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 앞둔 대우차 해고자들
복직 앞둔 대우차 해고자들
  • 승인 2006.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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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팔백일 만에 돌아가는 공장,


해고자들의 눈물 바람 속에 싹트는 삶의 바람

 

요즘 GM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는 묘한 설렘과 긴장감이 감돈다. GM대우자동차가 미복직 정리해고자 655명을 3월 말까지 전원 복직시키기로 하면서다. 이로써 2001년 2월 대우차 부평공장에서 ‘쫓겨난’ 1750명의 노동자들은 2002년, 2003년 단계적 복직을 거쳐 드디어 올해, 5년 만에 전원이 다시 일터로 돌아갈 기회를 얻었다. ‘기억조차 떠올리기 싫다’며 스스로 복직을 포기했거나 연락이 되지 않는 130여 명은 빠져 있다.


대량해고 사태 5년 만에 다시 찾은 공장에서 그날의 상처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조립 사거리에 걸려 있는 ‘정리해고 5주년 규탄집회’ 플래카드만이 5년 전의 기억을 더듬고 있을 뿐. 해고자와 그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공장 정문 앞 도로도, 매일같이 연행자들이 넘쳐나던 남문 옆 부평경찰서도, 시위대와 경찰들의 고함, 정찰 헬기의 굉음으로 흔들렸던 공장 담벼락도 매서운 겨울 추위를 비켜나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이제는 마침표를 찍은 것일까. 시간을 돌려 모두가 제 자리로 돌아가면 그 상처도 다 아물게 되는 것일까.


복직의 부푼 마음을 안고 삼삼오오 공장으로 모여드는 사람들, 그들의 눈빛은 분명 설레 보였다. 하지만 떨리는 말소리며 눈빛에서 배어나오는 것은 기쁨만은 아니었다. 소주 한두  잔에도 붉어지는 눈시울에는 만 5년 동안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며 입은 상처와 가슴 속 깊이 묻어 뒀던 절망이 ‘뚝뚝’ 묻어났다.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 정리해고 통지서를 받던 2001년 2월 16일과 그보다 처절했던 5년간의 ‘삶의 전장’ 이야기를 들어봤다.


해고, 그리고 길 위의 나날들
“공.장.으.로.돌.아.가.자”

2000년 11월, 대우자동차가 최종 부도 처리되고 노사가 인력감축 방안에 대한 합의점을 못 찾은 채로 2001년을 맞았다. 현장은 새해 벽두부터 정리해고에 대한 소문으로 술렁였다.  2월에 접어들면서 불안함에 떨던 노동자들은 귀가도 하지 못하고 몇 일째 공장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2월 16일. 공장은 돌아가고 있었지만 일이 손에 잡히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12차 경영혁신위원회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노조와의 합의가 최종적으로 결렬되면서 회사는 “17시 부로 1750명 정리해고 대상자에게 해고통지서를 보내겠다”고 발표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해고자 선정 기준도, 이후 계획도 알 수 없이 사람들은 ‘나만은 아니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부터 해고 대상자들의 집에 등기우편이 속속 도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내나 아파트 경비실의 전화로 해고 소식을 들었다. 도장2부 강지웅(41·가명)씨도 그 중 하나.


“아직도 해마다 2월이 되면 가슴 한쪽이 답답하고 ‘쿵’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멀쩡하다가도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는 게 평생 지고 가야할 마음의 병이 됐나 봅니다.”


강씨는 불안함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회사에서 밤을 새운 다음날 아침 아내의 전화로 해고 사실을 알았다.
“여보, 등기가 왔는데, 당신…, 짤렸어….”
“그 전화를 받고 탈의실 바닥에 털썩 주저 않았습니다, 식당이고 탈의실이고 집에서 걸려온 핸드폰을 받고 눈이 풀린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렇게 하루 만에 1750명 모두가 해고 통지서를 받아들었다.


