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주의 도입’을 둘러싼 불신
‘성과주의 도입’을 둘러싼 불신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1.08.31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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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임단협 결렬로 은행권 최장기 파업
노조, 업무복귀 후 태업·파업 병행…사태 분기점 되나?
[현장 1] SC제일은행지부 파업

지난 6월 27일부터 시작된 SC제일은행의 파업 사태가 50일을 넘어서면서 은행권 최장기 파업의 기록을 날마다 갱신하고 있다. 지난 2004년 구 한미은행노조가 18일간 파업을 벌였던 것이 지금까지는 최장 기록이었다.

사태 해결을 위해 SC제일은행지부(위원장 김재율)의 상급단체인 금융노조와 한국노총, 사용자단체인 은행연합회, 서울지방고용노동청 등 노사정 당사자들이 모여 합의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고, 일단 SC제일은행지부가 8월 29일부로 현업으로 복귀하겠다고 밝힘으로 해서 두 달여에 걸친 파업 사태는 변화의 지점에 서 있다. SC제일은행의 파업은 왜 시작됐으며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두 달여 파업 지속, 노사 쟁점은 무엇인가?

SC제일은행 파업의 표면적인 이유는 ‘2010년 임단협 협상의 결렬’ 때문이다. 올해가 아닌 작년에 체결됐어야 할 단체협약을 놓고 지리한 교섭을 거듭하고 있음에도 노사의 입장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SC제일은행지부는 3월 8일 협상 결렬로 중앙노동위원회에 조정신청을 냈으며, 23일 중노위 조정이 최종 결렬되자 4월 22일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해 찬성률 86.3%로 파업을 가결했다.

노사가 의견대립을 좀처럼 좁히지 못하는 부분은 성과주의의 도입과 관련된 부분이다. 2010년 SC제일은행 임단협의 핵심은 전직원 성과연봉제와 후선역 제도의 도입 문제이다. 은행측은 변화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는 반면, 노조는 이와 같은 제도는 결국 퇴출 프로그램이 이름만 바꾼 채 작동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현재 SC제일은행의 임금체계는 호봉제(4급 이하 적용)이다. 따라서 일률적으로 인상되는 임금을 향후에는 개개 직원들의 업무성과에 따라 차등을 두겠다는 것이 은행의 방침이다. 예를 들어 기존에는 임금 4% 인상이 합의되면 모든 직원에게 일괄적으로 적용되지만 새로운 성과급제는 직원의 성과를 5등급으로 나눠 5등급은 0%, 4등급은 2%, 3등급은 4%, 2등급은 4.8%, 1등급은 5.6%로 차등적으로 인상하겠다는 안이다. 개인별로 임금 인상 폭이 다르지만 전체 직원 평균을 내면 4%가 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후선역 제도는 업무 저성과자를 후선으로 발령해 일선 영업점이 아닌 곳에 따로 모아, 목표를 설정하고 개인적으로 영업을 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개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임금을 최고 45%까지 삭감하게 된다. 만약 저성과자들이 일정기한까지 일선으로 복귀를 못하면 인사처리 상 자동 면직이 된다.

이와 같은 내용은 “급여 삭감형, 징벌형 급여체계로 노동조합으로서는 절대로 받을 수 없는 안”이라며 SC제일은행지부는 강경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노조가 성과주의 도입에 무조건 반대를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작년 4월에는 ‘고용보장을 위한 대책이 마련될 경우 성과급제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는 의견을 은행측에 제시했고, 노사 공동 TF까지 꾸려졌다.

김재율 위원장은 “과거 노조에 대해 회사의 발목만 잡는다, 보신주의적이고 집단이기주의적이라는 평가가 많았다”며 “노조도 필요하다면 변화에 동참해야 하는데, 이 변화는 전 직원이 동의할 수 있고 변화의 지점이 명확해야 한다”고 밝혔다. 즉 현재 은행측이 요구하고 있는 ‘변화 프로그램’은 비전과 전략이 부재한 상태에서 퇴출 프로그램만 시행하겠다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성과주의 도입은 미봉책

은행이 꺼낸 성과주의 도입과 관련된 카드에 노조가 반발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영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모기업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에 대한 조합원들의 불신이 깊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재율 위원장은 “지난해 국감에서 SC제일은행은 자산매각 건 등 의원들의 문제제기로 경영진이 고초를 겪었다”며 “따라서 한국투자에 대한 실패론이 나오기 시작했고 성과주의를 도입해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겠다고 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0년 국회 정무위 금융감독원 국정감사에서는 SC제일은행이 2005년 1월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에 합병된 이후 그해 5월부터 지점이 있었던 토지와 건물 25건 총 3,300억 원을 매각했지만 대금 용처에 대한 해명이 의문투성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가 하면, 금융당국의 자제요청에도 손쉽고 안전한 주택담보대출 등 가계 대출에 영업을 집중해 공익적 역할을 외면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노조는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이 은행으로서 공공성을 포기하고 단기 이익에만 치중하는 대부 업체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이는 제일은행 인수 이후 지난 6년 동안의 영업 방식 때문이다.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은 제일은행 인수 전 국내에서 2,000명의 대출 모집인을 데리고 영업을 했었다.

제일은행 인수 뒤에도 이런 영업 방식은 그대로 이어져 지금도 1,500명의 대출 모집인을 통해 대출 영업을 하고 있다. 6년 전에는 대출 모집인을 개별로 계약했다면, 지금은 대출 모집인을 관리하는 별도 법인 10여 개와 계약하고 있다.

