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안 잘 거면 오지도 말라”던
이소선 어머니와의 마지막 하룻밤
“하룻밤 안 잘 거면 오지도 말라”던
이소선 어머니와의 마지막 하룻밤
  • 참여와혁신
  • 승인 2011.10.04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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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03] 어머니, 김진숙을 만나다

ⓒ 노동과세계
내가 2008년 기륭전자 경비실 옥상에서 단식을 하고 있을 당시, 어머니는 불편한 다리로 경비실 옥상까지 올라와서 내 손을 꼭 잡고 ‘죽는 건 태일이 하나로 족하다 살아서 싸우자’고 하셨다. 필경 단식을 말리러 오셨을 어머니가 우릴 직접 보시고는 “단식을 중단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그렇게까지는 말 못하겠어. 너희가 알아서 죽지 마” 하며 잡은 손에 힘을 주셨다. 어머님의 말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너무 죄송스럽기도 하고, 무슨 대단한 요구도 아닌 내가 일했던 일터에서 일 좀 하겠다는 것이 이렇게 목숨까지 걸고 싸워야 하는 건가 하는 서글픈 마음이 밀려왔다. 그렇게 나의 어머니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끝내 지키지 못한 약속

자주 찾아 봬야겠다고 맘은 먹었지만 이리저리 바쁜 투쟁일정 때문에 찾아뵙지 못하다 2010년 설 즈음에서야 다시 어머님 댁에 방문했다. 어머님 몸이 좋지 않아 집에서 지낸다고 하셔서 댁으로 찾아간 것이다. 갈비랑 잡채 등 음식재료를 준비해서 점심을 함께 해먹었다. 이날은 윤종희 조합원 아이 둘을 데리고 함께 갔다. 초등학생인 해밀이는 태일이 만화책을 읽었던 터라 이 할머니가 태일이 주인공 어머니라고 엄마가 연신 설명을 한다. 시끄러운 것으로 유명한 기륭 조합원들과 이리저리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노동자들이 3일만 집밖에 안 나오면 세상이 바뀌는데 그걸 못 한다”고 아쉬워 하셨다. “어머니 저희가 열심히 할게요” 하며 조합원들이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보내고 아이들이 집에 가자고 조금씩 칭얼대기도 했고 저녁이 다 되어서 이제 그만 가보겠노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하룻밤 안 잘 거면 앞으로 오지 마라” 하신다. 한 끼로 안 채워지는 외로움이나 그리움이 있나보다. 그 말씀을 들으니 또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 어머니가 이야기도 많이 하시고 싶은데 몸이 좋지 않아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않아 힘드신 것 같았다. “진짜로 또 올게요. 그때는 꼭 하룻밤 자고 갈게요.”

하지만 우리는 끝내 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기껏 어머니 입원소식을 듣고 중환자실에 있는 어머니를 봬야 했다. 왜 진작 찾아뵙지 못했는지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어머닌 강인하시니까 꼭 깨어나실 거야 생각하며 우린 또 무심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랬는데 갑자기 날아온 문자, ‘이소선 어머니 영면’ 순간 가슴이 온통 내려앉았다. “죽는 건 태일이 하나로 족하다. 우리 살아서 싸우자”는 말만 뇌리에 가득 찼다.

ⓒ 노동과세계
또다시 정문에서 막히다

생전에 어머님은 ‘희망버스를 타고 김진숙이 만나러 가야하는데~’ 하시며 안타까워 하셨다. 2차 희망버스를 앞두고 어머님이 영상으로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들 어머니가 건강을 회복해서 꼭 희망버스를 함께 타셨으면 좋겠다고, 그러면 우린 더 많은 힘이 날거라고, 김진숙도 많은 힘이 날거라고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를 다시 찾아뵙겠다고 그때는 하룻밤 자고 가겠노라고 했던 약속을 생전에 지키지 못하고 어머니 영정을 모시고 한진중공업을 다녀오며 하룻밤을 함께 지샜다.

