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희망을 달콤하게 버무리다
꿈과 희망을 달콤하게 버무리다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2.03.05 20:10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사동 명물 ‘이가강정’, 오늘도 즐겁게 일한다
딱딱한 강정은 이제 그만, 달인의 비법은?
[삶의현장] 이가강정

봄기운이 잠깐 고개를 내밀다 꽃샘추위에 사그라진 날이었다. 서울을 비롯해 중부지방의 기온이 영하 9도까지 떨어진 2월 중순 어느 날, 인사동 골목의 명물 ‘이가강정’ 노점을 찾았다. 두꺼운 옷으로 온몸을 꽁꽁 무장한 강정 ‘달인’ 이영석 씨(63)가 “내복은 입고 왔어요?”라며 인사를 건넨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추웠다. 두 시간 넘게 찬바람 맞으며 서 있으니 뼛속이 시리다는 표현이 실감난다. 풍족해진 먹을거리 탓에 점차 현대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전통 주전부리인 ‘강정’이 오늘처럼 추운 날 제대로 팔리긴 할까? 의외로 이런 걱정은 기우였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과연 강정이 잘 팔릴라나?

서울 종로구 인사동거리 노점들의 오픈 시각은 대략 정오 즈음부터다. 이가강정을 운영하는 이영석 씨와 안민자 씨(54) 역시 11시 반이면 영업 준비로 분주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손이 많이 간다. 전날 미리 만들어 포장해 둔 색색의 강정 봉지를 가지런히 보기 좋게 진열하는 것에서부터, 한 쪽에는 엿을 녹여 강정을 비빌 수 있도록 간이 가스 조리대를 설치한다. 강정의 속 재료인 각종 튀밥이며 견과류도 좁은 공간의 동선에 맞게 준비한다.

아직 ‘개시’도 안 했는데 노점 앞을 지나가던 이들이 관심을 보인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이 씨와 안 씨의 모습에 외국인 관광객들은 호기심을 보인다.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한 행인은 어깨를 옹송그리고 바삐 지나치다가 주인장을 불러 두어 봉지를 구입한다. 아예 일찌감치 좌판을 벌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사가는 사람들도 있다.

본격적으로 물엿을 데워 강정을 버무리기 시작하자 호기심 많은 사람들에겐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해바라기 씨며 땅콩, 건포도, 아몬드, 흰 깨와 검은 깨 등 푸짐하게 들어가는 견과류에 구경꾼들의 눈빛이 반짝인다. 맛보기로 따끈따끈한 강정을 썰어 내자 너도나도 한 점씩 먹어보고 탄성이 이어진다. 일본인 관광객 무리에선 연방 “오이시이~(맛있다)”라는 감탄사가 터진다. 이가강정은 식어도 딱딱해지는 게 덜한데, 여타 강정들이 녹인 설탕으로 재료를 버무려 굳히는 반면 조청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큼직한 솥에 녹인 조청을 한 국자 퍼 넣고 쌀 튀밥, 보리 튀밥, ‘오란다’ 과자라고 불리는 동글동글한 과자 알갱이와 각종 견과류를 넣고 양손에 든 주걱으로 재빠르게 고루 비빈다. 솥은 뭉근하게 올라오는 불로 적당히 가열돼 있기 때문에 조청이 타 눌어붙을 염려는 없어 보인다. 넙적한 사각 틀에 버무린 재료를 붓고 골고루 잘 펴 준 다음, 국수 밀대처럼 생긴 묵직한 공이로 꼭꼭 다져가며 모양을 잡는다. 오늘처럼 추운 날씨에는 동작이 잽싸야 한다. 찬바람을 맞아 물엿이 금세 굳기 때문이다.

안민자 씨가 살짝 일러준 이가강정만의 비법을 공개하자면, 재료를 버무릴 때 땅콩기름을 조금 섞는 것이다. 그러면 특유의 향이나 고소한 맛이 배가될 뿐 아니라, 강정에서 윤기가 흐르고 질감도 부드러워진다고 한다.

젊은 층들은 심심풀이 간식용으로 오란다 과자로 만든 강정을 즐겨 찾는단다. 아마도 어린 시절 시골 할머니 댁에서 맛보던 추억 때문에 찾는 것 같다고 안 씨는 설명했다. ‘오란다’는 네덜란드를 가리키는 홀란드(Holland)의 일본식 발음이다. 밀가루, 전분 등으로 동글게 빚어 튀겨낸 이 과자를 왜 하필 오란다라고 부르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 개화기 때 외국의 식재료나 식문화가 들어오면서 외국식 과자를 통칭하는 표현으로 굳어진 게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남은 것이라고 추측된다.

