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더 빠르게, 삶은 더 느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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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여와혁신
  • 승인 2011.08.30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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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이기 발달할수록 빨라지는 삶
과속보다 휴식을 … 주목받는 느리게 살기

박사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연구위원
<제3의 물결>로 유명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이미 30년 전에 정보화 사회가 성숙되면 사회의 패러다임이 규모에서 속도로 변모되리라 예견했다. 실제로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의 거대 자동차사 GM이 2008년 금융위기에 좌초된 것은 ‘규모의 경제’에 울린 조종이었다. 반면, 아이폰, 아이패드 등 혁신적인 신제품을 앞세워 세계 IT업계의 절대강자로 부상한 애플사는 ‘속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빠른 자는 정보, 생각, 의사결정, 실행 등 모든 면에서 앞서간다. 반면 민첩하지 못한 거대조직은 시장의 변화속도를 쫓아가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하다가 결국 공룡처럼 도태되고야 만다.

‘속도의 경제’는 인간의 삶에서도 나타난다. 영국의 심리학교수인 리처드 와이즈만(R. Wiseman)이 세계 32개 주요 도시 보행자들의 걸음속도를 측정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걷는 속도가 10년 전에 비해 10%가량 빨라졌다고 한다. 특히 경제가 활황인 도시일수록 보행속도가 빨랐는데(세계 1위 도시는 싱가포르), 인터넷, 휴대전화 같은 문명의 이기들이 사람들을 더 조급하고 많이 활동하도록 유도한다고 결론지었다.

사실 스마트폰, 스마트패드가 보급되던 초창기만 하더라도 그로 인해 삶이 더 편리해지리라는 믿음이 퍼졌었다. 일의 효율성이 올라간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침대위에서, 식탁에서, 출퇴근 버스 안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벨소리, 메일체크가 일상이 되었다. 일이 직장이라는 특정 장소에만 국한되지 않고 언제, 어디든 근로자를 쫓아다니는 ‘일의 유비쿼터스 시대’가 열린 셈이다.

느리게 살기 열풍

현대사회의 과속에 멀미를 일으킨 사람들은 점차 완벽한 휴식, 느리게 살기에 주목하고 있다. 미친 듯이 빨라지는 일의 속도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느리게 살기 열풍은 일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일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좀 더 여유롭고 한가한 여가를 추구하는 경향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느리게 살기 열풍의 아이콘으로 명상이 있다. 이제 명상은 정신적 깨달음을 추구하는 일부 종교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뇌에 의식적으로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 방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헬스케어, 자기계발, 다이어트 등에 효과적인 마음의 운동법으로 급부상 중이다.

명상은 서양에서도 인기다. 지구상 모든 개인, 기업, 커뮤니티를 연결해 서로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을 모토로 페이스북을 설립한 저커버그는 인도 명상에 빠졌다. 또,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 역시 젊은 시절 구루를 찾아 인도 여행을 하고 코분치노라는 일본 선승을 평생의 스승으로 삼아 명상수행을 생활화했다.

지금 대중들의 요구에 맞춰 각 종교단체는 앞 다투어 명상센터를 열고 요가원, 명상원을 찾는 일반인의 발길이 분주하다. 국내 모 명상센터는 명상훈련 프로그램만으로 해외에 진출해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제는 차를 마시면서 간편하게 명상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꾸며진 이른바 명상 편의점까지 생겨나는 중이다. 여기서는 걷기 명상과 그림 명상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차 한 잔 값으로 체험하거나, 가격대별 코스를 선택해 명상 지도사의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일반대중들에게 명상을 지도할 수 있는 명상지도사, 명상원운영자에 대한 수요는 크게 확대되는 중이다.

슬로시티(slow city), 즉 느린 마을 역시 주목받고 있다. 슬로시티는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환경과 전통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공동체 운동이다. 대표적인 것이 획일화되고 개성 없는 패스트푸드를 멀리하고, 느리지만 건강에 이로운 음식을 즐기자는 슬로푸드 운동이다.
한식은 건강에 좋고 비만의 염려가 적은 대표적인 슬로푸드다. 한식의 대표 격인 젓갈, 김치, 장류와 같은 발효음식은 시간이 숙성시키는 맛이다. 한식과 관련해서는 고추장, 된장 등을 만드는 장류전문가, 장류를 숙성시키기 위한 용기를 만드는 옹기전문가, 지역색을 담은 제대로 된 우리 맛을 내는 한식요리사, 테이블 공간을 목적과 기능에 맞게 디자인, 연출, 조정하는 한식 푸드코디네이터 등의 직업이 유망하다.

