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지음知音’으로 가는 길
진짜 ‘지음知音’으로 가는 길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1.05.31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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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기술·궁합, 노력 없이 좋은 소리는 없다
국악 저변 확대 위해 어린 시절부터 익숙해져야
[명장 VS 명장]악기장 조준석 VS 가야금 연주가 윤화현

악기장과 연주가, 그야말로 ‘지음(知音)’이란 고사가 말 그대로 어울리는 사이가 아닐까? 연주가라면 누구나 좋은 소리를 내는 악기에 관심이 가질 수밖에 없고, 악기장은 땀과 혼을 불어 넣은 작품이 훌륭한 연주로 빛을 발하길 고대할 테니 말이다.

이달 ‘명장 VS 명장’ 코너에서는 충북 무형문화재 제19호 악기장인 난계국악기제작촌 조준석(49) 대표와 가야금 연주가인 충주국악원 윤화현(53) 원장을 충북 영동군에 위치한 난계국악기제작촌에서 만났다. 조 대표의 배려로 이날 함께 얘기를 나눴던 가야금에 대해 생생한 모습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 ‘지음’들이 만난 것처럼 두 사람이 생각하는 ‘소리’와 ‘장인’의 길은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이 의기투합했던 부분은 국악인들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 국악의 저변 확대에 힘써야 한다는 점이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악기장과 연주가, 정말 ‘지음’일까?


악기장에게는 좋은 악기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 되는 셈이고, 연주가에게 좋은 악기란 심금을 울리는 연주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좋은 악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둘 다 간절하겠지만, 과연 좋은 악기에 대한 생각도 서로 같을지 의문스러웠다. 자존심 강한 두 명인은 지음이 아니라 혹시 애증의 관계 정도가 아닐까?

게다가 조준석 대표는 영동에 자리 잡고 있으며, 윤화현 원장은 충주에서 활동 중이다. 충청북도 영동군과 충주시는 국악의 고장으로 서로 자부심이 대단한 고장이다. 충주는 신라시대 가야금을 창시한 우륵이 연주한 장소인 탄금대의 고장이고, 영동은 앞서 신라 우륵, 고구려의 왕산악과 함께 3대 악성으로 추앙받는 고려시대 난계 박연의 생가와 사당이 있다.

두 고장은 지난 2008년 무렵, 국립국악원의 네 번째 분원 유치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해당 사업은 700억 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되는 대규모 사업으로 영동군의 경우 2002년부터 일찌감치 갖가지 유치활동을 벌이는 중이었다. 결국 이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악원 측이 사업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스럽다는 이유로 사실상 백지화했지만, 두 지역의 자존심 대결은 국악인들을 비롯해 지역 사회에서 큰 화제가 됐었다.

▲ 충주국악원 윤화현 원장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그런 배경을 감안해 심술궂게도 좋은 악기에 대해 두 명장의 생각은 어떻게 다른지 질문했지만 답은 흡사했다. 가야금 연주가인 윤 원장은 “사람마다 성향이 다른 것처럼 한 가지로 규정지을 순 없지만, 자신에게 잘 맞는 악기가 가장 좋은 악기”라고 답했다.

조금 설명이 모호한 것 같았다. 예를 들어 성금련 류의 맥을 잇는 윤원장의 경우 유파의 특성에 알맞은 여성스럽고 화사하며 아기자기한 음색을 내는 가야금이 가장 잘 맞는다고 한다. 반면에 남성이 창시자인 최옥산 류 가야금을 배운 연주가에게는 묵직한 소리를 내는 것이 좋은 악기이다. 즉 악기의 음색이 어떠냐에 따라 연주가의 성향과 잘 맞는지 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악기 자체가 세월의 풍파를 견디고 연주가의 손에 길들게 되면 처음과 다른 음색을 띠게 된다고 한다. 처음 탈 때는 이질적인 느낌이던 것을 몇 년간 연주를 통해 길들이면 좋은 소리를 오랫동안 들려줄 수 있는 가야금이 있는가 하면, 처음엔 마음에 쏙 드는 소리를 내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소리를 ‘먹어가는’ 가야금도 있다.

