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일보 복간, 10년을 넘기지 말아달라
노동일보 복간, 10년을 넘기지 말아달라
  • 정우성 기자
  • 승인 2011.07.01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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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의 신문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
현실 노동운동은 원칙과 방법론의 괴리에 빠져있다
[창간특집 좌담] 노동언론을 고민하다

노동일보 창간 12년, 휴간 8년이 흐른 지금 월간<참여와혁신>은 아직도 노동일보의 복간을 꿈꾸고 있다. 그것은 <참여와혁신>의 주요 맴버(박송호 대표, 하승립 이사, 김경희 편집인)들이 노동일보를 끝까지 지킨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신문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1999년 당시 노동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우리 편’ 노동일보의 창간은 현장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나 그 끝은 미약했다. 그리고 이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신문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에 다시 한 번 노동일보와 같은 노동자들의 신문을 고민해보자는 의미에서 노동일보 창간 당시 창간광고 포스터를 촬영했던 3명의 모델(?)들을 한자리에 모셨다. 이미 10년이 훌쩍 넘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들은 무슨 고민을 하고 있으며, 당시 노동운동의 현실과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들어봤다. 그리고 노동언론이 지금 이 시기에도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도 들어봤다.


▲ 왼쪽부터 김희준 민주노총 강원본부장, 윤태수 신한은행 지점장, 김숙진 공기업연맹 홍보선전실장.ⓒ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 좌담회 참석자 : 김희준 민주노총 강원본부장, 윤태수 신한은행 지점장, 김숙진 공기업연맹 홍보선전실장
● 사회 : 정우성 취재팀장
● 장소 : 마포구 연남동 월간<참여와혁신> 사무실

명동성당에서 만났던 세 사람

1999년 여름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던 어느 날, 각자의 노동현장에서 노동운동가로서 활동했지만 서로 일면식도 없던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한명은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고, 한 명은 이제 막 시작한 노동조합 활동에 정신없이 적응하고 있었고, 또 한 명은 당시 대규모 구조조정에 맞서 투쟁하고 있었던 은행권 노동조합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상황을 생각하며 “싫다고 했는데 억지로 찍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때 당시의 포스터를 보는 그들의 눈은 마냥 싫지만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1시간 30분이라는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과거에 대한 회상부터 현재 노동운동에 대한 절망과 그 속을 비집고 얼굴을 내미는 희망까지. 결국 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산물이기에 어쩌면 지나온 과거는 좋았던 기억으로 변색되고 반면 현실은 미래를 알 수 없기에 더욱 힘들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야기는 노동운동의 미래 같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지금의 이야기, 그리고 과거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어쩌면 우리에겐 의무일지 모른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왜 남자 셋만 찍었냐?


참여와혁신: 독자들을 위해서 포스터 촬영 당시 활동하셨던 내용과 직책, 그리고 현재의 활동 내역과 직책을 설명해주세요.

윤태수:  그때가 99년 5월정도 된 거 같은데, 명동성당에서 포스터를 찍는데 날씨가 좀 더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저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조흥은행 노동조합 위원장이었고요. 그러고 보니까 10년이 더 흘렀습니다. 지금은 신한은행 지점장으로 있습니다.

▲ 노동일보 창간 포스터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김희준:
 저는 98년도에 만도기계 노동조합에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명동성당에서 수배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가물가물한데 당시는 만도기계노조 사무국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해에 금속산업연맹 대의원대회에서 부위원장으로 당선됐었죠. 당시 해고됐다 2002년에 복직했는데 지금은 민주노총 강원지역본부에 있습니다.

김숙진:  97년 5월 1일이 제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게 된 첫 날인데, 그 후로 2년이 지났었죠. 원래 처음에는 죽어라 열심히 하잖아요? 별로 크지 않은 노조(한국마사회노동조합)였고 사실 활동을 저 혼자 시작했었는데, 열심히 하다보니까 이쁘게 봐 주셔가지고 이걸 찍자고 해 주신 것 같아요. 그런데 정말 끝까지 거부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정말 어쩔 수 없어서 나갔더니 그렇게 얼결에 사진 찍었던 기억이 나는데, 후일담이 잊히지가 않아요. 왜 남성만 셋이 찍었냐.(일동 웃음) 여성 단체들 쪽에서 그런 얘기를 해 주었어요. 지금은 공기업연맹에서 홍보실장을 맡고 있습니다.