음식이 있는 곳에 술이 빠질 수 없다. 막걸리는 유산균, 항암효과 등으로 해외에서 먼저 진가를 알아봤으며, 막걸리 조주사, 막걸리 소믈리에 등이 각광받고 있다. 서민의 술인 막걸리의 인기가 이 정도라면 선비들이 즐기던 각 가문의 수백 가지 전통주의 잠재력도 무진장일 것이므로 전통주 조주사 역시 유망하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편리함보다는 진정한 휴식을

한국인의 주거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아파트다. 효율성, 편리성, 경제성 면에서 단연 최고다. 그런데,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가회동의 한옥마을이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이곳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도심을 지척에 둔 곳이지만 오가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한적했다. 그러던 이곳이 문화, 예술, 전통의 공간으로 새롭게 떠오르면서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가회동, 삼청동에서 효자동으로 이어진 문화예술 거리가 청운터널 건너편 부암동으로 연결되는 중이다. 이처럼 한옥이 재조명되는 데는 사방이 꽉 막힌 답답한 아파트에서 벗어나 자연의 변화를 느낄 수 있고 이웃과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으며 황토, 목재, 한지 등 천연소재로 지은 한옥의 친환경성이 상승작용을 일으킨 덕분이다.

비단 도시에서 뿐만 아니라 농촌지역에서도 귀농이나 전원생활을 꿈꾸는 이들 사이에서 한옥 짓기는 새로운 트랜드가 되고 있다. 이에 따라 집의 구조를 계획하는 한옥설계사, 주춧돌을 놓고 골조를 올리는 대목수, 창문이나 문 따위의 인테리어를 담당하는 소목수, 전통기와를 만드는 제와장 등 한옥 전문인력의 인기도 더불어 상승중이다.

관광패턴이 관람형(sight seeing)에서 체류형(staying)으로 변화되면서 캠핑이 인기몰이를 하고, 농업과 관광이 다양한 형태로 융합되는 현상도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최근 전국에 캠핑장이 들어서고 캠핑장비 기업이 호황을 누리는 데는 체류형 내지 체험형 관광의 확산에 힘입은 바 크다. 이제는 3~4시간 자동차 타고 와서 2~30분 보고 홱 지나가버리는 관광은 점차 시들한 반면, 야영하면서 자연을 느낀다든지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가족, 동호인 들이 함께 하는 여행형태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야영장개발자, 캠핑가이드, 캠핑장비 개발자, 캠핑장비 테스터, 캠핑카 개발자 등이 부상 중이다.

등산 열풍도 점차 진화하는 중이다. 처음 도시근교에 집중되었던 등산이 이제는 원거리 산행으로 진화하면서 계곡, 암릉, 야생화, 백두대간, 종주, 비박, 별보기 등 테마형 산행이 인기다. 주말 새벽 서울 사당역, 양재동 등에는 수백 대의 관광버스가 원거리 산행객을 싣고 도심을 빠져나간다. 등산테마를 개발하고 교통, 식사, 일정 등을 모두 책임지는 등산가이드가 성업 중이며, 식물과 숲에 대한 이해를 돕는 숲생태해설가 역시 각광받고 있다.

농촌에 머물면서 조용히 휴식을 취한다든지 가족과 농촌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관광형태도 점차 활성화되고 있다. 농부의 입장에서는 관광소득을 얻는 것은 물론 일손을 덜고 농산물 판로도 개척할 수 있으니 일석삼조다. 산나물 농원, 과수 농원, 곤충농원 등 테마형 농장운영자는 도시민들이 직접 농사체험을 하고 농산물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다. 전통식품개발자는 지역특산 농산물의 높은 품질을 바탕으로 떡, 장아찌, 김치, 식초 등 농업제품을 개발하여 시너지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지역을 브랜드화하기 위해서는 지역축제가 중요한데 축제기획전문가는 지역의 특화된 관광자원을 축제로 승화시켜 지역의 이미지를 제고하고 관광객 유치를 활성화하고 지역특산물 수요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뇌는 자극을 추구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통해 쏟아지는 정보는 쾌감을 준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감을 이런 곳에서 찾으려는 욕망은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만 불러일으키는 바닷물과 같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고, 배움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다. 디지털 세계의 자극이 강해질수록 이로부터 벗어나 ‘느리게 살기’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찾고 제대로 된 휴식을 원하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느리게 살기’와 관련된 직업 역시 확대가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