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딸들" 공장으로 가다
"쓸데없는 딸들" 공장으로 가다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1.05.09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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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 자기역사를 쓰다

보이지 않는 얼굴로 역사를 움직였던 여성들이 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세상을 두들긴 여성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기억되지 않는다. 노동자기 때문이다. 돈도 권력도 학력도 없는 여성노동자. 자기 이름 석 자 겨우 깨우치고 청계천 평화시장으로 가리봉 공단으로 올라왔던 여성노동자들이, 재봉틀로 찢긴 사실을 박음질하고, 납땜으로 끊긴 역사를 살려냈다.

▲ 그린비 출판사에서 펴낸 <나, 여성노동자>

 역사를 박음질하다

여성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때론 속삭이듯 때론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지금껏 노동운동사나 근현대사의 행간 귀퉁이에 찔끔찔끔 끼여 있던 목소리들이 이제야 ‘내가 이 땅의 진짜 주인공이다’ 당당하게 외치며 세상에 나왔다.

그린비 출판사에서 펴낸 <나, 여성노동자>(전2권)는 겨우 열서너 살에 가족의 생계나 남자형제의 학업을 위해 공장으로 갔던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기록한 책이다. ‘노동자’라는 말만 써도 ‘빨갱이’인 줄 알았던 기혼여성들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고서야 자신의 이름과 함께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소중한 발자취가 기록되어 있다.

2009년 9월, 30대 초반에서 60대에 이르는 여성들이 ‘자기역사쓰기 모임’을 꾸려 각자의 삶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삶을 나누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모두에게 상처가 있었다. 아물지 않은 상처들. 그 상처를 서로 보듬어 안으며 치유해갔다. 10개월간 함께 나눈 그 시간이 ‘자기역사’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세상에 나오는 순간 ‘자기’는 빠졌다. ‘역사’로 새롭게 드러났다. 바로 우리의 현대사다. 우리의 기억이자 우리의 오늘이 고스란히 세상에 드러났다.

 "쓸데없는 딸들" 공장에 가다

1권 <나, 여성노동자 : 1970~80년대 민주노조와 함께한 삶을 말한다>에는 아홉 명의 여성노동자가 자기역사를 풀어놓았다. 이 시기 한국노동운동사를 대표했던 청계피복 노동조합에서 활동했던 이들과 1970년대 어렵게 건설한 민주노조가 신군부의 탄압으로 강제해산되어 버리는 경험을 했던 이들, 80년대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했던 이와 구로공단의 나우정밀 노조 활동했던 이들의 글이 실려 있다.

 나는 어머니께 “입학금만 해주시면 내가 벌어서 다니겠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나 혼자는 너희들을 먹이고 가르칠 수 없다. 네가 학교에 가면 네 동생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진학을 포기하라고 하셨다. “아들 때문에 딸은 희생해야 한다”는 어머니가 야속했다. 그때에는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 1권 「유정숙: 어둠 속에서 빛으로」 27쪽

 내가 노동조합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돈이 없어서 초등학교에 못 갔는데, 어쨌든 노동조합이란 곳에서는 돈 안 받고 공부를 가르쳐 준다니까, 이건 내가 볼 땐 나라보다도 더 좋게 느껴진 거죠. 거기에 매일 가면 새로운 것들이 막 금을 캐듯이 나오잖아요? 근로기준법도 배우고, 영어도 배우고, 노래도 배우고. 또 하나는 뭐라고 그럴까. 그때 이소선 어머니가 따뜻하게 대해 주는 표정? 이런 게 굉장히 인간적으로 느껴졌어요. 현장에서는 나를 ‘7번 시다’ 이렇게 부르는데, 어느 날 노조에 가니까 ‘신순애’로 불러주고, ‘신순애 씨’ 하고 이러니까, 내가 어쨌든 인간으로 태어난 것 같고, 존중받는 것 같고. 집에서도 그래 보지 못했는데 나를 인정해 주니까 좋았어요. 그래서 내가 노조에 푹 빠지게 돼요. ― 1권 「신순애: 평화시장 ‘7번 시다’, 노동조합에 뛰어들다」 77~78쪽

 열일곱 살, 아직 내가 누구인지 세상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뛰어든 노조운동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욕구가 생겼고, 19세에 끌려가 인간으로는 견딜 수 없는 정신적․육체적 고문도 받았으며, 숱한 해고로 생계위협도 당했다. 뒤이은 여러 가지 정치활동 경험은 내가 노동자로서의 정치의식을 갖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이 사회구조와 정치에 조금은 눈을 떴다. 그러면서 학부모로 다시 학교라는 현장에서 뛰어 보면서 교육제도의 문제를 피부로 느끼기도 했다. 지금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올바르지 못한 것을 하나씩 바꿔 가는 일을 하고 있다. 나이 오십 넘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부터 그리고 내 주변에서부터 삶의 작은 진실을 지켜 가는 것이라고 본다. ― 1권 「박육남: 삶의 형태는 달라도 같은 마음으로」 335쪽

 갈 수 있는 자리는 비정규직뿐

2권 <나, 여성노동자 : 2000년대 오늘 비정규직 삶을 말한다>에는 이랜드 510일 투쟁과 기륭전자 1,895일 투쟁처럼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던 비정규직 투쟁에 앞장섰던 이들과 50대·60대에 처음 ‘노동조합’을 알게 된 청소용역, 간병인, 병원 조리원, 학교비정규직 등의 기혼여성들, 그리고 어린이집 보육교사의 노동조건과 갈등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30대 여성의 자기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나는 신문의 구직란을 보며 이력서를 내보았으나 연락이 오는 곳은 없었다. 한번은 텔레마케터를 지원하려고 전화를 하였다. 상대방은 내 목소리를 듣고 나이까지 알아맞히며 “안 된다”고 하였다. 40대의 나이로 취업을 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란 사실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 2권 「이경옥: ‘착한 딸’ ‘현모양처’, 현장에서 일어서다」, 39쪽

 남편의 사업은 여전히 어려웠고 내가 잠깐씩 리서치 회사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받는 돈은, 두 딸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다가 아는 사람에게서 “학교에서 교무보조를 채용한다”는 정보를 듣고 이력서를 제출했다. 간단한 면접 후 365일 일용직 노동자로 고용되었다. 그 당시는 비정규직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지 않던 시기였다. 학교가 제시한 근무 조건은 호봉, 수당, 복지가 아무것도 없는 일용직이었다. ― 2권 「최보희: 노동해방 세상과 여성해방을 꿈꾸며」, 538쪽

 비정규직이든 우리 같은[환자 간병인] 특수고용 노동자든 하는 일이 하찮은 게 아니잖아요? 사회에 도움되는 일을 하고 있는 건데, 똑같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데, 사회적으로 국가에서 대접이나 보수에 너무나 많이 차별받고 있는 게, 완전히 옛날 신분사회하고 똑같이 느껴져요. 현대판 신분사회 같아요. 결국 비정규직들을 저임금으로 희생시키고 자본가들은 누리고 사는데, 이건 큰 모순이고 소득분배가 많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 거죠. 이런 걸로 인해서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더 깊어지는 거고. ― 2권 「석명옥: 79일 밥투쟁으로 세운 경북대 간병인 노조」, 3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