해고자들의 ‘저항’은 해를 넘겨 계속됐다. 부평공장 일대는 연일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로 아수라장이 됐고, 아이를 들쳐 업은 아내들의 울음과 피 흘리며 거리를 뒹구는 해고자들의 모습은 외신에도 톱기사로 올라오곤 했다.
그러기를 1년, 처음엔 ‘공장’ 안에서 밀려난 그들은 공장 ‘근처’에서도 밀려나 공장 근처 ‘성당’에 둥지를 틀었고, 2002년 2월 ‘투쟁 지도부’가 경찰에 자진 출두하면서 1년간의 ‘거리생활’은 막을 내렸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진 해고자들은 살기 위해 다시 ‘거리’에서 긴 싸움을 시작한다.


살기 위해 다시 길 위로
“컨베어만 탔던 십몇 년 세월이 한스럽습디다”

온전히 개개인에게 맡겨진 살기 위한 ‘싸움’은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함께일 때보다 훨씬 힘들었다. 당시 부평공장 노동자들의 평균연령은 38세, 평균 근속은 13년차였다.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동차 공장 노동자로 살아온 그들에게 세상은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해고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몸뚱아리’를 밑천 삼아 막일을 시작한 사람들과 퇴직금을 굴려서 살길을 찾아보겠다고 한 사람들. 결론적으로 두 부류가 다 성공하지 못했다.


“컨베어만 탔던 십몇 년 세월이 한스럽습디다.” 소주 몇 잔에 얼굴이 불콰해진 이진국(46·가명)씨가 말문을 연다. 조립 2부에 근무하다 해고된 그는 일자리를 찾아 남동 공단 일대를 돌아다녀 봤지만 마땅한 기술이 없어 번번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이미 장사다 뭐다 퇴직금 털어 넣었다가 망한 형님들을 여럿 봤기 때문에 퇴직금을 굴려볼 배짱도 없었어요. 결국 한 1년 퇴직금만 까먹다가 인력시장에 나갔어요. 진짜 거기 말고는 갈 데가 없더라구”


연신 담배만 피우던 고일권(36·가명)씨가 말을 거든다. 다른 해고자에 비해 젊은 편이었던 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남들은 젊은 놈이 뭘 못해 먹냐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어요. 6년 동안 공장에서 볼트 조이는 일만 했습니다. 막상 세상에 던져지니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병신같은 놈’이라고 가슴을 치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이날 만난 복직 대기자들은 하나같이 다른 아픔을 가지고 있었지만 생계를 위해 거쳐 온 길 만은 이상하리만큼 똑같았다. 공사장 막일, 인력시장, 대리운전, 택시기사, 외판원, 노점상,…. 단순 반복 노동으로 흘려보낸 젊음이 그들에게 남긴 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못난 자신의 모습이었다.


엔진 1부에 근무했던 김영섭(38·가명)씨는 “비싼 수업료 내고 세상공부 했다”며 복직이 되면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더 관심을 갖고 새로운 기술도 하나 배워볼 생각이라고 말한다.


정글 같던 세상, 마지막 버팀목마저
“복직됐지만 이제 함께 기뻐할 가족이 없다”

퇴직금을 털어 살 길을 열어보려고 했던 사람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사업을 시작한 사람들은 비교적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막일’을 하기에는 몸이 따라주지 않았고 일당 3만원의 대리운전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중·고등학생 자녀들이 있는 40~50대의 가장들.


하지만 이들의 사정은 맨몸으로 공사판에 뛰어든 젊은 축들보다 더 어려웠다. 퇴직금 2700만원을 털어 김밥집을 시작한 안종영(46·가명)씨는 3년 만에 빚만 떠안고 가게를 정리했다. “먹는 장사니까 그래도 남는다 싶어 시작했죠. 물건 떼는 일부터 손님 모으는 일까지, 하다못해 장부정리까지, 할 줄 아는 게 있나. 그래도 시작한 거 어떻게 해 보겠다고 집 담보 잡혀서 빚내고 나중엔 친척들한테 손까지 벌렸어요.”


복직을 앞둔 지금 안 씨의 빚은 7천만원 정도. “복직이 되면 무조건 빚부터 갚고 그 다음에 전셋집이라도 얻을 것”이라는 다짐으로 애써 아픔을 털어낸다.
작은 구멍가게라도 해보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그렇게 빚더미에 앉았다. 처음엔 구멍가게나마 점포가 있었고, 그 다음엔 노점상으로, 그리고 마지막엔 이들도 인력시장으로 모여들었다.


