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움·반성·감사
안타까움·반성·감사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1.10.04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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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어머니를 추억하다
세월과 거리를 뛰어 넘은 어머니 사랑
[특집 02] 내 기억 속의 어머니

이소선 어머니께서는 먼저 스러진 아들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치열하게 한 평생을 사시고,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어머니, 뚜렷한 세 글자를 새기고 가셨습니다. 이소선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을 <참여와혁신>이 조각조각 모아서 ‘내 기억 속의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묶어 봤습니다.

이소선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닷새 동안 많은 사람들이 거리와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함께 했습니다. 이소선 어머니와의 소중한 추억을 꺼내 보여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어머니는 제일 든든한 ‘빽’

이숙희 전 청계노조 교육선전부장

이소선 어머니는 정말 ‘보통’ 어머니셨어요. 어머니들이 늘 자식들 걱정이 앞서시는 거처럼 항상 걱정이 많으셨지요. 우리들을 보면 항상 하시는 말씀이 ‘밥 굶지 않았냐. 끼니 챙겨 먹어라’ 이런 식이셨어요. 우리가 어떤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 때면 큰 맥락에서 해결 방식을 넌지시 일러주시곤 하셨어요. 본인이 직접 해결해 주시려고 하기 보단 우리가 직접 문제에 부딪쳐 보도록 해주신 거지요. 어머니가 늘 뒤에 계시다는 든든함 때문에 우리가 흔들림 없이 지금까지 이렇게 올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소연 기륭전자분회장

늘 든든한 노동자들의 ‘빽’이셨어요. 어디든 가장 어려운 자리면 달려오시곤 했어요. 집회 현장에서 먼발치에서 뵙고 큰 감동이었습니다. 직접 개인적으로 대면한 것은 ’08년 기륭 투쟁 현장이었어요. 그때 직접 찾아오셔서 손을 붙잡고 ‘단식 하지 마라. 밥 먹어가면서 싸워라. 죽지 말고 꼭 살아서 싸워라’라고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찾아 오셔서는 혹시라도 위험한 물건이 있는지 농성장을 발칵 뒤집어 놓으셨어요. 그때 저희가 농성장에 상징적으로 단두대 모형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걸 보시곤 거기에 목 맬 수 있다고 댕강 잘라 버리셨지요. 어머니가 그러셔서 차마 화를 내지도 못하고. ‘죽는 건 태일이 하나면 된다. 꼭 살아서 싸우자’고 말씀하셨던 게 계속 기억이 나네요.

김은임 노동조합 전 간부

처음 노동운동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서 1986년도 파업 현장에서 어머니를 처음 봤어요. 전태일의 어머니이지만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1986년 파업현장에 공권력이 투입됐을 때 아무도 농성장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음에도 어머니께서 ‘우리 딸들을 만나야 한다’시며 손수 혼자 거길 뚫고 오셨어요. 단지 찾아오신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지요. 좀 더 오래 사시며 이런 작은 희망들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으면 했는데 무척 안타까워요.

노동자들이 똘똘 뭉쳐 싸워야

박사훈 민주버스본부장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너무 많죠. 아시다시피 우리 버스 노동자들은 매우 힘들었고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처지에 있습니다. 조합원 동지들이 이소선 어머니를 뵐 수 있었던 건 노동절 때나 노동자대회 때였지요. ‘저 분이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되신다’는 얘기를 서로 나누면서 먼발치에서나마 어머니를 뵙고 그랬습니다. ‘노동자들이 단결을 안 하면 자본가들에게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서로 보듬어야 한다’ 그런 말씀을 평소 하셨는데, 지금도 대립 중인 소수 조직들에서 보면 힘든 와중에도 내부에서 실제로 큰 울림을 주는 말씀이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전노협 활동을 하던 시절 청계피복노조를 방문했을 때 인사를 드리면서 어머니를 처음 뵈었습니다.

이병상 정비사

개인적인 친분은 없습니다. 지금 저는 사이버노동대학 학생인데, 공부를 시작한 지는 2~3년 정도 됐어요. 공부를 하면서 그동안 근로기준법이 잘 지켜지지 않았고, 문제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최근 정리해고가 많은데 이 역시 같은 과정 속에 이어져 있는 거예요. 어머니였으면 절대로 그렇게 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최소한의 인간 권리를 짓밟는 행동이니까. 양대 노총은 물론이고 노동자들끼리 어디든 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요상 언론소비자주권연대 사무총장

이 세상을 바꾼 건 노동자인데, 노동에 대한, 노동자에 대한 중요성은 간과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다 노동자이고, 노동은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녜요. 일반 시민들의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해요. 이소선 어머니는 평생의 활동을 통해 그 사실을 일깨워 주신 분이시지요. 불편한 몸을 이끄시고서도 현장에 꼬박꼬박 나오셨어요. 열사의 어머니답게 항상 결연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한없이 인자하신 분으로 기억됩니다. 늘 힘이 있고, 특히 우리가 지쳐있을 때 힘을 불어 넣어주시곤 했어요. “예전과 비교했을 때, 노동운동 하기 좋은 세상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도 진보개혁운동을 게을리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하시며 우리의 기운을 북돋아 주시곤 하셨습니다.

최예륜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만큼 ‘어머니’라는 의미는 여러 가지인 거 같네요. 이소선이란 개인으로 어머니도 계시고, 전태일 열사를 낳고 키운 어머니라는 의미도 있고,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라는 의미도 갖고 계십니다.