노조에 따르면 대출 모집인의 실적이 모기지론(주택 담보대출)의 50% 이상을 포함해 전체 대출 부문의 50% 이상을 담당하고 있다. 영업 실적의 상당 부분을 도맡으면서도 이들의 인건비 부담은 SC제일은행 직원들에 비해 상당히 낮은 편이다. 이는 개개인의 성과에 따라 별도의 수수료만 지급하면 되기 때문이다. 회사로서는 직원을 줄이고 대출 모집인의 기여도를 높이는 것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올해 3월 전국 404개 지점을 377개로 줄인 것도 이런 의심이 들게 하는 이유다.

이런 현상은 왜 벌어지는 것일까? SC제일은행지부는 “한국의 경우 100년 가까이 금융시장이 발전해 온 체계가 다름에도 스탠다드차타드 그룹이 외국의 사례를 무리하게 적용시키려 들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잡음이 계속해서 발생하게 되는 것이고, 은행장을 비롯한 그룹 임원들은 본인의 임기 동안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미봉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 SC제일은행지부 김재율 위원장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조용한 파업’은 끝, 변화지점 마련되나

충북 충주와 강원 속초에서 50일 넘게 지속된 파업은 SC제일은행지부가 8월 29일 복귀를 선언하면서 또 다른 국면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태가 일단락된 것 아니냐는 시각에 대해 김재율 위원장은 “파업은 끝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또한 “우선 현업에 복귀한 이후 태업과 파업을 병행하는 것으로 전술을 수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SC제일은행지부의 이와 같은 ‘전술변화’는 파업에 참가한 조합원들이 무노동 무임금 원칙에 따라 급여를 받지 못하는 등 ‘피로감’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현재 파업에 참가한 조합원들이 기본급은 물론, 홀수 달에 지급되는 체력단련비를 비롯한 수당을 일체 받지 못하게 되면서 심적인 부담과 함께 생계에 대한 상당한 경제적 압박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김재율 위원장은 “파업 대오는 탄탄히 유지해오고 있지만 강원도의 벽지에서 옥쇄파업을 벌이는 것이 오히려 대국민 홍보 등의 활동에 제약을 가져온다고 판단돼 복귀를 결정했다”며 “각 영업점에서 조합원들이 고객과 대면하며 파업의 취지와 쟁점 현안에 대해 홍보할 수 있는 기회를 찾을 수도 있고, 임금을 받지 못해 오는 부담감도 상쇄시킬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고 밝혔다.

두 달 가까이 파업을 지속한 은행권 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관심이 적었다는 부분 역시 지부가 전술변화를 꾀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파악된다. 비슷한 시기 한진중공업 사태의 경우 희망버스를 통해 수만 명의 자발적인 지지자들을 동원하고 그룹 회장을 청문회에 소환하는 등 노동계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된 것에 반해 상대적으로 SC제일은행 사태는 ‘조용한 파업’에 그쳤다.

이는 ‘파업=고객불편’이라는 등식이 이번 사태에서는 성립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일부 이탈자를 제외하고 2,500여 명의 조합원들이 파업 대오를 지켰다고 지부가 밝혔음에도 은행 업무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진 못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SC제일은행의 한 관계자는 “창구업무보다는 ATM, 인터넷뱅킹, 폰뱅킹 등을 이용한 거래가 많기 때문에 예전처럼 고객들이 창구를 직접 방문하는 일이 상당히 줄어들었다”며 “신규업무 처리 시 통합영업점을 찾아야 하는 등 일부 불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우려할만한 수준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은행측의 집계에 따르면 파업 전 달인 5월에 이뤄진 거래건수 중 92%가 인터넷뱅킹, ATM 등 비대면업무였다. 나머지 8% 정도가 창구에서 고객을 응대해야 하는 대면업무였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파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단언한 SC제일은행지부의 입장에서도 풀어야할 과제가 많다. 우선 이번 파업에 대중들이 싸늘한 시선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번 사태가 시작되면서 은행측과 일부 언론은 “SC제일은행 직원의 1인당 평균 급여는 6,100만 원으로 우리은행과 같은 수준이고, KB국민은행 5,600만 원, 신한은행 5,600만 원, 하나은행 5,000만 원보다 많았다”며 상대적으로 고소득자인 조합원들의 파업 명분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노조는 “임원들의 급여가 합산돼 나온 평균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은행권 최저 수준”이라고 반박했다.

실제 임금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떠나 고소득자라고 해서 파업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이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각은 부정적인 게 사실이다. 이는 일부 대기업노조들의 파업이나 항공기조종사, 의사들과 같은 고소득자들의 단체행동을 접한 대중들의 반응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노동계에서 아무리 ‘보수언론 등의 왜곡과 호도’ 때문이라고 이야기해도 그런 반응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SC제일은행지부가 각 영업점으로 복귀해 고객과 대면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서 다발적으로 대국민 선전전을 강화하겠다고 전술을 수정한 데에는 이와 같은 대중의 정서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SC제일은행지부가 현장 복귀를 선언하기는 했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노사정이 사태 해결을 위해 중재에 나서기도 했지만 SC제일은행 노사의 입장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노사 양측의 입장이 바뀔 기미도 보이지 않아 당분간은 입장차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노조는 노조대로 “리처드 힐 은행장의 결단이 필요함에도 매번 얘기마다 입장을 바꾸면서 ‘언어적 차이’로 의사가 잘못 전달된 것이라고 발을 빼니 답답하다”고 호소하고 있으며, 은행은 은행대로 “파업의 주요요인들과 협상의 걸림돌에 대해 대부분 사측이 수용하고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했음에도 노조에 협상의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며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

또한 상급단체인 한국노총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위원장 김문호)의 올해 산별중앙교섭이 난항을 겪으면서 지난 7월 21일 쟁의행위 찬반투표에 들어가 93.2% 찬성으로 파업을 가결시키고 9월 금융권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에서 향후 SC제일은행의 노사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관심을 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