가야금을 직접 제작하는 악기장으로서 조 대표는 좀 더 체계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우선 좋은 재료를 써서 숙련된 장인의 기술로 정성껏 만들고 마지막으로 윤 원장이 강조한 것처럼 연주가와 궁합이 잘 맞아 삼위일체를 이루는 게 좋은 악기라고 말한다.

가야금을 만들며 수없이 나무들을 접하고 다듬어 온 악기장이 볼 때, 비록 처음에는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지만 3, 4년 공들여 길들이면 어떤 연주가에게 딱 어울리겠다 싶은 작품이 가끔 나온다고 한다. 결국 좋은 악기란 좋은 소리를 내는 악기이고,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악기장이든 연주가든 개인의 부단한 노력 없이 그냥 이루어지는 게 없다.

▲ 난계국악기제작촌 조준석 대표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자신에게 잘 맞는 게 제일 좋은 악기


조준석 대표는 지난 1977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상경해 넷째 형인 조대석 씨가 운영하는 악기제작소에서 기술을 배우며 국악기제작에 입문했다. 11남매의 막내인 조 대표가 어린 나이에 악기장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생계 때문이었다. 전북 장수에서 태어난 조 대표는 “식구는 많고 집은 가난하고, 별 수 있나 어릴 적부터 일을 배워야지”라면서 “유독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그 시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고 회상했다.

특이한 것은 조 대표의 집안이 악기와 인연이 깊었다는 점이다. 삼촌인 조정삼(73, 서울) 씨를 비롯해 넷째 형 대석(59, 서울) 씨, 다섯째 형 경석(57, 용인) 씨, 여섯째 형 문석(53, 청주) 씨가 악기사를 운영하고 있다.

음악과 인연이 깊은 집안인 것은 윤화현 원장도 마찬가지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윤 원장의 집안은 모두 양악을 전공한 데 반해 윤 원장은 어린 시절부터 국악에 흥미가 있었다. 전남 목포 출신인 윤 원장은 결국 17세 때 목포국악원에서 본격적으로 국악의 세계에 입문하게 됐다.

현재 두 사람 모두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활동은 국악의 저변 확대다. 연주가로서, 혹은 악기장으로서 각자가 하는 일이 다르고, 지역사회나 인맥의 특성상 활동 범위도 서로 다르지만 공통적인 의견은 “어린 시절부터 국악이 자연스럽게 익숙해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 가야금을 타고 있는 윤화현 원장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음악과 떨어질 수 없는 인연들


윤 원장의 경우 최근 본격적인 연주가로서 활동보다도 오히려 국악 교육 쪽에 더 비중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사실 윤 원장의 경우 그간 대전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충주로 자리를 옮기고 나니 생각보다 지역사회의 ‘텃세’가 심해서 힘들었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너무 잘 해도 안 되고, 너무 못 해도 안 되고… 정말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얘기를 실감했어요”라면서 윤 원장은 자신의 실력으로 평가 받는 게 아니라 타 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씹히는” 경우가 많아 괴로워했다. ‘우륵의 도시’, ‘국악의 고장’으로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컸다.

그래서 차라리 국악인들의 관심이 덜한 국악교육 쪽으로 파보자고 마음먹게 됐다. 국악에 관심을 갖고 배워볼 수 있는 기회가 일반인들에게는 흔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충주국악원에서 활동을 하다보면 간혹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국악원 문턱에서 서성이며 안쪽을 기웃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들에게 말을 걸어보면 “나 같은 사람도 여기서 국악에 대해 배울 수 있냐”고 묻는 경우가 많았다.

학생들의 사정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1990년대 초반, 지방 중소도시의 초등학교 음악 교과과정에서 국악교육은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했다. 전문적으로 국악에 대해 가르칠 역량이 있는 교사들도 부족했고, 학교에 악기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도 않았다.지금은 인식의 저변이 많이 확대돼 예전처럼 열악한 상황은 아니라고 한다. 또 윤 원장은 “굉장히 보람된 일이란 생각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신이 나서 학생들을 가르치곤 한다”고 흐뭇해했다.

