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지 않더라”
“현실은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지 않더라”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2.07.04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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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직이 없어도 베스킨라빈스 공장이 돌아가는 이유는?
노조, 직고용 요구에 원청도 하청도 “대책 없다”
[현장 2] 서희산업노조 파업

“비알코리아가 직접고용하기로 합의한 다음날, 아침에 출근을 했는데 주변 직원들의 표정이 다들 어두운 거예요. 좁은 직장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인사치레로라도 고생했다는 말 한 마디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차별이 계속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청업체 직원들이랑 하루아침에 ‘동급’이 돼 버렸으니 기분 나쁘다는 거죠.”

파업 21일차를 맞은 서희산업노조의 조합원 정 모 씨는 농성 천막 곁으로 아침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을 보며 씁쓸하게 털어 놓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7년 베테랑 직원 정 모 씨에게 일에 대해서 물어보던 이들이 이젠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며.

ⓒ 박종훈 기자 jhpark@laborplus.co.kr
하청 직원과 ‘동급’은 싫다

충북 음성군의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다보면, 공장 외벽의 낯익은 로고가 눈에 띈다. 분홍색과 파랑색이 어우러진 달콤해 보이는 알파벳 ‘BR’이 새겨진 이곳은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공장이다. 십 수 년 전만해도 여기서 일하던 직원들은 모두 정규직이었다. 그러나 지난 2001년부터 생산 공정이 전면 외주화 됐고, 이들 대부분은 비알코리아(주)의 직원이었다가 국제산업(주)의 직원으로 다시 서희산업(주)의 직원으로 바뀌었다.

“회사에 변화가 생기니 분위기가 두런두런했어요. 계속 여기서 일할 수 있을까, 정리해고 당하는 거 아니냐 하고요. 그때 공장 생산관리를 맡고 있던 과장이 ‘날 믿고 가 달라. 지금 일하면서 받는 대우를 꼭 지켜주겠다’ 라는 거예요. 사실 원청이니 하청이니 하는 개념도 잘 몰랐고, 우린 베스킨라빈스라는 이름을 믿고 지낸 거예요. 근방의 다른 회사들보다 대우도 좋았고.”

올해 쉰 살인 여성 조합원 김 모 씨는 말한다. 이강윤 서희산업노조 위원장은 여기에 덧붙여 설명한다. 당시 사측은 “중소기업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이름만 별개 법인을 설립하는 것이며 임금이나 여타 복지는 그대로 갈 것”이라고 했다. 외주화를 걱정하는 직원들은 개별적으로 불러 면담을 하기도 했다.

브랜드 이미지 때문에 매출은 매년 쑥쑥 자랐다. 국내 시장에 처음 선 보였을 때는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 때문에 ‘아이스크림에 금가루를 뿌렸냐’고 비아냥거리던 사람들도 유행의 흐름에 따라, 입맛의 변화에 따라 베스킨라빈스를 찾게 됐다. IMF 경제위기를 맞아 다른 회사는 매출 격감으로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지만, 비알코리아는 꾸준히 성장세를 보였다. 그랬던 비알코리아 음성 아이스크림 공장이 외주화된 지 9년 만에 노조가 설립됐다. 공장이 생긴지 25년만이다. 품질관리 부문 등에 파견 나와 있는 원청 직원들에 비해 조합원들이 느끼는 차별은 뿌리 깊었다.

ⓒ 박종훈 기자 jhpark@laborplus.co.kr
2001년부터 생산 공정 전면 외주화

서희산업 노사는 지난 2월 7일부터 8차례에 걸친 올해 임단협 교섭을 진행해 왔다. 최초 의견이 대립되던 임금과 단체협약 부문은 충북지노위의 조정 막바지에 합의됐다. 또한 추가로 노조는 도급업체의 계약이 갱신될 경우 조합원들이 고용이 불안정해질 것을 우려해 전원 원청인 비알코리아가 직고용하라고 요구했다. 이 부분은 단협과는 별도의 합의를 통해 서희산업의 직원을 비알코리아로 소속전환하기로 했다. 단 그 시기와 방법에 대해선 10일 이내에 노사가 논의하기로 했다.

해당 합의서는 서희산업 노사를 비롯해 이례적으로 원청인 비알코리아 역시 사인을 했다. 그러나 합의 내용의 이행에 대해 원청은 “5년 뒤 사회적 분위기가 성숙하면 순차적으로 소속 전환을 추진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노조는 “합의 이행을 피하고 있다”며 5월 8일자로 파업에 들어갔으며, 서희산업은 직장폐쇄로 맞섰다. 20일 남짓 노조는 사옥 앞 주차장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였고, 5월 29일부터 20일 남짓 상경 투쟁 중이다.

농성장에서 만난 조합원들의 얘기를 들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들이 일손을 놓고 있는 동안 출고되고 있는 제품에 대한 걱정이었다. 6월 18일 현재, 서희산업을 통해 확인한 바로는 6개월 기간제 직원으로 신규 채용한 인원과 파업 복귀 인원 5명, 비조합원 12명 등 정규직 직원 17명 등, 도합 80여 명의 직원들이 아이스크림을 생산하고 있다. 기존의 생산직 조합원 수와 맞먹는다.

