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두두, 질주하는 말의 무한책임자
두두두, 질주하는 말의 무한책임자
  • 김주도 기자
  • 승인 2012.05.31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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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마에 뽀뽀하고, 자식 다루듯 엉덩이도 토닥
채이고 떨어지고, 여기는 산재율 전국 1위
[삶의 현장] 조교사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반인반마의 켄타우로스 열넷이 출발선에 섰다. 곧 전쟁을 치를 참이다. 전쟁터 저편에는 구경을 나온 관중들이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마라 그들은 누구보다 빠르니까.

출발을 알리는 신호와 동시에 열넷의 켄타우로스는 매캐한 흙먼지로 구름을 만들며 돌격했다. 칭기즈칸의 기병대가 이런 기세였을까. 매서운 패기는 땅과 하늘을 울렸다. 낙오자와 승리자가 가려지며 관중석은 흥분으로 젖어든다. 절정에 다다른 순간 켄타우로스가 목적지를 지나가며 쾌감후의 정적을 가져온다. 전쟁은 단 1분이면 충분했다.

2012년 5월 12일 새벽, 과천 경마공원을 간다.


알람소리에 일어나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30분, 졸음이 자꾸 쏟아졌지만 서둘러야 했다. 매일 새벽부터 일과를 시작하는 조교사들을 만나려면 어쩔 수 없다. 힘겹게 일어나 과천경마공원에 도착하니 새벽 5시.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았다. 새벽 닭 울음소리마냥 멀리서 말 울음소리와 말 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자동차 경주에서 차의 관리가 중요한 것처럼 경마에서의 말 또한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어쩌면 살아있는 동물이기에 그보다 더한 정성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조교사는 말의 건강관리, 훈련 계획 등 제반사항을 총괄하며 경주전략을 세우는 등 경마에서 우승하기 위한 전략을 구상하고 지휘한다. 축구, 야구 등 타 운동종목의 감독과 같은 역할이다.

AM 5:00, 지금은 말과 ‘말’할 때

조교사 하재흥(58)씨의 하루일과는 새벽 5시부터 시작된다. 이른 새벽부터 일과가 시작되는 만큼 가족들과 얼굴을 마주하기도 쉽지 않다. 밤 아홉시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출근 할 수 있다고 한다. 아들은 가끔 얼굴 볼 때 마다 “안녕하세요”라며 인사 겸 농을 친단다.

출근하자마자 말들이 있는 마방을 찾는다. 하 조교사가 관리하는 말은 총 35두. 한 마리 한 마리 살펴보며 간밤에 별고 없었는지, 건강 상태를 먼저 확인한다. 가장 눈여겨보는 곳은 다리다. 경주마는 스피드가 곧 생명이기에 다리의 부상과 질병은 ‘선수생명’에 치명적이다. 경주는 물론 훈련 중에도 부상의 위험은 늘 존재한다. 비나 눈이 오는 날은 바닥이 젖어 미끄러우니 조교사도 신경이 더 쓰일 수밖에 없다. 평소보다 근육과 인대에 무리가 가 부상도 잦다고 한다.

하 조교사가 말을 살펴보더니 몇 번 씩이나 뽀뽀를 한다. 자식 자랑하듯 엉덩이도 툭툭 친다. 한 마리 한 마리 이름을 알려주며 “우승을 많이 한 말”, “우리 집에서 제일 잘 뛰는 말”, “미국에서 사온 말”이라는 소개도 덧붙인다.