오늘 이렇게 영결식에 오니 마음이 허전하고 무거워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다는 건 어쩐지 노동운동의 한 세대가 떠나는 느낌이 드네요. 어머니께서 버려야 할 것들, 여기저기서 버린 것들을 다 싸안고 가신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용산참사 때 어머니를 가까이서 뵈었어요. 그때도 연로하셔서 몸이 안 좋으신 상태셨는데도 오래 머무시며 유족들을 보듬으셨지요.

곁에서 바라 본 어머니

이씬 가수

5월 초에 어버이날을 앞두고 거리 공연하는 사람들이랑 전에 사시던 데에 어머니를 뵈러 갔어요. 반갑게 손을 잡아주셨어요. 인사드리고 나오는데 2층에서 계속 내려다보고 계시던 기억이 나요.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때쯤 몸도 많이 안 좋아지시고, 외로워하신다던 얘기를 들었는데…. 반갑게 맞아주시던 그때의 어머니가 마지막 기억이 됐어요.

김종훈 창신동 우진설비

참하셨어요. 말씀도 별로 없으시고. 제가 그 집에 가서 배관 일도 해드리고 그랬어요. 제가 여기서 태어나고 쭉 자라서 잘 알죠. 전태일… 분신할 때도 알고. 그 집에 가서 일하고 나면 고생했다면서 좋은 말씀 해주시더라고. 말씀을 많이 나누지는 못하고, 집에 가면 앉아계시고, 가끔 길에 다니시는, 그런 것만 봤습니다. 돌아가신 걸 지금 얘기 들었는데… 안 됐다는 생각이 들죠. 좀 더 사셨어야 되는데. 좋으신 분입니다.

창신동 화승부동산 주인

이 앞에 왔다 갔다 하시고, 들어오시고 이러거든. 원래는 창신 교회, 저기 저 낙산 올라가는 계단, 거기서 사셨어. 언덕 위로 다니셔서 힘이 드니까 우리가 그 방을 빼드리고 오는데 요즘에 전세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요 입구에 곱창집 뒤에 1억짜리 내놓은 걸 주인이 같은 전 씨야. 그 집에 가서 ‘같은 전 씨니까 8천에 줘, 8천에 줘’ 이래 가지고 ‘그러십시오’ 그랬다고. 그래서 계약을 했는데 둘째 아들이 가서 보니까 4층이거든. 노인네가 어떻게 다녀. 그러니까 해약을 해서 요 뒤로 가서 사시다가 이번에…. 나도 오늘 소식 들었어.

최삼태 한국노총 홍보선전본부장

제 이름이 최삼태입니다, 삼태. 어머니 아들 이름은 전태삼. 삼태, 태삼 이름이 같거든. 어느 날 노총에 오셨을 때, 어머니께 “저는 아드님과 이름이 같습니다. 기억해 주세요” 했더니, “아유, 그러냐”고 하시며 반겨 주셨지. 다시 어머니를 만날 때면 “안녕? 우리 아들 잘 있었어”라는 인사를 건네셨어요. 어머니께 “저 기억나세요?”하고 여쭤보면, 가만히 있지 않으시고 꼭 내 손이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어요. 정말 어머니 같은 분으로 기억할 겁니다.

아들 영화에 출연했다고 말씀드리니, “누구로 나왔어?” 여쭤보셨는데, “못된 역, 근로감독관2요” 라고 대답했더니, 어머니 말씀, “좋은 역 좀 하지!”

김태원 전태일 열사의 벗

어머니는 팔도잡놈들을 만나서 그 시끄러운 소리를 다 들으셔야만 하셨지. 그 한을 지울 수 있을지. 하지만 어머니는 그 팔도잡놈들을 다 좋아했어. 싫은 사람을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내동댕이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모두가 지닌 아픈 사연들을 다 들어주시고, 감싸안아주셨지. 본인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늘 무언가를 해 줘야 마음을 놓으셨어. 때로는 아들 친구의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그 사람을 꼭 도와주시곤 하셨어.

70년대는 무척 어려울 때야. 어머니는 배고플 때면 라면과 국수를 끓여 내어주시곤 하셨지. 그러시며 “내가 해 줄건 이것 밖에 없다”고 말씀하시고. 어머니는 누가 올 것이라는 예상보다, 언제라도 찾아올 배고플 손을 위해 항상 미리 그런 것들을 준비하시곤 하셨지. 40년 전 이야기지만, 지금 아직도 생생해. 더욱더 어머니의 얼굴이 그립고 생각나.

김동만 전태일재단 이사

보고 싶다고 연락이 와서, 7월 18일에 전태삼 씨와 함께 어머니를 찾아뵙고 2시간 정도 옛날이야기를 재미있게 나누며 노닥노닥했지. 그런데 2시간 후에 어머니께서 쓰러지셨어요. 어머니가 의식이 있으실 때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내가 되 버린 거지. 어머니와의 첫 인연은 20년 전이에요. 마석 모란공원에서 있었던 추모행사에서 첫 대면을 했고, 이후 계속 찾아뵈었고. 내가 취임할 때, 전태일 열사의 영정을 들었던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지. 어머니를 한 마디로 비유한다면 노동계의 ‘큰 바위 얼굴’이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소선 어머님이 계시다는 그 자체가 큰 믿음을 줍니다. 항상 우리의 뒤엔 이소선 어머님이 계셨고.

실로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돌아가셨어. 우리들에게는 믿고 따르는 어머니시니 허전한 마음이 커요. 갑작스레 쓰러지신 것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저더러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행복한 사람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