오로지 공장 안 세상밖에 몰랐던 해고자들은 쉽게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이들의 퇴직금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좋은 뜻으로 ‘투자’를 권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를 한 경우도 있었다. 해고 당시 도장 1부에 근무했던 장충호(58·가명)씨는 친구의 권유로 퇴직금 8천만원을 ‘다단계’에 털어 넣었다가 1년 만에 돈을 모두 날렸다. 친구는 연락이 끊겼고 아내는 집을 나갔다. 장성한 자식들과는 연락을 안 한 지가 이미 오래다.


복직 통지를 받고 누구에게 가장 먼저 전화했냐는 질문에 입만 오물거리던 장 씨는 힘겹게 “마누라가 집을 나가서 없어요, 얼마 전까지 공원에서 잤어요”라는 말을 토해내고는 고개를 떨군다. 더 이상은 아무 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 그 세월의 상처를 어떻게 몇 마디 말로 풀어낼 수 있을까.


해고자 중 장 씨처럼 재산을 다 날리고 결국에 가정까지 파탄난 사람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대우차 정리해고 원상회복 투쟁 동지회’ 집계에 따르면 해고자의 30% 가량이 이혼을 하거나 별거 중이다. 결혼한 지 3일 만에 해고된 한 노동자는 해고 한 달 만에 이혼을 ‘당하기도’ 했다.


일터에서 쫓겨나고, 세상에 속고, 마지막 버팀목이던 가족마저 떠나간 자리에는 ‘분노’와 ‘적개심’이 싹텄다.


상처 난 자리에 돋은 분노
“썩은 과일만 골라 담는데 그게 꼭 우리 처지 같아서…”

“길을 지나다가 대우차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만 보면 입에서 욕이 튀어 나왔어요. 그 사람들 때문이 아닌데, 아닌 줄 알면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지.”


차체 2부에 근무하던 강동화(43·가명)씨는 “그 때는 아무나 한 명 걸리기만 하면 패주려고 벼를 만큼 회사와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안고 살았다”고 말한다. 중소기업에라도 취직하려고 원서를 들이밀 때마다 “대우차 해고자는 안 쓴다”는 대답만 들었던 그는 “눈높이를 좀 낮춰 취직하라”고 충고하는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단다.


“대우차에서 해고됐다는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준 범죄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세상이 날 왜 이렇게 내치나, 이제는 뭐든지 의심하는 버릇이 생겨서 어떻게 사회생활을 잘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유일하게 ‘동병상련’이 되어 준 사람들은 같은 처지의 동료들이었다. 사업을 하던 형의 도움으로 자동차 광택 대리점을 운영하던 김준수(48·가명)씨는 길에서 만나는 ‘노점상’ 동료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가게 문 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같이 라인 타던 놈이 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과일 리어카 앞에 앉아 있어요.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면 점심 때 분식집에서 천오백원짜리 라면 먹은 게 전부래. 분통이 터져서 참…, 검은 봉지에 과일을 골라 담았죠. 썩은 과일로만 고르고 값은 제대로 치렀어요. 내가 안 사면 다 갖다 버려야 할 거 아닙니까. 무르고 터진 과일만 골라 담는데 그게 꼭 우리 모습인 거 같아서…. 집사람은 남 속도 모르고 형편도 안 좋은데 어디서 맨날 썩은 과일만 사들고 온다고 성화죠. 그 때 내 속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지난 2002년에 복직한 엔진 2부의 정진우(48·가명)씨는 “처음엔 회사가 원망스러웠고, 다음엔 사회가 미웠고, 나중엔 그 누구랄 것도 없이 모든 일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며 한 동료의 사연을 꺼내 놓는다.


“6개월 만에 마누라가 도망가고 그나마 월세 집에도 살 수가 없어서 초등학생 딸내미를 데리고 놀이터에서 노숙을 했더래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애가 애들이 냄새나니까 가까이 오지 말라고 밀쳤다며 엉엉 우는데…, 그 때 그 애비 심정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었겠어요. 나도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입에 달고 다녔지만 어떤 말로도 그 심정은 표현 못하지.”