촌스럽지만 열정으로 뜨거웠던 과거

참여와혁신:  잠시 얘기가 나오긴 했지만, 포스터 사진을 찍게 된 배경에 대해서, 어떻게 해서 사진을 찍게 되셨는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뽑히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이야기 해주세요.

윤태수:  제가 물어봤어요. 왜 저보고 하라고 하는지. 사무직 쪽에 한 사람을 섭외하려고 했었데요. 제조업도 있고, 공공도 있는데 사무직에서 나와야한다, 물론 사무금융도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금융노조가 인원도 많고 해서. 또 금융노조가 IMF 이후에 여러 금융 노동자들이 해고되고 그런 부분들이 부각됐는데, 그때 뭐 제대로 투쟁은 못 했지만 그런 부분에서 향후 IMF 이후에 사무직, 그 중에서 금융노동자들이 중요하다고 인식을 하셨나 봐요. 그래서 금융을 낙점하고 찾다보니까 제일 만만한 게 저 아니었나 싶습니다. 노동일보가 출범하면서 대한민국 전체 노동자들을 아우른다는 컨셉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희준:  저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저는 어쨌든 인권 대통령 시절에 만도기계에 공권력이 투입됐기 때문에 수배자로 살고 있었고,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한국노총, 민주노총 통틀어 제조업, 사무직 안배 차원에서 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저는 끝까지 안 한다고 했는데, 명동성당까지 카메라를 들고 와 가지고 강제로 찍혔습니다. 하하.

▲ 김희준 민주노총 강원본부장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참여와혁신:
 그 당시 포스터를 지금 다시 보시니까 어떠세요?

윤태수:  촌스럽네요. 하하

김희준:  음…, 당시엔 젊었네요. 허허

참여와혁신:  세월이 많이 흘렀죠? 십년 이상 지났으니. 저희는 사무실에 이 포스터가 항상 걸려 있어서 매번 얼굴을 뵈었는데, 과거의 얼굴을 매번 보면서 출근하고 퇴근했습니다.

김숙진:  저도 오늘에서야 다시 보는데 너무 부끄럽다. 포스터 밑에 작은 한 줄이 참… 새삼스럽게(신문에도 편이 있습니다).

그 허름한 사무실에서 신문이 나오긴 하더라

참여와혁신:  노동일보 창간 당시는 어땠습니까?

김숙진:  사실 저는 주노신(주간노동자신문)부터 굉장히 훌륭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땐 사실 제가 연맹에 있을 때가 아니었는데도 우리나라에 그런 신문이 만들어졌다는 것에 대해 뿌듯함, 혼자서 개인적으로 감동을 받고. 가서 신문도 막 보고, 저도 모으고 그랬던 기억들이 있어요. 그 속에서 제가 그 길에 녹아지고 그랬는데.

노동일보가 휴간하고 한동안 양평동(과거 노동일보 사옥이 양평동에 위치했음)에는 팻말이 그대로 걸려있었어요. 그 시절에 좋았던 기억들과 얽혀진 이야기보다는 그 이후에 가슴 아픈 것들이…. 저도 깃발을 내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노동운동이, 그 팻말이 제가 그 쪽에 갈 일이 많아서 갈 때마다 노동일보 방향을 보면서 아주 오랫동안 가슴 아팠던 기억들이 있고요. 언젠가는 다시, 다시 꼭 좀 시작하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아팠던 기억보다는 어떻게 하면 우리들의 노동일보가 이 땅에서 다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그런 고민들을 좀 했던 거 같아요. 같이 해야 되고, 앞으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윤태수 신한은행 지점장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윤태수:
 처음에 노동자들의 신문을 만든다고 했을 때 반신반의했어요. 이게 과연 가능할까? 물론 그 전에 한겨레신문이 독자적으로 출범했던 그런 기억도 있지만 그거하고는 또 다른 측면이거든요. 반신반의했었고, 처음에 오픈했을 때 사무실이 허름하고 그렇더라고요. 과연 여기서 신문이 나올까 싶을 정도로. 그런데, 야 여기서 과연 신문이 나오더라고요.

