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보다 쉬운 것부터 요구하라
중요한 것보다 쉬운 것부터 요구하라
  • 최영우 한국노동교육원 교수
  • 승인 2006.01.05 00:00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영우
한국노동교육원 교수
‘J사는 현재 임ㆍ단협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동종업종 5개 노조가 공동요구안을 작성하였고, 그중에서 대표격인 I사 노조가 가장 먼저 단체교섭을 요구하였다. 노조는 임금 8.2% 인상, 근무형태 변경, 인력충원, 탄력적 근로시간제 도입 반대 등의 요구안을 사측에 제시하고 그 중 인력충원건을 가장 먼저 쟁점화시켰다’.

 

 

스티븐 코비(Stephen R. Covey)가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원제 ; 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에서는 7가지 습관 중의 3번째로 ‘중요한 것부터 먼저 하라’를 언급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해야 할 많은 일 중에서 ‘중요한 것’보다는 ‘급하거나 하기 쉬운 것’부터 먼저 하는 잘못된 습관을 지적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협상에서는 그대로 통용되기 어려울 것 같다. 많은 협상의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부터 먼저 협상이슈로 다룬다면 그것은 상대방도 양보할 수 없는 이슈로 인식되어 협상초기부터 문제를 꼬이게 만든다.


우리는 어떤 협상을 하든 단일의제를 가지고 상대방과 마주하는 경우는 드물다. 임금교섭이라고 하더라도 단일의제처럼 보이는 임금인상 요구안에는 기본급, 수당, 성과급 등의 다양한 사항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 가지 다양한 의제들의 협상우선순위를 정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 요구조건의 관철이 어려운 것과 덜 어려운 것을 분류한 다음 상대방이 받아들이기 쉬운 것부터 요구하는 것이다. 


판매기법에서 흔히 사용되는 ‘Foot in the door technic’이 있다.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한발 들이밀기 기술’ 정도가 될 것이다. 주인이 문을 열었을 때 판매사원이 자연스럽게 한쪽 발을 문 안으로 밀어 넣어 문을 못 닫게 한다는 뜻으로, 부담 없는 부탁으로 상대방의 승낙을 얻은 다음 서서히 단계를 높여서 자신이 의도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사람이 상대방의 요구를 한번 들어주게 되면(그 요구가 단순한 것일지라도) 그 다음 요구도 들어주기 쉬운 상황이 된다는 것에 바탕을 둔 것으로, 심리학에서는 이를 ‘커미트먼트’(commitment)라고 한다.    


물론 협상에서는 이와는 정반대되는 ‘Door in the face technic’ 전술도 종종 구사된다. 상대방이 문을 열면 갑자기 얼굴을 들이민다는 것으로, 상대가 절대로 수용해 줄 수 없는 협상안을 일부러 제시해서 상대가 거부하도록 만든 다음, 자신이 양보하는 척 하면서 진짜 요구사항을 나중에 꺼내 놓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일종의 레드 헤링(red herring) 전술로써 비윤리적인 협상기법의 하나로 볼 수 있는데,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노사협상에서는 권할만한 기법이 아니다. 


쟁점이 되는 협상의제가 단일한 의제인데도 불구하고 노사간에 쉽게 타결되기 어려운 내용이라면 그 의제를 가능한 여러 개의 소의제로 분리하여 협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노사가 둘 다 이기는 win-win 협상이 되지 않고 lose-lose 협상이 되는 것은 한 가지 의제를 가지고 서로 이기려고 다투는 데서 많이 나타난다.

 

단일의제를 복수화하여 쉬운 것부터 요구하거나, 최초의 의제에서 파생된 의제를 먼저 다루는 식으로 교착상태를 타개할 수 있다. 노조에서 근무형태를 3조 3교대에서 4조 3교대로 변경을 요구할 때 이것이 단일의제로서 쉽게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근무형태 변경과 연계하여 회사측에서 ‘생산성 몇 % 향상’이라는 조건을 제시하는 식으로 의제를 복수화하여 협상을 진행해 가는 식이다.


앞의 사례에서 J사 노조는 협상의제 중에서 노조입장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의제보다 상대방인 사측이 받아들이기 쉬운 의제부터 협상을 시작했어야 했다. 중국산 저가제품이 밀려오고, 당분간 해당업종 경기전망이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오히려 인력충원을 요구한 것은 회사측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항이었다. 협상의제를 중요한 순서대로 분류하되, 협상은 중요한 것이 아닌 쉬운 것부터 시작하라. 이것이 협상을 주도적으로 이끌면서도 win-win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