마방을 둘러본 후에는 말 훈련 상태를 점검한다. 말이 달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동물이라지만 숱한 경쟁을 뚫고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수다. 더욱이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즉 경마에 뛸 훈련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로운 말들에게 훈련은 경주마로 태어나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 새벽 5시, 출근과 동시에 하재흥 조교사는 말의 다리부터 살폈다. 다리는 경주마의 생명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산재발생률 20배… 훈련은 긴장의 연속

경주마가 경주에 나가기 위해서는 보통 보름이상 훈련이 필요하다. 말에 따라서는 그 이상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운동선수가 경기를 앞두고 몸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경주에 나갈 말을 결정하는 것은 조교사의 몫이고 훈련 일정 또한 이에 맞춰 결정된다. 아주 건강한 말의 경우 월평균 0.9회 즉, 1년에 10번에서 11번 정도 레이스를 갖는다. 특히 ‘대상경주’라 하는 큰 경기에는 아무 말이나 뛸 수 없다. 말의 연령은 3세로 한정되며, 암말과 수말만 뛸 수 있고 거세마는 뛸 수 없다. 큰 경기인 만큼 스태미나 사료를 먹이는 등 특별히 관리한다.

경주에서 말과 호흡을 맞출 기수를 선정하는 것도 조교사의 몫이다. 보통은 마주와 상의해 조교사가 선정하는데, 해당 말을 훈련시킨 기수를 태우는 것이 좋다고 한다. 말의 성질을 알고 훈련 상태도 알고 있으니 경주에서 잘 뛸 수 있기 때문이다.

훈련하러 오가는 말을 보니 각각 얼굴에 가면을 썼다. 자세히 보니 가면은 말의 귀 까지 덮고 있다. 하 조교사는 말이 큰 체격에 비해 겁이 많고 예민한 동물이기 때문에 돌발 상황을 우려한 조치라고 했다. 성격이 산만한 말들은 눈에 둥그런 가리개를 씌우기도 한다. 기계가 아닌 동물이기 때문에 각각의 버릇, 성격도 제각각이고 이를 고려한 조치가 필요하다.

훈련에 있어 조교사는 각 말의 훈련 프로그램과 일정을 짜는 등 총괄을 맡는다. 실제 훈련은 조교사의 승인을 받은 마필관리사, 기수, 조교보가 수행하지만 훈련이 시작되면 조교사의 눈도 바빠진다. 훈련 상황을 점검하고 여기저기 지시를 내린다. 행여 훈련하다 사고가 발생하지는 않을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말의 체구는 TV에서 보던 것보다 갑절은 크게 느껴졌다. 사람 상체만한 머리, 터질 듯한 근육위로 튀어나온 핏줄에 공포를 느꼈다. 경주마의 평균 체중은 430~450kg, 하 조교사가 보유한 말 중에서는 525kg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다. ‘말에 채이면 죽는다’는 말이 실감났다.

“말은 절대 나쁜 마음으로 사람을 해치지 않지만, 위협을 느꼈다 싶으면 가차 없이 발이 나가. 제대로 맞으면 죽어. 여기 기수나 관리사들도 죽은 사람 많아. 말한테 채여서 죽고 떨어져서 죽고, 여기 산재율이 전국 1위야. 엄청나.”

지난 2011년 8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산업재해 다발 등 공표 대상 사업장 명단’에는 서울경마장 조교사협회가 13.29%로 산재율 전국 1위를 기록했다. 2011년 평균 산재율은 0.65%였다. 이날도 트랙에서 훈련 중인 다른 조교사의 말에서 기수가 낙마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다행히 말도 사람도 무사했지만 한동안 말이 이곳저곳 휘젓는 바람에 잠시 소란이 벌어졌다. 트랙 근처에 응급 구조사가 항시 대기하고 있던 이유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말 못하는 말이 야속하다

경주 작전은 경주마와 상대마의 주행 습성 등을 고려해 짜인다. 그러나 생각한 대로 경주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말의 상태는 시시각각 다르고 말마다 능력의 편차도 크기에 기수가 작전을 잘 이행하고 말을 잘 타도 1등을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경주마의 기량은 혈통에 의해 많은 부분이 좌우된다. 하 조교사는 경마를 ‘블러드(blood) 스포츠’라며 경주마의 체격이나 신체적인 능력도 중요하지만 말의 성품이나 형제마들의 경주 성적 등도 중요한 요소라고 덧붙였다.

