조진희 씨가 홀을 정리하다 한마디 거든다. 남편이 이렇게 밝게 살아가는 모습이 처음이란다. 갈비를 짊어지고 농성장을 다녀와야 에너지가 충전되는 사람이란다. 다만 “다음날 왜 이리 (오늘따라) 손님이 많냐며 투덜거리지만 않는다”면, 가게의 갈비가 거덜이 나도 “절대 터치하지 않는다”며, 남편에게 눈을 흘긴다.

윤종철 씨의 가게는 일년 삼백육십날 가운데 설, 추석 이틀만 쉰다. 동네 단골을 상대로 하는 가게라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쉴 수 없다. 윤종철 씨는 가슴이 아프다. 식당 일이 많아서 아픈 게 아니다. 어렵고 힘든 이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농성을 하고 있다는 소식에 아프고, 농성하는 이를 찾아가 손 한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비참해 더욱 시리게 아픈 거다.

18년 우울증 환자 얼굴에 웃음

식당이 안정되고, 빚더미에서 숨통이 살짝 트이자, 가끔 ‘외출’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식당경력 만 6년의 “짬밥이 쌓이니 가능한 일”이라고 마스크를 살짝 들추며 말한다. 동희오토 농성장을 시작으로 혜화동 재능교육 학습지교사 농성장, 구로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 천막을 찾아갔다.

물론 홀로 한 일은 아니다. 윤종철 씨의 제안에 흔쾌히 나서주는 벗들이 있었다. 자신의 가게에 고기를 대주는 본사에서도 서슴없이 갈비짝을 내놓았다. ‘갈비연대’라는 조직 아닌 조직이 만들어졌다. 4월 중순에는 무려 160인분의 갈비를 메고 여의도로 갔다.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상경투쟁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 ‘갈비연대’가 움직였다. 갈비연대가 나선다면 이제 2백만원 가까이가 순식간에 모금된다. 갈비를 굽고 남은 돈은 ‘연대 기금’으로 농성 노동자에게 전달된다.

▲ 지난 겨울 부평 GM대우 농성자에서 열린 갈비 파티

“난 별로 한 일이 없어. 난 빙산의 일각이고, 루시아라고 있어. ‘연대의 꽃’ 루시아 몰라? 그 사람을 인터뷰 해야지.”

인터뷰 요청을 하자 한사코 자신은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농성장 갈비파티를 알고 있는 이들은 윤종철을 먼저 꼽았다. 식당 문이 닫히는 밤 10시가 넘어서야 일할 때 입었던 추리닝 차림으로 농성장에 나타나는 주방장을.

추리닝을 입은 채로 농성장을 찾다

윤종철 씨에게 꿈을 물었다. 별 거 없단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있는 곳에 찾아가서 잠시라도 어깨를 걸 수 있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단다. 다음 소망은 주방장답게 ‘밥차’를 장만하는 것이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농성하는 노동자들이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먹을 수 있게.

그리고 십년 뒤 자신의 소망을 말한다. 스무 살 적부터 가슴에 품은 소망이란다. ‘민중의집’이다. 지금 몇몇 지역에서 운영하는 ‘민중의집’에서 한발 나가 ‘생산’이 이루어지는 ‘민중의집’을 만들고 싶다.

“소비만 하잖아요. 생산하면서 돈도 벌면서 할 수 있는 민중의 집. 식당을 하든 뭐를 하든 활동할 수 있는 자립기반을 갖고 재생산 능력을 지닌 민중의 집, 그게 꿈인데…. (민중의집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먹고 살 수 있고, 돈을 벌어 오히려 도와줄 수 있는 민중의 집을 만들어야 해. 그게 몇 십 년 전부터 꿈이었어.”

갑자기 윤종철 씨의 전화기가 바빠졌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양재동 현대본사 농성장에서 모래(4월 29일) 하기로 했던 ‘빈대떡연대(갈비 대신 빈대떡으로)’를 하루 당겨 내일 열기로 했단다.

스무 살의 꿈, 민중의집은 진행 중

“사람이 백 명이 넘으면 여기서 다 준비를 해야 돼. 밀가루 반죽이라든가, 호박도 썰어가고, 다 준비해야 한다고. 오징어, 굴, 호박, 오늘 다 사서, 반죽까지 여기서 준비해가지고 차로 싣고 가야지. … 올라면 빨리 와. 지금 장을 보자고. 일찍 와.”

전화통화가 끝나는 동시에 인터뷰는 중단됐다. 윤종철 씨의 온 신경이 내일 있을 빈대떡 연대로 쏠렸기 때문이다. 장을 볼 품목과 준비물 목록을 머릿속에서 점검하는 소리가 또르륵또르륵 굴러 나온다.

“내 약속이 먼전 거 알지!”

조진희 씨가 남편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못을 박는다. 내일은 조진희 씨가 2년 만에 언니를 만나기로 한 날이란다.

“모레면 갈 수 있겠다 싶었는데…. 준비만 해주고 난 식당에 있어야 돼. 식당 끝내고 밤에라도 가든가.”

아내와 약속은 지켜야 하고, 하지만 마음은 벌써 양재동으로 향하고, 윤종철 씨의 목소리에 체념과 한숨이 깊이 박힌다.

윤종철 씨의 땀방울은 내려가도 내일 농성장의 젓가락은 올라가겠다. 구수한 빈대떡 냄새가 윤종철 씨의 땀내 배인 추리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