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승무원은 철도공사가 직접 고용했다
KTX 승무원은 철도공사가 직접 고용했다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1.11.01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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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법, KTX 승무원은 철도공사가 직접 고용
철도공사, 판결 불복하고 대법원에 상고로 맞서
[뉴스 後] 끝나지 않은 KTX 승무원의 복직이야기

ⓒ 참여와혁신 포토DB
하늘만 보아도 가을임을 실감할 수 있는 날, 2011년 10월 7일 늦은 1시, 용산역 지하 커피숍에 하나, 둘 사람들이 모였다. 유모차를 끌며 기저귀 가방을 맨 엄마, 노트북을 든 정장차림의 직장여성, 나들이라도 나온 듯 가벼운 니트 차림의 여성도 있었다. 대학 동창들 모임 같았다.

아직도 조합원인가요

이들은 KTX 승무원들이다. 또한 철도노조 KTX 승무지회 조합원이다. ‘아직도 이들이 조합원인가요? 협력업체에 입사했거나 뿔뿔이 흩어지지 않았나요?’ 대부분이 2006년 노동계를 뜨겁게 달군 KTX 승무원들의 투쟁이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하거나 때론 잊힌 과거의 이야기로 여긴다. 하지만 KTX 승무원들은 아직 투쟁 중이다. 노동조합도 성성하게 살아있다.

“저희는 투쟁 중이라고 생각해요. 머리띠를 묶고 거리에서 농성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에요. 형식은 다르지만 투쟁 중인 것 맞아요.”

2006년 5월 31일, KTX 승무원들은 해고되었다. 2004년 3월 고속철도 개통에 맞춰 채용된 KTX 승무원들은 자신들이 협력업체의 비정규직인 줄 몰랐다. 철도공사 승무원 채용에 입사지원서를 냈다. 입사면접도 철도공사에서 진행했다. 수습교육도 철도공사에서 받았다. 수당과 퇴직연금은 물론 4대 보험료도 철도공사가 부담했다. 업무도 철도공사의 지시를 받았다.

이들이 취업할 때 철도공사가 100% 지분을 가지고 있는 (재)홍익회 소속 ‘철도유통’과 맺은 고용계약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철도공사가 나서서 ‘2년 뒤에는 공사 정규직으로 전환된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고속철도가 개통될 당시 KTX 승무원들은 항공사 승무원들에 버금갈 정도로 취업준비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우수한 인재들이 입사지원서를 냈다. 하지만 1년이 지나자 이상한 조짐이 보였다. 유니폼, 배지, 모자를 추가로 주문하면 철도공사 소속 팀장은 무상으로 지급받는데, 승무원들은 월급에서 공제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급여가 올라야 하는데 1년이 지나고서는 오히려 급여봉투가 얇아졌다. 하지만 2년 뒤에는 철도공사 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불만을 잠재웠다.

입사 당시 상황을 김영선 씨에게 들었다.

“정년보장 이런 이야기 했을 때, 저희가 확실한 거냐고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홍익회랑) ‘계약서 쓰는 건 형식일 뿐이다. 철도에 이렇게 유능한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 온 적이 없다. 지금 철도청은 공무원이기 때문에 나라에서 TO를 내주질 않는다. 그래서 내년에 철도공사가 되면 여러분들도 다 정규직으로 전환해줄 거다. 여러분들 다 정규직 될 사람들이다.’ 그래서 저흰 정말 그 말을 바보같이 믿었어요.”

이 말에 속아 묵묵히 정규직 될 날을 기다리던 KTX 승무원에게 찾아온 것은 철도유통 계열사인 ‘KTX 관광레저’로 승무업무를 위탁할 거니 소속을 위탁업체로 옮기라는 이적 통보였다.