건강에 대해 관심이 높은 고 연령층이나 오가닉 식품 등에 익숙한 외국인 관광객들은 견과류들로만 버무린 강정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밖에도 백련초와 복분자로 고운 붉은 빛깔로 물들인 강정이나 녹색 빛을 띠는 녹차 강정, 솔잎 강정, 샛노란 빛깔의 치자 강정, 구수한 누런색인 단호박 강정, 보리 강정 등도 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일본인 관광객, 연방 “오이시이~”

이가강정의 대표 이영석 씨는 노점 경력만 벌써 15년째이다. 강정을 만들기 시작한 것도 13년 전 일이다. 함께 일하는 안민자 씨가 합류한 지도 어느덧 9년이 흘렀다. 인사동거리 노점들 중에서도 터줏대감 격이고, 나아가 명물로 자리 잡았다.

비결이 뭘까? 안 씨는 요즈음의 천편일률적인 인사동 풍경을 가리켜 “솔직히 메이드 인 차이나 거리 아니냐”고 반문했다.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예전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간 데 없다. 문인들이나 예술인들이 모여 대폿잔을 기울이던 동동주집은 세련된 이탈리아 레스토랑으로 바뀌고, 수십 년 묵은 고미술상이나 골동품점 대신 조잡한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 들어섰다. 거리를 걷노라면 능숙한 일본어나 중국어로 호객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서울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한 만큼 발 빠르게 상권이 적응하는 것이야 당연하다. 그렇다 해도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를 호흡하고자 인사동거리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매력이 있을까 생각해 보면 아리송하다. 명동이나 동대문 일대가 쇼핑거리로 이름이 난 것처럼, 인사동 특유의 즐길 거리가 빈약해졌다는 게 이곳 터줏대감인 이 씨와 안 씨의 말이다.

한복을 입고 외국인들에게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강정이라는 전통 간식을 열심히 알리는 것도 그런 ‘아쉬운 점’에 특화된 장사비법이다. 과연 잠시 함께 거리에 서 있는 동안에도 관광객들이 함께 기념사진 촬영을 부탁하는 등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한 외국인 손님은 4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을 인화해 다시 인사동을 일부러 찾아와 전해주기도 했다.

그중에는 제법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한 관광객들도 있는데, 인사동거리에서 이 씨와 안 씨를 발견하면 그렇게 반가워할 수 없다고 한다. 안 씨의 경우, 이렇게 사귄 외국인 친구들(고객들)과 사진 이메일도 자주 주고받는다고 한다.

강정의 맛이 보편적으로 거부감이 심하지 않다는 점도 인기비결 중 하나이다. 혀끝에 자극적으로 와 닿는 단맛이 아니라, 은은하게 재료의 고소함을 감싸주는 단맛이기 때문에 쉽게 물리지 않는다. 인사동을 많이 찾는 일본인 관광객들은 강정의 맛을 보고는 “그리 달지 않고 견과류가 많이 들어서 건강에 좋을 것 같다”며 각자 한두 봉지씩 구입해 가기도 했다.

외국인 관광객에게만 인기가 좋은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한 남자손님이 지나는 길에 강정 두 봉지를 사 갔는데, 그 다음날 또 들러서 다시 두 봉지를 사 가더란다. 그래서 그 손님더러 “맛이 좋았냐”고 물어보자,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어린아이들에게 하나씩 맛을 보여주다 보니 정작 자신이 먹을 게 없어서 다시 사러 왔다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지금은 이가강정의 단골손님이 됐다.

얼마 전 방송을 통해 시중에 판매되는 과자에 들어간 화학 식품첨가물이 아이들에게 아토피성 피부염 등을 유발시킨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도 이가강정이 크게 주목받았다. 주로 젊은 엄마들을 위시로 아이들에게 먹을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단골이 됐다. 디카족과 블로그족이 늘어나 이가강정이 저절로 홍보되기도 했다. 결국 손님들의 성화에 못 이겨 이가강정 본점은 길거리 노점이면서 인터넷 홈페이지를 꾸미고 택배를 통해 판매도 하고 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인사동 다시 찾게 만들려는 노력

매일 11시 반에 나와 보통 밤 11시 경까지 장사를 마무리한다. 따로 휴일은 없다. 남들이 쉬는 날이 오히려 이가강정은 대목이다.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이 아니면 항상 인사동거리를 지키고 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주말이면 밤늦게까지, 앉아서 다리쉬임할 틈도 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보통 관광 성수기가 이가강정도 바쁠 때다. 한창 때는 한 달에 3,000만 원의 매출을 올린 적도 있다. 한겨울에는 그나마 손님이 적은 편인데, 그래도 한 달에 7~800만 원의 매출을 기록한다.

