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바자회, 아픔과 유쾌함의 절묘한 공존
봄날의 바자회, 아픔과 유쾌함의 절묘한 공존
  • 김현정 기자
  • 승인 2012.04.3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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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자동차 해고자 돕기 바자회 개최
이효리도 익명의 시민도 같은 마음으로
[현장3] Remember Them _ 쌍용차 해고자 후원 바자회

ⓒ 김현정 기자 hjkim@laborplus.co.kr
소비와 이념은 분리되어 있는 걸까? 어떤 기업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접했을 때 지갑을 열기가 꺼려지는 것은 많은 이가 공유하는 경험일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더 나은 환경과 타인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소비자가 되는 경우다. 2012년 4월 8일, 홍대 앞 두리반에서는 기꺼운 사람들의 착한 바자회가 열렸다.

ⓒ 김현정 기자 hjkim@laborplus.co.kr
보통 사람들, 보통 아닌 사람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진열된 물건들의 면면이었다. 가지런히 진열된 책부터 옷가지들, 화장품, 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물건의 품목은 다양했다. 야구선수 사인볼과 줄넘기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물건들도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쌍용자동차 해고자를 돕기 위해 자기 일상의 한 구석을 기꺼이 내놓았다. 여러 사람들이 낡고 해진 물건들을 즐거운 표정으로 집어 들었다. 두리반에 들어온 보통 사람들이 보통 아닌 사람들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신기한 점은 하나 더 있었다. 물건들이 계속 팔려나가도 진열대가 좀처럼 허전해지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보니 안쪽 공간에는 바자회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보내 준 소포가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쌓여있었다. 뿐만 아니라 양 손에 기증품을 들고 직접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이 행사를 ‘보따리 바자회’라고 불러요. 일반 시민 분들이 집에 있던 물건들을 보따리채로 챙겨서 보내주시거든요. 트위터로 소식을 접하신 일반 시민 분들도 그렇고, 두리반 철거 투쟁 때부터 인연을 맺은 아티스트 분들도 여기에 힘을 보태주시고요. 사실 저희가 값을 매기기 어려울 정도로 고가의 물건도 나와 있거든요. 그래서 따로 경매를 진행하는 거고요.”
- 유병주 / 바자회 기획단

유쾌함과 트라우마

펼쳐진 물건들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니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자회에는 물건도 많아야 하지만 사람이 있어야 한다. 친구들과, 가족들과 함께 찾아온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많아져서 오후 2시쯤 되자 바자회 장소가 너무 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듯 작은 관심만 있다면 연대는 쉽다. 엄마 따라 나온 줄로만 알았던 3학년 어린이도 ‘이 바자회’에 대해 똑똑히 말한다. “전에 쌍차 와락 갔었는데요, 거기 아저씨들 돕는 거라고 엄마가 설명해줬어요.” 초등학교 3학년도 이해할 만큼, 연대는 쉽다. 실제로 물건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던 말은 ‘재미있다’와 ‘부담없어 좋다’는 이야기였다.

ⓒ 김현정 기자 hjkim@laborplus.co.kr
“세상에 많은 일들이 있고 돕고 싶은 곳도 많은데 마음만 있지 움직이기는 쉽지 않더라고요. 우리 애가 4살인데 전에 한-미 FTA 반대 집회를 데려간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너무 놀래서 울고 난리가 난거예요. 그러니까 다음부턴 어디 데려가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바자회 같은 경우는 가족 나들이 하는 셈 치고 나올 수도 있고 아이 옷이랑 장난감도 사갈 수 있고 좋네요. 물건들도 괜찮은 게 많고요. 가방 두 개 꽉 채울 만큼 샀는데도 2만원이 안 나왔어요. 이런 행사가 잘 돼서 쌍용자동차 분들도 끝까지 힘내셨으면 좋겠어요.”               
- 한은경 / 경기도 안양

바자회라는 형식은 당의정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노동문제와 연대가 가지는 진지함에 쇼핑의 일상성과 즐거움을 덧씌우면 사람들은 한결 부담을 덜어낸다. 요즘은 그렇다. 무엇을 하더라도 밝고 화사한 것들이 주목받는다. 어둡고 무거운 것들은 쉽게 외면당한다. 설령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쌍용자동차의 대량해고 사태와 그 후에 이어진 끔찍한 죽음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쌍용자동차 문제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이 드러난 지점이다. 동시에 일터의 소멸이 삶의 소멸이 되는 정리해고의 처절함을 보여준 사건이다. 아니,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트라우마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그들을 자꾸 잊어버린다.