살아계셨다면 당연히 들렸을 솥발산 공원 박창수와 김주익열사 묘역을 돌아 85호 크레인이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갔다. 부산의 많은 이들이 모여 어머님의 추모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머니 영정이 단상위로 오르자 분위기가 더욱 숙연해 진다. 전태일 열사와 어머니가 만나는 내용의 추모공연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툭툭 떨어진다. 무대를 바라보다 등 뒤 85호 크레인을 바라본다. 나뿐 아니라 그곳에 있었던 많은 이들이 그랬다.

오늘 만큼은 생전에 어머니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김진숙을 바로 앞에서 만나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은 사전 협의에서 정문을 열어주겠다던 약속을 뒤집고 정문을 철통같이 봉쇄했다. 물론 조남호의 약속 따위로 어머님과 김진숙 동지를 만나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머님 마지막 가시는 길 편안하게 김진숙 동지를 만나게 해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한진 자본은 어머니 영정 하나도 수용할 수 없는 겁쟁이들이었다. 참으로 치졸한 작태였다.

ⓒ 노동과세계
노동자와 영원히 함께 계실 어머니

추모제가 끝나고 많은 이들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 서울에서 내려간 우리들은 정문이 봉쇄 되어 있다고 포기하고 그냥 서울로 돌아올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영정을 모시고 한진 동지들과 함께 정문으로 가서 문을 열어줄 것을 촉구했다. 늘 투쟁의 현장에서 어머니가 앞에 섰듯이 오늘도 어머니가 맨 앞이다.

한진에서 고용한 용역들이 우리가 정문 앞으로 가는 것을 몸으로 막았고 경찰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어머니를 모시고 몇 사람만이라도 85호 크레인에 다녀오게 해달라고 소리쳤다. 호소했다. 정말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에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김진숙을 만나게 해달라고. 호소하고 호소했다.

하지만 저들은 냉정했고 냉혹했다. 사람의 말이, 그토록 절박한 마음이 통하지 않았다. 한참을 실랑이 하다 어머니를 모시고 정문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영정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싸울 수는 없었다. 어머니를 맨 앞에 모시고 ‘솔아 푸르른 솔아’, ‘어머니’ 등 노래를 목 놓아 부르며 한진 담벼락을 돌아 85호 크레인 가장 가까운 곳에 모였다. 비록 담벼락이 있고 거리는 좀 떨어졌지만 우리의 함성과 85크레인의 한진 조합원들과 김진숙 동지의 목소리가 소통할 수 있었다.

우린 큰 함성으로 어머니의 목소리를 대신했다. ‘꼭 살아서 내려오라’, ‘반드시 승리하자’, ‘힘내라’, ‘김진숙, 박성호, 박영제, 신동순, 정홍형 사랑한다’ 특히 신동순 조합원은 현재 단식 30일이 훌쩍 넘은 상태다. 우리가 목이 터져라 외치자 85호 크레인에서도 구호를 외치고 함성을 지른다. 모두들 두 손을 흔들며 꼭 살아서 만나자고, 어머니 말씀대로 죽는 건 태일이 하나로 족하니 살아서 싸우자고 목 놓아 외치는 사람들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른다. 85호 크레인 사람들은 아마 우리보다 더 많은 눈물로 어머니와 김진숙 사이를 갈라놓은 곳을 메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린 그토록 어머니가 만나고 싶어 했던 김진숙과 한진조합원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개인적으론 이렇게라도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든다. 6일 새벽 4시경 장례식장으로 돌아왔고 오전 8시부터 어머니와의 이별식이 진행됐다.

기륭을 비롯한 비정규 노동자들, 힘겹게 투쟁하고 있는 쌍용차 노동자들, 한진 노동자들, 전북고속버스노동자들 모두 어머니 앞에 살아서 열심히 싸워 승리하겠노라고 그래서 정리해고 없는 세상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겠다고 다짐하며 투쟁조끼, 투쟁약속을 적은 펼침막, 편지, 책 등을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에 드렸다.

어머니는 평생을 투쟁하는 이들과 함께 하셨다. 우리 노동자들의 어머니 이소선. 지금도 어머니는 한진에서, 쌍용에서, 재능에서, 강정마을에서, 현대차비정규 노동자들과 함께 계신다. 여전히 노동자들의 든든한 의지처로 말이다.

김소연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