▲ 가야금의 몸통이 되는 오동나무를 대패질하고 있는 조준석 대표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지역 국악계에 실망…국악교육에 관심 둬


조준석 대표의 경험담은 더욱 드라마틱하다. “국악기와 관련된 일은 밑바닥부터 안 해본 게 없다”고 말한 것처럼,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온갖 풍파를 견뎌왔다. “주문 제작된 악기를 배달할 때면 차비가 없어 사람 키만 한 대아쟁을 들고 제기동에서부터 홍제동까지 걸어 간적도 부지기수다”라고 조 대표는 회상했다.

조 대표가 1985년 설립한 광주 남도음악사는 국악인이라면 한 번쯤 그 이름을 안 들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고 매출도 좋았다. 그러다 1997년, 남들은 IMF사태로 위기에 처하는데 조 대표는 공장에 불이 나서 악기에 쓸 오동나무와 기계가 잿더미로 변하기도 했다.

영동군에 난계국악기제작촌을 설립한 것은 지난 2001년이었다. 현재 이곳에선 가야금, 거문고, 아쟁, 해금 등 현악기와 대금, 단소 등의 관악기를 비롯해 60여 종의 국악기를 생산하고 있다.

난계국악기제작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업은 국악 전공 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름과 겨울 방학 기간을 이용해 일주일 동안 직접 악기를 제작해 보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악기를 만드는 재료는 실제로 제작촌에서 판매되는 악기를 만드는 고급 재료들이며 숙달된 기능 직원들의 상세한 지도로 악기 제작의 전 과정을 체험해 볼 수 있다.

제작촌이 입주한 지 이듬해부터 알음알음 인맥을 통해 학생들을 받았던 체험 프로그램이 입소문을 타게 된 것은 체험에 참여한 학생들이 각자 제작한 악기를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재료 자체가 좋은 데다 생산 직원들이 곁에서 잔 실수를 잡아주고 마무리를 돕기 때문에 학생들이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악기는 사실상 시판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번에 25~30여 명씩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참가비부터 숙식까지 무료로 제공되기 때문에 매 회마다 제작촌에서 지출되는 비용은 2,000~3,000만 원 꼴인 셈이다.

조 대표는 “국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라면 좋은 악기에 대해 관심도 클 테고, 실제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악기는 값이 매우 비싸기 때문에 부담이 클 것”이라며 “형편이 어려워 악기를 장만하기 어려운 학생들의 얘기를 듣고 시작한 프로그램이 관심을 끌면서 지원자가 많아져 2005년부터는 정식으로 공고를 내고 학생들을 선발해 프로그램에 참여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2008년부터는 일반인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하루 동안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데, 이 경우 소정의 참가비를 받고 있다. 악기의 울림통 부분은 미리 제작이 돼 있는 상태이고, 현을 얹고 부들을 매는 등의 작업을 체험해 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 역시 완성한 악기를 각자가 가져갈 수 있으며 참가비는 시판되는 악기 가격의 약 30% 수준이라고 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가난한 학생들 위해 무료 제작체험 진행


서양 클래식 음악의 오케스트라 구성에 대해서는 알아도 우리 아악에는 어떤 악기가 쓰이는지 혹시 기억하냐고 조준석 대표가 물었을 때 기자는 입만 뻐끔거릴 수밖에 없었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학원은 다니지만 가야금이나 대금을 가르치는 학원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냐는 질문에도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날 어렵사리 마련한 자리에 모인 두 명장은 좋은 소리를 찾는 장인의 길은 결국 듣는 사람을 향하는 길, 즉 진짜 ‘지음’을 향한 길이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길은 외따로 떨어진 들판에 곧게 뻗은 길이 아니다. 구불텅거리며 황토 먼지가 흩날리고 수시로 오가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길이어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소리에 친근함을 느끼고 국악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물론, 한번쯤은 손수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국악도 국악인들도 사장되지 않는 길이라고 악기장과 연주가는 마지막으로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