노동자들이 자기 신문을 가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특히 언론이 차지하는 비중을 봤을 때. 그런 걸 잘 아는데, 물론 중간에 잘 안 된 부분이 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고 사실은 누구 몇몇 사람들의 신문이 아니고, 대한민국 전체 노동자들의 신문이었는데, 좀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어쨌든 그런 시도들이 있었고 지금 공식적으로 휴간을 하고 있는데 휴간이라는 것은 결국 복간이 가능한 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가능할 거라고 보고, 지금 휴간한 지가 꽤 됐죠? (2003년부터) 제가 바라는 거는 휴간을 10년을 넘기진 마십시오.

김숙진:  지금 시절에 여전히 언론은 문제가 너무 많잖아요? 그래서 노동조합을 하든, 운동 선에 있는 분들은 우리들의 신문을 희망할 거라고 저는 의심치 않아요. 그 일을 누가 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들 스스로가 다시, 정말 (노동운동이) 바닥을 치고 있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더 어려워지고 있는 이 마당에 한번 우리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서 우리에게 힘이 되는 기사들이 나오는 거를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가, 십년을 넘기지 말고 조만간에 그런 기획들을 해 가지고 시도해 봤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윤태수:  노동일보에 대해서는 제가 기억나는 게 2000년 7월에 금융노조에서 총파업을 했는데, 파업하기 전에 출정식을 했습니다. 총파업 출정식을 지부별로 하는데, 조흥은행이 금융노조에서 순번이 제일 빨랐어요. 그래서 출정식을 조흥은행 본점 뒤에 있는 광장에서 했었는데, 그때 결의를 다지는 것도 있고, 금융 노동자들이 98년도에 파업을 조직했다가 하지 못하고 한 부분도 있고 해서, 출정식을 하는데 분위기 상 우리들이 혈서를 썼어요.

전원 삭발을 하고 간부들이 혈서를 썼는데, 다음 날 노동일보 1면에 그 혈서를 쓴 것을 칼라로 그냥 실었어요. 그 뒤에 청와대에서 빗발치게 전화를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야, 우리 신문이 대단하구나. 신문 1면에 칼라로 이렇게 실었으니까 얼마나 선정적이고 선동적이었겠어요. 신문을 누가 많이 보고 안 보고를 떠나서 아 이게 노동자신문이구나 하는 느낌을 준 게 기억이 납니다.

▲ 김숙진 공기업연맹 홍보선전실장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김희준:
 지금이야 인터넷이 있으니까 모든 게 소통이 되잖습니까? 그때에는 아침에 출근하면 저녁 9시, 10시에 퇴근하니까 이게 공장 안에 들어가면 바깥 상황을 잘 알지 못합니다. 보수 언론을 봐 가지고는.

그 시점에 주간노동자신문이 노조를 통해서 현장에 배포됐죠. 그 전에 활동할 때만 해도 한겨레신문의 사설이나 이런 정도를 확대 복사해서 현장 곳곳에 붙이고 노보를 내고 이런 정도였는데, 아무튼 주간노동자신문 나오고 나서 (현장에) 돌리고, 이런 과정에서 주노신이 신문만 낸 게 아니고 노동문화제, 노보 편집자 교육, 신입 노조간부 교육 등을 계속 배치했거든요. 저희가 그 당시 안양에 있었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양평동하고 가까워서 자주 가기도 했죠.

아무튼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 저희들은 계속해서 노동언론에 대한 문제, 투쟁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보도를 안 해주는데, 그 당시 한겨레라 하더라도 노조 투쟁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보도하거나 이런 게 없었는데 주간노동자신문은 직접 딱 보도를 해 주니까 좋았죠.