ⓒ 참여와혁신 포토DB
철도공사는 약속을 지켜라

2006년 승무원들은 입사 당시 약속처럼 철도공사가 직접 고용하라고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이에 대한 답변은 해고였다. 승무원들은 이대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단식, 삭발, 집회, 고공농성, 때론 쇠사슬을 몸에 칭칭 감고 거리로 나섰다. 경찰차에 끌려 유치장에도 들어갔다. 숱한 눈물을 흘렸고,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해를 넘기고, 또 해를 넘겼지만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2008년 8월 26일, 당시 지부장을 맡았던 오미선 씨와 조합원 3명은 ‘네모난 통을 좌변기로 하나 만들어서’ 서울 용산역 40미터 높이의 조명철탑에 오른다. 철거 대상이었던 조명탑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삐걱거렸다. 나사가 풀려 떨어지기도 했다. 낡아버린 철탑은 쓰다버려지는 자신들의 삶과 같았다. 기차가 달릴 때마다 철탑은 흔들렸다. 비바람이 치던 밤에는 ‘새집처럼 세워진 텐트’를 삼켜버릴 것 같았다. 매서운 바람과 함께 공포가 몰려 왔다.

“위에서 보는 하늘은 느낌이 달랐어요. 뭔가 다른 세계 같고, 왠지 밑에서 싸울 때 본 하늘하고는 다른 거예요. 뭐랄까, 희망이 보일 것 같았어요.”

조명철탑 위에서 오미선 씨는 희망을 보았다. 하지만 지상에 내려서자 ‘희망’은 신기루에 불과했다. ‘너희들은 철도공사가 고용하는 KTX 승무원은 될 수 없다. 위탁업체로 가라!’는, 지금까지의 싸움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합의안에 서명하기를 강요했다.

조합원들은 이 합의안을 받을 수 없었다. 한편에선 농성장을 떠나는 조합원이 있었다. 위탁업체라도 들어가자는 조합원들도 있었다. 의견은 분분하고 조합원은 흔들렸다. 노동조합은 선택했다. ‘지더라도 굴복은 할 수 없다. 비겁하게 사느니 패배를 인정하고 새로운 싸움으로 굴종하지 않는 삶을 개척하겠다.’

오미선 씨는 말한다.

“철탑농성으로 뭔가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결국 해결하지 못했어요. 철도공사와 싸움에서 진거죠.”

18일 만에 철탑농성은 마무리되었다.

“그걸 넘어섰으면 이겼겠죠. 하지만 패배를 인정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진 거 아니라고 뻗댈 수야 있겠지만, 능력이 안 돼서 진 거라고 인정”해야 새로운 투쟁을 준비할 수 있다고 여겼다. 조명철탑 농성을 끝내고, ‘우리는 당당히 투쟁하는 KTX 승무원입니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그 뒤로 푸른 셔츠의 KTX 승무원을 거리에서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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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지 않는 패배

성명서에서 철탑투쟁은 패배한 투쟁이라고 불렀지만 포기하거나 굴복하지는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해 11월 법원에 철도공사를 상대로 ‘근로자 지위 확인 청구 소송’에 들어간다. 싸움은 거리에서 법정으로 옮겨갔다.

2011년 8월 19일, 서울고법 민사15부 재판정.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KTX 승무원은 철도공사에서 ‘직접 고용된 근로자’임을 인정하여 원고승소 판결을 했다.

커피숍에 하얀 니트를 입고 나온 오미선 씨는 고법 승소 소식에 얼굴이 환하다.

“이제까지 저희끼리만 KTX 승무원이다, 직접 고용해야 한다, 하며 농성하고, 파업하고, 투쟁했는데, 이제 우리 요구의 정당함이 공식화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의미가 굉장히 크고, 사실 지금도 많은 투쟁하는 사업장들이 어렵게 싸우고 있는데, 이분들에게 이번 판결이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들은 아직 KTX을 타지 못하고 있다. 철도공사는 고법 판결에 불복해 9월 2일 대법원에 상고했다.

오미선 씨 등 KTX 승무원들은 고법 판결 뒤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철도공사는 자신들을 원직복직 시키라고 요구했다. 오미선 씨는 철도공사에서 아직 “공식적인 대답은 없었다”며, 기자들을 통해서 철도공사가 “대법원에 상고했다는 사실도 알았다”고 한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정리해고 된 노동자들이 제소한 해고취소 소송이 지난 1월 서울고법에서 패소하자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고 법원의 판결을 수용했다.

