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無十日紅
權不十五年
花無十日紅
權不十五年
  • 박석모 기자
  • 승인 2012.04.0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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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정치가 중에 왕망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건국한 사람이지요. 전한의 외척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고 합니다.

이 왕망이라는 사람은 그 수완이 대단했었나 봅니다. 고모뻘 되는 왕 씨가 왕후가 된 뒤 왕 씨 일족은 치열하게 권력투쟁을 벌이지만, 왕망은 거기에 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큰아버지뻘 되는 대사마(오늘날로 치면 국방부장관 쯤 됩니다) 왕봉의 병을 극진히 간호함으로써 왕봉의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가지요.

왕망은 백성의 여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찍이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38세의 나이에 대사마에 오르지만 그는 여전히 삼가고 신중했습니다. 아직은 그의 야심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때를 기다리며 그는 백성의 환심을 사는 데 주력했습니다.

황제가 바뀌며 잠시 권좌에서 물러났던 왕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쿠데타를 일으켜 대사마에 복귀합니다. 그때부터 왕망의 본격적인 여론조작이 시작됐습니다.

얼마 후 새 황제가 죽자 ‘왕망은 황제가 되어라’는 글씨가 새겨진 흰 돌과 우물이 나타납니다. 백성들은 왕망을 떠받들지요. 왕망 열풍이 불었다고나 할까요. 실은 그 모든 게 왕망이 백성의 인심을 얻기 위해 꾸민 일이었지요.

왕망이 이렇게 백성의 인심을 모아 서기 8년에 전한을 멸망시키고 새로 나라를 세우니 곧 신나라입니다. 신을 세운 왕망은 정전법을 응용해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가난한 농민에게 싼 이자의 자금을 융자하는 등 개혁정책을 폅니다.

하지만 지방호족의 반발에 부딪혀 개혁은 실패하고, 피폐해진 백성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죠. 결국 왕망은 신나라를 세운 지 15년 만에 부하의 칼에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정치는 나름 개혁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모양입니다만, 역사는 그를 간사하고 음모에 능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 삼가고 신중했던 것도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미지 메이킹’이었고 여론조작이었다는 겁니다.

여론조작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개혁정치를 폈지만, 개인사만 놓고 보면 그는 비참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약 왕망이 백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로 삼가고 자신을 낮추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요?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입니다. 며칠 전 여론조작이 인기 검색어 순위에 오른 적이 있지요. 왕망이 그랬던 것처럼 여론조작을 통해 얻은 인심은 오래가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대중 앞에 나서려는 이들은 꼭 한 번 새겨봤으면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선거를 앞두고 노동자 출신 후보들의 선거운동 모습과 각 당의 노동정책도 소개했습니다.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한 지방은행의 역할에 대한 고민도 담았습니다.

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이번 총선에서는 국민의 목소리를 진실하게 대변할 수 있는 이들이 여의도에 입성했다는 ‘봄소식’을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