그것이 결국 노동일보로 이어졌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지금 이제 지점장님이야 그 당시 아주 좋았다 이러시지만 민주노총 내부에선 창간할 때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어요. 금속산업연맹만 보더라도 당시 문성현 위원장 할 때에 제가 부위원장이었는데 약간 무관심했다고 할까? 그것은 이태복 당시 노동일보 대표와의 관계, 또 운동 노선의 차이, 이런 것이 점철되어서 그런 거 같은데 그럼에도 일간지로 나오고 나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보도하고 옹호하고, 사설도 써주고 이런 것들이 결국 노동자들에게는 상당히 유리했죠.

지금 노동운동은 너무 힘들어요

참여와혁신:  2003년 노동일보의 휴간은 노동운동의 상황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노동운동이 사회적으로 많이 힘든 시기로 접어들었던 때죠. 그리고 지금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라고 봅니다.

▲ "야, 우리 신문 대단하구나. 누가 많이 보고 안 보고를 떠나서 이게 노동자신문이구나."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김희준:
 제가 볼 때는 그 당시와 10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 노동자들의 사회적 위치,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실질적인 삶의 조건은 나아졌지만 정년퇴직, 희망퇴직, 명예퇴직 등 고용불안이 심해져서 상시적 구조조정에 노출돼 있기 때문에 노동자는 늘 불안한 것이죠. 이것이 IMF를 거치면서 노조가 나의 고용을 100%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실감한 거죠. 만약에 노조가 확실히 지켜 준다고 하면 노조로 똘똘 뭉쳤을 텐데, 오히려 조직이 더 확장됐을 텐데 그게 못 되니까 계속 조합원들은 양쪽을, 사측도 눈치보고 노조도 눈치 보게 되는 이런 상황이라고 보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언론이 왜 중요하냐면, 사람들이 ‘만나서’ 무엇을 해야 그것이 조직 활동인데 문자 하나 날리고 인터넷에 띄우는 걸로 모든 것을 다했다는 식의 활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프라인 신문은 그런 측면에서 그것 자체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김숙진:  어려워요. 저는 진짜 연맹 내에서 실무를 해야 하는 활동가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어려울 수가 없어요. 운동이라는 것이 거의 다 없어진 거 같은 생각도 들어요. 이 시기에 맞는 새로운 노동운동에 대한 고민은 끊임없이 활동가로서 하지만 현실은 정말 많이 엄혹합니다. 제가 하고 있는 것에 너무나 많은 회의를, 특히 활동가로서 살아가는 것에 너무 많은 회의와 너무 많은 갈등을 부여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공기업 노동조합으로서 정부의 강공 드라이브 속에서 너무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결코 죽지도 않을 거고 굴하지도 않을 거지만 이 시기에서 뭔가 새로운 해법은 분명 필요합니다.

저는 사실 이 자리에 대한 기대가 있었어요. 과거에 우연이든 필연이든 포스터에 같이 찍혔는데, 각자 위치는 다르지만 그대로 그 마음 올곧이 갖고 있는 한, 저희들이 이 시점에서 뭔가 다시 이야기해 보면서 길을 찾고 또 그것이 반드시 저는 성과가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왔어요. 그런 이야기들 속에서 분명히 제가 좀 힘을 받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지요.

뭔가 새로운 지혜를 가지고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거죠. 저흰 분명히 태어날 때부터 노동자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노동자로 죽는 것인데, 왜 노동자가 가장 힘들어야 되는지. 뭐 기업가도 힘들다고 그러고 다 힘들다고 해요. 다 너나없이 힘들다곤 하는데. 저는 대중없이 말씀드리곤 있지만 활동가로서 가장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가 지금 이 자리에 나와서, 뭔가 이래 저래야 한다는 주의주장이 아니고 돌아보고 다시 한 번 힘을 얻는 자리로 생각하면서 나왔습니다.