1993년 개인마주제가 시행되며 경주마는 개인의 소유가 됐다. 이제 조교사는 개인 마주에게서 말을 위탁 받아 관리하는 입장이다. 종전에는 한국마사회에서 말을 소유했기 때문에 조교사에게 재량과 권한이 많이 부여됐으나 현재는 마주 개개인과의 소통이 중요하다. 그만큼 권한은 줄고 책임은 늘었다.

현재 말 한 마리의 몸값은 평균 3,500만원에서 5,000만원. 하 조교사의 말 중에는 7,000만원에 달하는 녀석도 있다. 심지어 1억 6,000만원을 기록한 말도 있단다. 마주의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다.

취재 중에도 마주에게서 말의 상태를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자식을 맡겨놓고 찾아뵙지도 못해 죄송하다”는 인사가 핸드폰 너머 들려왔다. 하 조교사는 인터뷰 내내 ‘책임’을 강조했다.

“조교사는 마필관리사, 기수도 총괄해야 하고 말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모든 책임을 짊어져요. 그만큼 신경 쓸 게 많고, 곤란한 일이 많아. 말이 이상이 있으면 마주가 가만있겠어? 조교사는 무한책임이야 무한책임.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말도 못해. 나중에 죽어서 가슴을 열면 속이 새카맣게 타있을 걸?”

말이 말이나 하면 한결 수월할 텐데, 그렇지 못하니 답답하다.

“말이 말이라도 할 줄 알면 어디가 아픈지 알거 아냐. 근데 말을 못하니 경험을 통해 추측하는 거지. 그리고 경주 결과에 대한 책임도 조교사가 다 지는 거야. 마주들이 기수한테 뭐라 그러겠어? 조교사한테 뭐라 그러지.”

비록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살아있는 동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관리하는 것은 장비나 기구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하 조교사는 말을 길들이는데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친화력을 기르고 신뢰감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말에게 ‘나는 너를 해치지 않는다’는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 하재흥 조교사는 말을 가리켜 “조물주가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라며 예찬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마구간에 불 지르고 트랙에 뛰어들던 시절

과거에는 경마를 스포츠가 아닌 도박으로 취급하는 팬들과 외부의 시선이 있었다. 경마에 대한 ‘삐뚤어진 집착’은 돌발 사고를 낳기도 했다.

“옛날에는 경마 팬들이 마구간에 와서 불도 지르고 그랬던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놈을 잡아가지고 뒈지게 패버렸지(웃음). 그런 나쁜 새끼들이 있었어. 돈이라면 별짓을 다해. 트랙에 쳐들어간 사람도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하 조교사는 세월이 지나면서 경마를 관전하는 팬 문화도 성숙됐고 스포츠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라고 평가했다. 경마 문화의 발전은 결국 경마 주체와 팬 문화의 발전이 함께 이루어져야만 가능하다.

“경마가 도박이냐 스포츠냐, 이건 이 안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팬들이 어떤 마음을 갖고 경마를 접하느냐에 달린 겁니다. 일확천금이나 노리고 베팅을 일삼으면 도박이지만, 경주의 박진감을 즐기면서 가볍게 베팅한다면 스포츠가 될 수 있죠. 여기 근무하는 사람들은 부정을 일삼거나 그러지 않아요. 경마가 부정의 도가니라면 존재가치가 있겠어?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없애야지.”

팬 문화도 중요하지만 경마가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스포츠인 만큼, 기수와 조교사도 ‘공인으로서의 마음가짐’과 인성을 갖춰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공정한 경마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경마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조교사의 숙소는 외부인이 함부로 출입 할 수 없다. 조교사의 가족은 베팅하는 것 자체가 금지된다. 말에 대한 도핑테스트도 이루어진다. 도핑테스트에는 혈중 10억분의 1 농도의 약물까지 검출 할 수 있는 첨단 장비가 동원된다.