최근 이영석 씨는 건강이 좋지 않다. 5년 전 희귀병인 근육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고, 요새는 일주일에 세 번 혈액투석을 받아야 한다. 선천적으로 눈이 안 좋아 시각장애 4급이었던 이 씨는 수술 이후 눈이 더 나빠져서 현재는 시각장애 1급인 상태다. 하루 종일 서서 손님들을 상대해야 하는데다, 한편에선 연신 즉석으로 강정을 버무려내는 일이 가끔 버겁기도 하다. 요즘처럼 종일 찬바람을 맞아야 할 때는 더 그렇다.

하지만 이 씨는 즐겁게 일하고 있다.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안민자 씨가 곁에서 돕는 공이 크다. 때론 옥신각신, 때론 주거니 받거니 하며 흥겹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두 사람을 부부로 오해한다. 얼마 전 아침 방송 프로그램에 두 사람이 나란히 출연하면서 전국구로 오해를 사게 됐다. 지면을 통해 둘은 부부가 아님을 꼭 밝혀달라고 강조했다.

방송 프로그램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가강정은 이미 공중파 방송을 여러 차례 탔다. 연예인들이 강정 만들기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은 벌써 몇 년째 해마다 한 번씩은 연락이 오고 있고, 모 방송국에서는 이 씨를 강정 ‘달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방송 출연 이후 유명세 덕으로 매출이 크게 늘어서 한시름 덜었다 싶었는데, 호사다마라는 옛말처럼 병마가 이 씨를 찾아왔다.

위기가 찾아왔을 때 이 씨는 낙담하지 않고 더욱 노력했다고 한다. 소상공인진흥원에서 주관하는 창업인 교육 과정을 등록해서 강의를 들었던 경험은 이 씨에게 아직도 인상 깊다. “항상 배움에 목말랐는데 다양한 부문에서 일가를 이룬 강사들에게 유익한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것 같다”고 이 씨는 밝혔다.

노력만큼 기회도 다시 찾아왔다. 이 씨가 출연했던 방송 프로그램에서 식품부문 ‘달인’으로 선정됐던 이들이 함께 모여 5대 백화점 브랜드의 전국 매장에서 특별 행사를 열었던 것이다. 이 행사에서 이 씨의 표현을 빌자면 대박이 났다.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다시 시작해 보자는 의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모인 달인들은 ‘대달인국’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지역사회나 다문화가정 등을 대상으로 기부와 봉사활동을 진행하기도 하고, 함께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기도 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성공 맛볼 즈음 찾아온 희귀암…다시 시작이다

오랜만에 찾은 인사동거리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통행에 지장을 줄 정도로 북적이던 노점의 수가 확 줄었다. 종로구청과 인사동 일대 노점상인들과의 몇 년에 걸친 힘겨루기 끝에 인사동 사거리를 기점으로 안국동 방향의 위쪽 노점 16곳은 장소를 옮기게 했다.

이가강정의 경우 항상 눈에 익던 자리에서 계속 장사를 하고 있다. 이영석 씨는 “날씨도 날씨지만 경기가 안 좋아서 그런지 주변 다른 노점들도 장사가 영 신통치 않다”고 말했다. 노점상인들의 애환을 얘기하며 분위기가 숙연해지려는 찰나면, “장사 대박 나는 날도 있고 공치는 날도 있고 그런 거 아니겠어”라고 반문하며 껄껄 웃는다.

곁에 있던 안민자 씨 역시 이 씨보다 두 옥타브 쯤 높은 하이톤으로 깔깔대며 거든다. 잠시나마 이들의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다. 본인들 스스로도 ‘즐겁게 일하는 것’이 신조라고 입버릇처럼 다그친다. 다수의 방송출연 경험자답게 이 씨가 마무리멘트를 덧붙였다.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열정이 넘쳐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뭔가를 시작할 때예요. 꿈을 가지고 희망의 끈을 놓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