어린 딸아이를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모래바닥에 앉아 울던 그이는 그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후 정 씨는 예전엔 없던 술버릇이 생겨났다. 술을 먹으면 늘 누군가와 싸움을 하거나 물건을 부수는 ‘주사’가 생긴 것.


굳은살도 그냥 두면 내 살이 된다고 했던가. 그 때 사람들이 품었던 세상에 대한 분노는 떼어낼 수 없는 굳은살이 되어 그렇게 깊이 박혀 있었다.


‘삶의 전장’ 속에서도 돌아갈 날을 꿈꾸다
“옷장 속에 걸어둔 작업복은 차마 못 버렸어요”

그런 분노 속에서 해고자들은 묻고 또 물었다. ‘왜 나여야 했는지, 하필이면 왜 나인지’ 애시당초 해고의 기준 같은 것은 공개되지 않았다. 노조활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도 있었고, 노조 근처에 안 가본 사람도 있었다. 평직원도 있었고 기사원, 조반장들도 있었다.


도장 1부 반장이었던 임정렬(56·가명)씨는 “내 딴에는 회사에 충성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신차가 나올 때마다 떨어지는 판매 할당량도 친척들 동원해서 다 채우고, 그것도 안 되면 내차에 마누라 차까지 바꿨다. 그런 나더러 마누라는 ‘병신’이라고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왜 해고 됐는지만은 알고 싶다”며 분을 감추지 않았다.


‘에스페로’를 타다가 신차 출시 후 ‘레간자’로 차를 바꾼 지 한 달 만에 해고된 임 씨는 퇴직금에서 남은 차 할부 값을 차압당했다고 한다. 그렇게 모진 회사였지만 그는 아직도 작업복을 버리지 못했다. GM에 인수된 후 예전의 회색 작업복이 베이지색 작업복으로 바뀌어 이제 복직이 돼도 입지 못하는데도 그의 옷장에는 깨끗하게 손질된 작업복이 걸려 있다.


“마누라는 볼 때마다 속 터진다며 갖다 버리라고 해도 도저히 못 버리겠더라구. 여기 들어와서 결혼도 하고 아이 셋을 키웠소. 내 인생 절반이 담긴 옷인데 그걸 어떻게 버려….”


미워하고 미워했지만 끝내 ‘내 일터’에 대한 미련마저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차체 2부에서 일했던 고정수(37·가명)씨는 해고당하고 1년 만에 공장 앞 아파트를 팔고 인천 외곽으로 이사했다. 어차피 집을 팔아 전셋집으로 옮겨야할 상황이었지만 근처가 아닌 외곽을 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때 아들내미가 여섯 살이었는데 공장 앞을 지나갈 때마다 ‘아빠 회사’라고 손짓을 하는 거예요. 그럴 때마다 아내는 내 눈치 보느라 안절부절 하고, 그걸 보고 있자니 내가 못 견디겠어서 멀리에 집을 얻었죠.”


‘대우차 해고자’라는 시선이 싫어 아예 인천을 뜬 사람도 있다. 홧김에 대우차는 사지 말라고 ‘선전’을 하고 다닌 기억도, 버스가 공장 옆을 지날 때면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써 고개를 돌리던 기억도 있다.
그 기억들이 어찌 ‘미움’이기만 할까. 미움보다 몇 배는 더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5년 전처럼 갑작스레 ‘복직’ 소식이 날아들었다.


다시 찾은 일터, 새로 쓰는 희망
“복직하면 현장의 상처를 아무리고 나오고 싶다”

그리고 그 소식에 사람들은 이제 조심스럽게 상처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린다.
무엇보다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을 갚아줄 생각에 들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립 2부에 근무했던 이사용(38·가명)씨는 “복직이 되면 부모님을 가장 먼저 찾아뵙겠다”고 말한다. “아들이 해고된 걸 알고도 한 번도 걱정을 내비치지 않고 속으로만 삭이던 부모님, 그 마음을 지켜드리기 위해 부모님 앞에서만은 ‘어금니를 물어가며’ 웃었지만 이제는 숯덩이 가슴에 안겨 그간 참았던 눈물을 모두 쏟아내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과 고생을 견뎌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도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그때 우리 큰 녀석이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됐는데 그걸 못 보냈어요. 그 다음해에 작은 애가 태어났는데, 분유 값이 없다는 말을 내 현실로 느낄 줄 몰랐죠. 그 고생 다 견뎌준 아내, 이제 절대로 고생 안 시킬 겁니다.”