ⓒ 김현정 기자 hjkim@laborplus.co.kr
“쌍용차 파업 때 보니까 물이나 의약품 반입도 못하게 하더라고요. 물이라도 먹게 하자는 마음으로 그때 몇 번 갔었는데, 그런 관심이 여기까지 오게 한 것 같아요. 쌍용차 문제는 사실 인권의 문제예요. 쌍용차에 남은 사람과 해고자를 ‘산 자’와 ‘죽은 자’라고 하는데, 지금 이것만 봐도 얼마나 비인간적 문제인지 적나라하게 말해주지 않아요? 사실 평택이란 동네에서, 쌍용자동차라는 일터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다 한 공동체 식구였고 친구였다고요. ‘산 자’와 ‘죽은 자’는 물론이고 심지어 그 때 난리치던 용역 깡패까지 다 어릴 때 친구인거예요.

얼마 전에도 22번째 희생자가 나왔지만 정말 하나하나 너무 슬픈 죽음이잖아요. 시간이 좀 지났지만 해고자 부인이 목을 매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슬퍼서 정말…. 구조조정의 문제, 신자유주의에 희생되는 사람들, 구조의 모순이 있잖아요. 그 해결책을 찾는 게 이런 작은 자리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 같아요.”
- 정영숙 / 경기도 수원

▲ 두리반 ⓒ 김현정 기자 hjkim@laborplus.co.kr
이효리와 파업노동자의 공통점

오후 4시쯤 되자 두리반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길이 한 곳으로 쏠렸다. 가격표 없이 진열됐던 물건들의 경매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트위터를 통해 알려진 내용처럼, 가수 이효리는 디자이너 육심원의 그림이 그려진 가방들과 소방호스로 만든 Elvis&Kreese의 가방 등 많은 물건을 내놨다. 가수 요조도 클래식 카메라를 맡겼다. 첫 번째 경매품으로 등장한 가방은 5천 원에서 시작해 10만 원에 낙찰됐다.

경매 참여자들의 자세는 보통의 소비자와는 달랐다. 사진을 찍지 않는 사람도 카메라를 낙찰 받았고, 10만 원에 낙찰 받은 가방 값으로 15만 원을 치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경매는 즐거웠다. 이 날 경매의 최고가는 25만 원을 기록했다. 디자이너 육심원의 그림이 그려진, 이효리의 기증품은 파업 중인 KBS의 촬영감독에게 돌아갔다.

▲ 이윤정 ⓒ 김현정 기자 hjkim@laborplus.co.kr
“저는 예전 방송사 파업에 참여할 때 평택에도 갔던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오늘도 오게 됐어요. KBS도 파업을 하고 있잖아요. 공감하는 게 생기는 거죠.”
- 이윤정 / 최고가 낙찰자

경매와 일반 판매를 통해 총 300만 원이 넘는 수익금이 모였다. 아끼는 물건을 내어놓고, 좋은 마음으로 선뜻 지갑을 연 사람들 덕분이었다. 낙찰 받은 가격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하고, 거스름돈 몇 천 원은 웃으며 거절한 사람들 덕분이었다.

ⓒ 김현정 기자 hjkim@laborplus.co.kr
Remember Them

“올해는 중요한 투표들이 있어서 의미있는 해지만, 그 때문에 현장이 잊혀지기도 합니다. 3~4년씩 싸운 노동자들에 대해 무관심해지잖아요. 사람들은 오래된 것에 무뎌지니까요. 그래서 오늘 행사에는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이번 바자회에 붙인 ‘Remember them'이라는 제목은 그런 뜻입니다.”
- 고영철 / 바자회 기획단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은 아직도 많다. 바자회가 거듭될수록 기억하고 연대하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늘어날 것이다. 저녁 무렵, 바자회는 마무리 됐지만 ‘다음’에 대한 기대는 한껏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