▲ "현실은 정말 엄혹합니다. 결코 죽지도 굴하지도 않을 거지만 뭔가 새로운 해법은 분명 필요합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원칙과 방법론, 우리가 고민할 지점


참여와혁신:  김숙진 실장님이 말씀하신대로 이번 기획의도도 현재의 노동운동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자는 뭐 그러한 딱딱한 이야기를 들으려는 것이 아니고 과거를 돌아보며 다시 한 번 힘을 내보자, 그때와 지금은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변했는가를 그냥 이야기해보자는 취지였습니다.

윤태수:  아까 10년전 하고 지금하고 상황에 대해 좀 얘기했는데, 저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가 얘기하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이라는 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그때는 조합원들의 요구가 하나로 모아졌던 거 같아요. 물론 100%는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복지후생의 문제, 그동안 내가 내 공장에서, 직장에서 8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산업사회를 이끌어 오면서 저임금과 열악한 근무환경에서도 열심히 일 해왔던 것에 대한 보상 요구가 전체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으로 묶여졌었죠.

87년 대투쟁 이후에 10년이 지난 97년 외환위기 이후에 또다시 투쟁 동력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구조조정이라는 문제가 닥쳐온 거예요. 그전에는 임금, 후생복지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자기 직장을 잃느냐 마느냐는 문제로 다가왔던 거죠. 그러나 그 이후 노동운동은 고용안정을 노동자 투쟁으로 지켜내지도 못했고, 더 심각한 문제는 비정규직을 양성했습니다. 결국 지금 노동운동의 문제는 전체적으로 요구조건이 양분되어 있다는 겁니다. 정규직으로 있는 사람들이 이 상황에서 자기 임금, 후생복지를 얘기하기에는 비정규직이 바라볼 때는 배부른 이야기예요. 실제로.

그래서 또 비정규직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정규직 노동자가 가지고 나온다는 것도 아니에요. 비정규직 자체가 조직화를 하는 데 한계가 있고, 거기다 아울러서 사용자측이나 정부 측은 더 치밀하게 고도화된 전술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건 뭐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10년 전에는 나름대로 노동자를 대변하는 노동일보라도 있었다고 얘기하지만 지금은 그것도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한 가지 더 첨언을 하자면 김숙진 실장이 얘기했는데, 저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노동운동을 끌어가는 부분에서 후배들의 창출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니까 10년 전에 노동운동을 했던 숫자와 지금의 활동가라고 할 수 있는 숫자 자체가 제가 봤을 땐 반도 더 안 될 겁니다. 근데 새로운 활동가 후배들을 키워낼 수 있는 어떤 장치도 없습니다.

30대에 현장에서 그렇게 고생하고 투쟁했던 분들이 40대에 보면 근로조건이 더 나은 위치에서,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위치에서 운동을 해야 되고 50대가 되면 그것이 꼭 나쁜 의미가 아니고 정치권에 가서 더 큰 권력을 가지고 그들이 활동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그대로 정체되어 있다고 하면 누가 노동운동을 하겠습니까. 그건 개인의 이익에 대한 부분이 아니고 내가 노동운동에 30년을 했었는데 처음 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많은 권력을 갖는다는 것이 더 많은 파급효과와 영향력을 가지고 더 많은 조합원들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위치에 가 있어야 된다는 의미인데, 이게 정체되어 있고 후배들은 없는 거예요.

▲ "우리가 원칙을 갖고 있긴 하지만,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 것인가 고민이고, 어떻게 실천해 나갈 것인가는 더 고민입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김희준:
 저는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87년 당시는 그것이 사무직이든 생산직 노동자이든 간에 자본과 국가권력의 통제와 억압이 대단히 강했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당시 투쟁을 했던 세대들은 억압과 착취에 대한 분노 이런 것과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이 동시에 맞물리며 터졌는데, 그 와중에 또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뭔가 자기전망을 갖지 못한 게 아니냐 생각됩니다.