▲ 말의 편자를 점검하는 하재흥 조교사(좌). 말 발굽에 편자를 붙여주는 것을 장제라고 한다. 장제관리 또한 조교사가 총괄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그 한 번을 위해” 조교사는 오늘도 운다

조교사는 마사회에서 기본급을 받지만 큰 액수는 아니라고 한다. 결국 우승 상금에서 조교사 몫으로 나눠지는 지분이 가장 큰 수입원이다. 상금은 1등부터 5등까지 주어지며 말의 누적 성적에 따라 6군부터 1군까지 급수가 정해져 있다. 급수가 올라갈 때 마다 상금액은 커져 결국 성적과 급수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조교사의 수입도 그에 따라 좌우된다.

경마에서의 우승확률은 많이 잡아야 10%. 그 10%의 승률을 위해 조교사는 10번의 승부 중 9번의 패배를 감내하고 온 신경을 말에 쏟는다.

“승률이 보통 10%인데, 그럼 경주를 10번 했을 때 9번은 우는 거예요. 한 번 이김으로써 꿀 한 방울 한 방울 받아먹고 9번의 고통을 이겨내는 거죠. 그 한 번을 위해서.”

화요일이 유일하게 쉬는 날이지만 늦잠은 버린 지 오래. 하 조교사는 ‘쉬는 날에 늦잠 좀 주무시냐’는 물음에 “죽으면 평생 쉴 텐데 뭘 그렇게 쉬어”라며 웃어넘긴다.

마방에 수십 마리의 ‘자식’을 두고 왔으니 자리에 누워도 온통 말 생각뿐이다. 차라리 출근해서 말을 둘러보는 게 쉬는데도 마음이 편하다. 어차피 집에서 자다가도 말이 상태가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으면 바로 뛰쳐나가야 한다.

아무리 얘기를 들어도 조교사라는 직업은 장점이 없다. 취재 내내 온통 ‘책임’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만큼 ‘우승’이라는 단어도 회자됐다. 조교사에게 우승은 그 모든 책임과 고난이 보상받는 결실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럼 대체 조교사는 좋은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하 조교사와 후배 조교사 A씨는 ‘우승의 보람’을 꼽았다. A씨는 “신경 쓸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재미없으면 못한다”는 말을 곁들인다.

새벽 5시에 시작한 오전 일과가 아침 9시가 돼서야 끝났다. 훈련을 마친 말들은 목욕을 하고 온수 찜질을 받기도 한다. 오후에는 경주가 끝난 후 아침에 했던 훈련이 반복된다. 뒤늦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조교사는 그제야 잠시의 여유를 찾는다.

긴장이 풀리니 새벽부터 앓던 졸음이 몰려왔다. 차에서 한 숨 눈 붙이고 나니 오전 11시, 시끄러운 소리에 트랙에 나갔다. 오늘의 첫 경주가 시작됐다. 이른 시간이지만 관중석은 반 이상 들어찼다. 경주가 시작되니 말발굽 소리가 ‘두두두’ 울린다. 1분 남짓 됐을까, 결승점에 가까워질수록 잠잠하던 관중석이 흥분으로 채워진다. 그 1분을 위해 조교사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 경기 시작 직전의 모습. 말들이 출발하기 전 들어가는 위와 같은 곳을 ‘발주대’라고 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 트랙에서 훈련중인 말들. 말 안장의 재킹 색깔은 각각 말의 스케쥴을 의미한다. 노란색은 이번 주에 뛸 말, 빨간색은 다음주에 뛸 말, 파란색은 대상 경주에 나갈 말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 훈련을 마치고 복귀중인 사람과 말들. 노란모자는 기수, 파란모자는 마필관리사다. 안전을 위해 보호 조끼를 착용하고 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 훈련중인 말을 지켜보는 하재흥 조교사(좌). 말 안장의 검은색 재킹은 아직 경주에 나갈 훈련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로운 말임을 뜻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 기수(왼쪽)와 말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하재흥 조교사. 말의 컨디션은 경주 결과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