다시 노동자로 떳떳하게 세상을 마주하고 싶은 꿈도 있다. 엔진 2부에 근무했던 이세동(52·가명)씨. “아빠가 뭘 잘못해서 해고 됐냐고 묻는 아들한테 아무 대답도 못해줬어요. 친척들도 뭔가 모자라 해고된 게 아닌가 이상하게 쳐다보고, 이제 말할 수 있겠지요. 아빠가 나쁜 사람이라서 짤린 게 아니라고. 나는 그거 하나면 족합니다.”


해고 후 받은 스트레스와 충격으로 심장질환이 생겼다는 이 씨는 “복직이 돼도 정년까지 일할 수 없겠지만, 나는 이걸로 명예회복이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기 가슴도 만신창이가 됐지만 그보다 더 많은 상처를 입었을 현장을 어루만지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상처. 쫓겨난 사람들과 남은 사람들 사이, 선 복직자와 후 복직자 사이, 경영진과 노동자 사이, 5년 동안 켜켜이 쌓여왔던 불신과 분노는 공장을 감싼 ‘불안한 기운’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도장 1부에 근무했던 유성광(58·가명)씨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공장에서 ‘데모’가 터졌을 때 앞장서서 이를 막아섰던 조장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해고의 칼날은 예외가 아니었고 그 때문에 회사에 대한 배신감은 더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미움을 다 털어내고 싶다고 했다.


“관리자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편’에 서야 할 때도 있었어요. 내가 짤렸을 때, 잘됐다고 박수친 사람도 있었을 거고, 그 형님 나한테 참 잘해줬는데 안됐다고 한 사람도 있었겠지. 이제는 그런 게 다 소용없다 생각이 들어요.”


복직하고 나서 꼭 하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에 유 씨는 “상처를 아무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나를 따랐던 후배도, 나를 미워했던 후배도, 노조 사람들도, 관리자들도, 다 상처가 있을 겁니다. 이제 복직해도 정년까지 2년이에요.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들 마음속에 담은 앙금을 다 씻어주고 나오고 싶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요.”


유 씨의 바람처럼 사람들은 그 상처를 다 씻어낼 수 있을까. 아직은 저녁 바람이 매서운 2월, 정리해고 사태가 있은 지 꼭 5년 만에 찾은 공장에서 만난 건 장밋빛 희망도 흙빛 절망도 아니었다.


저마다의 희망을 품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는 그들은 도장 2부의 한 노동자가 쓴 시처럼 ‘다시는 슬픈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 위해, 옛날보다 조금은 더 똑똑해지고, 옛날보다 더 눈이 트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슬픈 기억의 채찍질


도장 2부 양희동

 

며칠 전 정리해고로 헤어졌던 옛 동료를
5년 만에 회사식당에 보았다
만나며 반가움에 앞서 울컥 치미는 속울음은
왠지 눈물마저 머금게 해 목젖 안에 메인다
우리는 천 팔백일을 지나고도 그렇게 아직
마주 대하든 먼발치서 보든 그렇게 아직
잊혀지지 않는 슬픈 기억선상의 존재였구나

한날 한시에 벼락 같은 슬픔을 맞고
엄마 손을 놓친 겁먹은 아이처럼
불황의 세상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뒤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과 싸워 온 우린
수번의 선별 복직으로 또 가슴 졸이면서
이제야 전장의 전우처럼 옛 삶터에 모였구나

친구들아 우리 말이지
이제 옛날보다 조금만 더 똑똑해 졌으면 좋겠다
우리 옛날보다 조금만 더 눈이 트였으면 좋겠고
옛날보다 조금만 더 깨어있고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다시 만나 부르는 희망의 노래에 취해
아팠던 기억의 이유들을 매장하지 말아야지
그래서 친구들아 우리 말이지
다시는 비운의 다큐멘타리 주인공이 되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