특히나 저희들 같은 경우는 처음에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진 않았지만 노동해방, 인간해방에 대한 구호도 외치고, 거기에 따라서 계속해서 운동도 확장시켜나가고 이런 게 있었는데,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대부분 선배 운동가들의 포기와 변절 이런 것들을 거치게 되면서 변절된 분들은 지금도 한나라당에 계시고, 이 분들을 보면 옛날에 민중의 당, 노동당 하다가 그 내부로 들어가는 순간 끊임없이 자기 동지들을 계속해서 짓밟아야 그 내부에서 살아남는, 자기검증을 강요받는 이 시스템 하에서 저는 오히려 노동진영은 확실히 자기 전망을 놓쳐버린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지금도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에 너무 매몰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노동자들이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거야 금상첨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것이 왜곡돼 대중들에게 전달되다보니까 대중들은 계속 오히려 운동에 대한 희망이나 전망보다는 개인이, 나만 잘 살면 되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봅니다.

윤태수:  김 본부장님과 논쟁을 하자는 건 아니지만, 좀 다른 부분들인데, 요즘 술좌석에서 가끔 후배들을 만나면 선배님 계실 때가 좋았습니다라고 합니다. 왜 그러냐 물으면 요즘 술좌석에 만나서도 그런 담론들에 대해서 얘기를 안 한다는 겁니다. 그때는 그게 뭐 우리가 금융산업이 어떻게 가야 하느니, 비정규직이 어떠니, 산별을 어떻게 해야 되느니 그걸 가지고 밤새 소주잔에, 맞는 얘기든 틀린 얘기든 논쟁을 했다는 겁니다. 후배들은 그렇게 봤나봐요. 요즘은 만나면 주식 얘기한대요. 부동산 얘기하고 골프 얘기 하고.

요즘 안타까운 건 노동자들의 삶이 언론이고 어디고 얘기 자체가 안 나온다는 겁니다. 술자리에서도 그렇고. 이게 이야기가 되고 담론이 돼야지, 몇 분 활동가들이 아무리 고민하더라도 대중과 소통이 되지 않는 점이 문제라고 봅니다.

원칙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져야 합니다. 하지만 원칙이 훼손되지 않는 상태에서 많은 방법론이 검토돼야 합니다. 그 방법론에 있어서 한 가지 방법론을 주장한다는 것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동운동 진영의 또 다른 한계라고 보는 겁니다. 민주노동당이 처음 의회진출 했을 때 조만간 노동자 국회의원 40~50명으로 늘어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대중과 함께하는 노동운동, 국민과 함께하는 정치를 얘기해 놓고 국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자기 원칙이 확고하다면 변화하고 유연해야 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것이 노동계 자체의 혁신이지, 그게 아니고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잡고 있으면 가면 갈수록 설 자리가 없습니다.

김희준:  하하, 지점장님과 제가 여기서 논쟁할 문제는 아닌데… 아무튼 저는 제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국사회 노동과 자본의 관계, 역관계 이런 부분을 말씀드린 겁니다. 물론 말씀하신대로 방법론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 홍익대 투쟁을 보면서 민주노총 내에서 단식하고 투쟁하고 할 때 언론이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거의 묵비권을 행사했죠. 근데 어느 순간 김여진 씨가 와서 연대하기 시작하니까 이것이 언론에 오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민주노총 내부에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야, 우리도 무슨 스타를 키워야 되나’ 이런 우스개소리도 하거든요. 우리가 원칙을 갖고 있긴 하지만, 무엇을 갖고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 것인가 고민이라는 겁니다. 사실 어떻게 실천해 나갈 것인가는 더 고민이죠.

참여와혁신:  말씀하신 대로 원칙을 지키며 방법을 찾는 것은 언론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왜냐면 그걸 어떻게든 간에 대중들이나 조합원들에게 퍼뜨릴 수 있는 매개체이고, 그런 것이 계속해서 희망을 던져줘야 할 매개체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봤을 때, 노동언론이 가져야할 역할이라는 것은 그런 희망을 계속해서 던져줘야 할 역할이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