“16년, 17년을 이곳에서 일한 거예요. 처음 입사할 때는 어떤 브랜드인지도 몰랐죠. 다들 ‘하드 공장’이라고 부를 정도였어요. 원료와 공기를 얼마나 섞어야 하는지,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우리끼리 얘기지만 ‘혼이 담긴 제품’을 만들자고 열정을 불태웠죠. 연간 불량이 6억 원 정도 나던 것을 제로로 만들었을 때는 정말 신나고 보람 있었습니다. 피땀 흘린 일터를 저 앞에 놔두고 여기 이러고 있어야 하는 게 정말 열 받는 거죠.”

17년간 근무했다는 조합원 정 모 씨는 얘기 끝에 어두운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원료와 얼음을 얼마만큼 혼합해야 하는지, 그리고 섞는 과정에서 공기는 얼마만큼 불어 넣어야 혀에서 살살 녹는 시원한 식감의 제품이 만들어지는지 조합원들은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자기 손이 타지 않은 제품이 실려 나가는 대형 냉동차를 볼 때마다 이들은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의 입맛이 고급스러워지고 다양한 제품마다 갖가지 재료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급조된 직원들이 행여 품질 미달의 제품을 만들지는 않을까 우려스럽다.

ⓒ 박종훈 기자 jhpark@laborplus.co.kr
파업 중에도 아이스크림 걱정

개별 조합원들의 우려를 반영해 노조는 “실제로 대체인력이 생산한 제품들의 품질이 매우 의심스럽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식품산업이라는 특성 상 생산직들은 건강진단을 받은 후 발급되는 보건증을 소지하고 있어야 되는데, 이 부분도 미심쩍다고 주장한다. 그에 반해 사측은 “문제없다”고 장담하고 있다. 원청인 비알코리아의 홍보담당자는 “서희산업에 입사하기 위해 필요한 서류 중 하나가 건강검진 후 발급된 보건증”이라고 확언했다. 서희산업의 박건기 상무 역시 “부적격한 사람을 채용하거나 품질 미달의 제품을 출고한다는 것은 지나친 인신공격”이라고 주장했다.

아무래도 신규 인력을 채용하다보니까 기존 조합원들이 작업하는 것에 비해 생산량이 못 따라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비알코리아와 서희산업 관계자는 시인했다. 서희산업 박 상무는 “매달 원청에서 생산 물량 요청이 들어오는데, 5월과 6월 사이 한달 동안에는 주문받은 물량을 채 맞추지 못했다”고 밝혔다. 가격으로 환산하면 62억 원 어치라고 한다.

박 상무는 “조합원들이 바라는 바를 이해 못하지는 않지만, 회사 입장에서 과도하다”며 “노조의 요구대로 한달 사이에 생산직 83명을 전원 원청이 직고용하게 되면, 하청업체인 서희산업은 당장 다음날부터 폐업해야 될 지경”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단 현장에 복귀해 일하면서 노사간 대화를 통해 단계적으로 원청에 건의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어차피 하청 노사간에 해결해야 될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상황을 보아가며 원청에 요구하자는 얘기다. 비알코리아와 도급 계약을 맺고 있는 서희산업의 입장에선 원청에 과도한 요구를 무작정 들이밀기가 곤혹스럽다는 것이다.

비알코리아도 노조의 요구가 대단히 과도하다고 보고 있다. 지난 교섭에서 노조가 조합원들의 고용불안 문제를 들고나오자 이에 대한 대책으로 기존에는 매년 갱신되던 도급 계약을 4월 11일자로 서희산업과 10년 장기 도급계약을 맺는 것으로 정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조건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파격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11년간 하청 직원의 차별을 견뎌 왔는데 다시 10년간 노예 노릇을 하라는 거냐”며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서희산업, “품질저하는 없다”

원청과 하청, 노조가 얽혀 있는 서희산업 문제는 파업 40일을 넘기고 있음에도 아직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다. 원청인 비알코리아는 당사자인 서희산업의 노사가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서희산업노조는 권한이 없는 하청이 아니라 원청을 압박해 반드시 직고용을 성취해 내겠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하청인 서희산업은 회사가 노조에게 양보하고 싶어도 지금 상황에선 해 줄 게 없다는 입장이다. 원청은 하청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하청은 노조의 입장에 대해 손사래를 치고 있으며, 노조는 원청을 직접 타격하겠다고 경고하고 있다.

노조의 상급단체인 화학노련이 전면에 나서고, 한국노총 역시 전력으로 서희산업 문제 해결에 집중하겠다고 천명했으며, 여야 당대표를 비롯한 정치권에서도 이 문제에 개입하고 있다. 하지만 제도 정비를 비롯한 간접고용 문제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 없이는 제2, 제3의 서희산업이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