지난 9월 23일 국회 국토해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은 “철도공사는 지난 8월 서울고법에서 승소한 여직원들을 복직시켜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철도공사는 대법원 상고 말고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저희 생각대로 비겁하지 않게 싸운 것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용산역 지하 커피숍에서 만난 KTX 승무원들은 철도유통 계열사로 승무업무를 위탁한 ‘KTX 관광레저’로 이적하지 않고 투쟁한 자신들의 행동을 자랑스럽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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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겨도 아물지 않은 상처

시간은 어느덧 6년이 흐르고, 법정에서 승소도 했다. 하지만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당연한 주장이 거부당하고, 거리로 내쫓긴 지난 시간은 “죽을 때까지 아물지 못할 것 같아요. 아무리 저희가 이긴다고 해도 가슴에 앙금으로 남아있을 거예요.” 이제 결혼을 한 김진옥 씨의 안경 너머 눈물이 머문다.

이들이 승무원으로 입사한 나이는 이십대 중후반. 한참 사회를 배워나가고 미래의 꿈을 피울 때였다. 오미선 씨는 파업 중에 불어 공부를 했다. 자신의 청춘을 거리에서 농성하며 보낸다는 사실이 너무 서글퍼 짬이 나면 불어책을 폈다.

“파업을 해서 상처가 있고, 파업을 해서 힘들었다는 것보다는 잃어버린 시간들이 아깝고,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지금도 계속 남아 있어요.”

오미선 씨는 집안에서 맏이다. 이웃들은 오미선을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하기도 했고, ‘너희 언니 아직도 농성하니?’라는 말에 동생들의 마음이 위축되지 않았겠냐고 떨린 목소리로 말한다.

김진옥 씨는 첫 직장인 철도공사에서 거짓을 배웠다.

“정규교육을 받으면서 느꼈던 사회와 현실 사회는 너무 괴리가 컸어요. 정직하게 살아라, 남을 배려하며 살아라, 실지로 사회 나와서는 전혀 맞지가 않아요.”

거리 농성 대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서며 법정 싸움으로 복직을 준비하던 이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투쟁’을 외치며 보낸 3년의 시간은 이십대 청춘에게 공백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평생 가도 채울 수 없는 공간으로.

“공백 기간이 너무 기니까, 사회에서 인정해주지 않는 친구, 정말 처음부터 하나씩 밟아가는 친구들이 많아요. 그게 참 안타까워요. 능력이 뛰어난 친구들이 정말 많은데….”

김영선 씨는 연신 노트북을 들여다보면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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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달라도 희망은 하나

이제는 새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기도 하고, 아기 키우기에 정신을 빼앗기기도 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KTX 승무지회 조합원으로 활동을 하고, 단 하루라도 다시 승무복을 입고 KTX 승무원으로 일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회의나 중요한 일이 있으면 연차를 내든 월차를 내든 부산에서도 달려옵니다.”

김영선 씨는 “아직도 강하게 믿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게 희망일 수도 있어요”라고 말한다. KTX 승무지부에 중요한 일이 있으면 전국에서 조합원들이 서울로 모여든다. 일터와 삶터는 이제 다르지만 그들의 ‘희망’은 아직도 하나다.

어느덧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늦은 3시가 되자 헐레벌떡 철도노조 서울본부 KTX 승무지부 김승하 지부장이 들어선다. 지부 회의를 시작한다. 매달 한 번씩 모여 회의를 하고, 법정 싸움 및 대응에 대해 논의를 한다. 예전처럼 긴장감은 없다. ‘상황 공유’가 가장 큰 목적이다. 여기서 ‘상황’은 꼭 복직만은 아니다.

“애 크는 얘기, 누가 결혼한다는 이야기, 여자들 모이면 이 얘기 저 얘기 마구 하잖아요.”

회의는 수다로 치닫는다고 오미선 씨는 말한다.
이들의 수다가 ‘고장 난 한국사회’의 풀어진 나사를 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